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901to1916 - 위에서 주시지 아니하였더라면(요한115).pdf
본 문 : 요한복음 19장 1-16절
설교 준비를 하려고 오늘 본문을 묵상하는데, 문득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이번 정부의 장관임명 청문회 생각이 났습니다. 어떻게 단 한 사람도 쉽게 그 자리를 통과하지 못하는지... 고위공직자였고 또 사회의 지도층이나 혹은 사회의 지성이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같이 법을 어기고 양심을 어기고도 그런 일들에 대한 문제의식이 그리도 없는지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나마 우리나라가 이정도라도 굴러가는게 정말 기적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왜 그 사람들은 그렇게 밖에 살 수 없었을까? 실제로는 다른 사람들을 지도하고 또 그래서 본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앞장서서 사회의 부조리의 온상 노릇을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생각에 그 이유는 어찌보면 그리 거창한데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주 단순한 것을 모르고 아니면 알더라도 무시하고 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누구이며 그래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우리나라, 그리고 우리 사회 안에서 자신이 누구이며 그래서 어떤 역할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전혀 생각하지 못했고 어쩌면 거기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물론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살지 못했던 것을 보면 그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본문을 읽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은 바로 오늘 본문 속에서 이런 사람들을 닮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드리기 위해서 정말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4절에 보면 빌라도는,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 가슴 아픈 모습이지만, 머리에는 가시나무로 왕관을 만들어 씌우고 몸에는 왕을 상징하는 자색 옷을 입혀 삐에로처럼 우스꽝스럽게 만든 예수님을 데리고 군중 앞으로 나와서 일부러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함이로라” 그리고는 예수님이 나오시자 “보라 이 사람이로다”라고 소개했습니다. 아마도 빌라도는 예수님을 이렇게 우스운 모습으로 만들어 사람들 앞에 보임으로써 사람들의 웃음을 유도했는지도 모릅니다. 경직된 분위기를 풀고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석방시켜 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런 모습의 예수님을 보고 더 극렬하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질렀습니다. 당황한 빌라도는 나는 예수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다고 항변하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자기들 법대로 하면 당연히 죽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이는 일을 더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더 노력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유대인들이 빌라도의 약점을 악용하는 바람에 그들의 압력에 무릎을 꿇고 로마의 총독으로서 공식적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유대인들에게 내어주고 맙니다.
유대인들은 처음부터 초지일관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결론을 얻어내기 위해서 초지일관 잘못된 길로만 갑니다. 빌라도가 예상과는 달리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노력하자 빌라도가 예수를 놓아주면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한 사람을 놓아주는 것이므로 그것은 로마황제에게 반역하는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빌라도가 최종적으로 “너희는 유대인이면서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못 박아 죽이라고 하느냐? 너희는 어찌 나에게 너희 왕을 죽여달라는 이상한 부탁을 하느냐?”라는 말로 설득해 보려고 했지만 “우리의 왕은 가이사 밖에 없다. 그러니 예수는 우리 왕이 아니고 죽어야 하는 반역자다.”라고 주장해서 결국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도록 넘겨받게 됩니다. 다른 일들도 그렇지만 유대인들의 마지막 주장은 전혀 자신들의 생각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정말 유대인들이 로마황제를 자기들의 왕으로 생각했을까요? 가이사를 자기들의 유일한 왕으로 인정하며 섬겼을까요? 그럴 마음이 있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특히 지금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종교적인 유대인들은 로마와 로마 황제를 혐오하고 있었습니다. 이방인이면서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고 있고, 성전을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그 당시 다윗처럼 위대한 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왕은 없었습니다. 왕이 있다면 그 메시야 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로마 황제를 왕으로 인정하는 것은 단순한 정치적인 변절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이 주시는 왕이 아닌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 그것도 스스로를 신으로 말하는 로마의 황제를 왕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적인 변절을 의미했습니다. 지금 유대인은 그런 행동을, 그것도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거짓으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의 탈선과 유대인들의 위선은 모두가 다 자신이 누구인지, 그래서 어떤 역할을 하며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망각했고 또 거기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저질러진 악한 일들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의 총독으로서 자신의 본문을 망각했습니다. 로마는 법을 중시하는 나라였습니다. 물론 정복한 땅의 총독으로서 복잡한 위치는 있지만 그는 로마법의 수호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의 권한은 바로 그것을 위해서 그에게 맡겨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정치적인 입장 때문에 자신의 본분을 망각했습니다. 자신이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선택,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선택을 하지 못했습니다. 노력은 했지만 결국 압력에 굴복해서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모는 장본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때까지만 해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직하고 바른 백성으로 하나님을 드러내며 살아야 했고, 또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메시야를 기다려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두 가지가 유대인의 존재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저 자신들이 믿는 ‘종교’를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율법을 어겼을 뿐만 아니라 거짓으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로마황제를 섬기는 백성이라고 말하기 까지 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들의 영혼까지 팔아먹게 되었던 것입니다.
11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권력을 내세우며 거들먹 거리는 빌라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내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다.”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이것이 빌라도나 유대인들이 잊고 있었던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진리’였습니다. 그들이 탈선과 위선을 저질렀던 이유는 바로 그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위에서 주셔서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잊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위에서 받은 것은 내 목적이나 내 이익을 위해서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아무리 대단한 힘을 의미하는 것이고 아무리 굉장한 권한을 뜻하는 것일지라도 위에서 주셔서 받은 것은 모두가 다 내가 나를 위하여 내 마음대로 사용해서는 안되고 그것을 나에게 맡긴 분의 마음과 생각에 합당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권력을 목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위에서 주어서 받았기 때문에, 받은 목적대로 사용해야하는 도구로 생각하지 않았고, 자기 것으로 여겼습니다. 자기 것이니 그것을 잘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지키고 더 크게 만드는 것이 그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그 껍데기를 지키느라고 내용을 저버리고 말았고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도록 내어주는 악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실제로 기록을 보면 그가 그렇다고 해서 그 껍데기를 잘 지키며 잘 살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빌라도는 이런 기회주의적이고 권력지향적인 태도로 인해서 서기 36년까지만 총독으로 일했을 뿐이고 자신의 실수로 본국으로 송환된 후에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진리와 여호와 신앙의 청지기라는 위대한 소명을 맡은 민족이었으면서도 그저 자신들의 종교적인 신념이라는 껍데기를 지키느라 급급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유일한 백성이라는 자존심과 정체성까지도 팔아먹고 스스로를 신이라 주장하는 로마황제를 섬기는 사람들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본문을 묵상하면서, 과연 나는 위로부터 무엇을 받았으며 또 무엇을 받지 않았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먼저 우리가 위로부터 받은 것은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서 내 맘대로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잊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 그것에 집착하게 되고, 반대로 그것을 남용하고 오용하게 됩니다. 그것으로 남을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합니다. 또 하나 무엇을 받지 않았는지도 꼭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위에서 주시지도 않은 것을 받았다고 생각할 때, 남의 것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하나님의 것을 내 것이라고 여겨서 내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게 됩니다. 실제로 교회나 사회가 어지러워지고 힘들어 지는 것은 어쩌면 모두 다 이 두 가지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거나 혹은 이 두 가지에 대해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생겨나는 어려움들일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들로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단지 ‘위에서 주셔서 받은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교회 안의 직분이나 역할, 그리고 그것이 주는 영향력, 사회에서의 위치와 그것이 주는 영향력은 모두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우리는 받은 것을 받지 않은 것인양 사용해서도 안되지만 받지 않은 것을 받은 것처럼 사용해서 안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본연의 자리와 소명을 떠나 하나님에게 의미없고 가치없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항상 위에서 주신 것이 무엇인지 잘 헤아리고 그것을 주신 분의 뜻에 맞게 잘 사용함으로써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높이고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인생을 살며, 하늘의 상급을 준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