요1801to11 -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시지 않겠느냐(요한109).pdf
본 문 : 요한복음 18장 1-11절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한 기도를 마치셨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위한 마지막 기도는 기도인 동시에 제자들을 향한 한없는 사랑의 표현이었고, 축복이었습니다. 물론 성령님께서 오셔서 제자들을 도와주실 것을 아셨지만, 심정은 자식들을 거친 세상으로 떠나 보내는 어머니의 심정 같으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을 위한 기도를 모두 마치신 주님은 이제 하나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지실 준비가 모두 끝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가오는 고난을 피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그것을 적극적으로 기다리시는 모습을 보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이끌고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2절을 보면, 그곳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자주 모임을 가지던 곳이었고, 그래서 유다도 그 곳을 잘 알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4절에서는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아시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상황들이 예수님은 닥쳐 올 일들을 피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다리시고 계셨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나타나있지 않지만, 다른 복음서를 보면 이 사건 이전에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정말 목숨을 걸고 기도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게 해 달라고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되어 떨어질 정도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도를 통해서 주님이 얻어낸 응답은 오히려 하나님의 침묵이었고, 그 침묵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져야만 함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응답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기도 뒤에 주님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복하는 모습을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도저히 그 문제를 놓고 땀이 핏방울처럼 되도록 기도한 사람의 모습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러 곳에서 바로 이런 모습을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원래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뜻을 맞춰나가는 작업입니다. 처음에는 우리의 뜻으로 시작했어도 나중에는 주님의 뜻으로 끝나야 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항상 주님의 응답이 무엇이든지 그 뜻에 순종할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을 아뢰기 전에 내가 그 기도를 통해 얻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마음을 얻기 위해서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내 뜻과 반대되는 응답을 얻더라도 평안을 잃어버리지 않고 기쁘게 따를 수 있게 말입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이런 기도자들의 모습을 몇 가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였던 한나를 생각해 봅시다. 한나는 하나님께 아들을 달라고 기진 맥진하도록 기도했습니다. 주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에게 아들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한나는 하나님과의 약속대로 아직 아기에 불과한 사무엘을 성전에 나실인으로 보냅니다. 우리의 정서로 보면 그것은 무척이나 몰인정한 모습인 것 같습니다. 마치 사이비 종교에 빠져있는 듯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한나는 하나님께 나실인으로 아들을 바칠 것을 전제로 아들을 달라고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그 응답으로 아들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나는 그 약속대로 하나님께 아들을 드린 것입니다. 그렇게 아들을 주님께 맡긴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한나에게는 슬픔과 아까움도 없습니다. 그저 담담하고 평안한 순종의 모습만이 있을 뿐입니다.
다윗도 이런 신앙의 모습을 보입니다. 밧세바와 불륜으로 생겨난 아들을 하나님께서 데려가시겠다고 말씀하시자 다윗은 식음을 전패하고 눈물로 아들을 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뜻을 거두지 않고 아들을 데리고 가시자, 그 소식을 듣고 나서 곧바로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신하들이 놀랄 정도로 냉정한 모습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다윗은 이제 그 뜻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았고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한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진정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원하는 것을 기도할지라도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결코 원망하거나 실망하는 모습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말고의 귀를 자른 베드로를 향해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들로서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항상 묵상하며 우리 기도의 원칙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하는 기도나,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정한수를 떠 놓고 비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기도에는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 순복이 항상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고난을 피하지 않는 여유와 손해를 무릅쓰는 담대함을 가지고, 그래도 의미있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려면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기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도 본능을 가지고 있는 인간인지라 고난과 손해 자체가 즐거울리는 없습니다. 우리는 때로 그것들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기도가 단지 그것을 피하기 위한 기도가 되게 하기 보다는 고난과 손해를 달게 받을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준비하는 기도가 되게 해야 합니다. 본능을 추구하는 기도가 되게 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본능의 요구를 이길 수 있게 하는 능력을 얻게 하는 기도가 되게 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아름답고 바람직한 교회라고 말할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렇게 심각하게 무너져 버린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순종의 용기를 얻기위해서 기도하고, 자신의 유익보다는 다른 이들의 유익을 선택할 수 있는 예수님을 닮은 대속적인 삶을 살아갈 은혜를 구하는 기도자들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도자들이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 뿐만 아니라 이 세상도 유익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주고 받는 세상입니다. 누군가가 주어야 다른 누군가가 받습니다. 또 일대일로 주고 받지는 않지만 우리는 어떤 누군가에게는 주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받으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점점 더 주려는 사람은 줄어들고 받으려는 사람들은 늘어가고 있습니다.
세상 뿐만 아니라 교회도 그렇습니다. 제가 작은 교회를 섬기면서 깨달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미 한국교회는 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큰 교회에는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계속 더 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교회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계속 줄어들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그것은 성도들조차도 이제는 주려고 하기 보다는 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가서도 받으려고만 하니 받는 것보다 더 많이 주어야 할 것 같은 작은 교회에는 사람이 오질 않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가 계산적인 삶을 살면 세상에는 답이 없습니다. 성도는 계산의 원리가 아니라 대속의 원리로 살아야 합니다. 조금 더 불편하고 조금 더 내어 줌으로써 내가 사는 세상, 내가 속한 교회가 좀 더 유익을 누리도록 하는 것. 성도는 그런 삶의 모습을 자신의 삶의 원리로 여기고 연습해 가야 합니다. 이미 내가 그런 대속의 은혜 때문에 구원을 얻었으며, 또 유익을 누리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내 힘으로 하려고 한다면, 내 결심으로만 그런 삶을 살아가려고 한다면 그것은 억지고 곤욕이 되고 얼마가지 않아서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대속적인 삶을 담대하게 맞이하기 위해서, 그 길을 당당하게 걸어가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 기도를 통해서 내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을 앞세우며, 이 세상에 예수님께서 남기신 것과 닮은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남기기 위한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주님을 닮은 대속적인 삶을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때, 우리들 또한 우리 주님처럼 우리 가정, 우리 교회, 우리 사회를 위한 작은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기드론 시내 건너편 동산 위의 주님의 모습을 묵상하시면서 그런 주님의 모습이 내 모습 위에 겹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 삶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배어나오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어주셔서 우리를 교회와 세상을 위한 작은 해답으로 사용해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