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925to27 - 사랑하시는 제자가(요한117).pdf
본 문 : 요한복음 19장 25-27절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천천히 죽어가고 계셨습니다. 그 죽음은 승리를 위한 죽음이었고 부활을 위한 죽음이었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났고, 제자들도 뿔뿔이 흩어져 예수님 곁을 떠났습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여전히 십자가 곁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인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사랑하시는 제자”도 그 사람들 중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말합니다. 학자들은 이 “사랑하시는 제자”는 바로 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이었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떠나는데, 모든 사람이 버리는데 끝까지 그렇게 버림받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특히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을 모독한 자로, 로마인들에게는 반역자로 처형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예수님과 끝까지 함께 한다는 것은 더 어렵고 위험한 일일 수 밖에 없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어머니라 남아 있었고, 이모는 이모라서 자리를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그 자리를 지켰던 다른 사람들은 엄청난 부담과 위험을 감수하고 그 자리를 지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가족이 아니면서 끝까지 십자가 곁을 지켰던 사람들의 공통점을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던 사람들이었다고 암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그녀는 예수님으로부터 큰 용서를 받았으며, 마르다와 나사로의 자매로써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오빠는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는 은혜의 주인공이 되었구요. 글로바의 아내는 누구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또 한 제자 그는 자신이 예수님으로부터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소개할 정도였으니 주님의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런 사람들만이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그 분의 험한 십자가 곁을 끝까지 지켰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에게 누가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누가 끝까지 예수님을 떠나지 않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주는 것 같습니다. 본문이 주는 대답은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그 사람의 결심이나, 그 사람의 의지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참으로 그 사람을 주님 곁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힘이 되는 것은 그 사람의 의지나 결심이 아니라 그가 알고 깨달은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를 알면 결코 예수님을 떠나거나 신앙을 버리지 않습니다. 바로 그가 알고 있는 주님의 사랑의 크기가 그 사람을 주님께 붙들어 매어 놓는 힘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누구나 주님의 사랑을 받아야만 비로서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 느낌이 없는 상태에서는 주님을 정말로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의 깊이를 아는 만큼만 주님을 사랑할 수 있으며, 그만큼만 주님을 신뢰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신앙적 노력을 기울이기 전에 먼저 주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마다 성경 속에서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또 더 제대로 알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또 항상 주님께서 나에게 베푸시는 그 사랑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그 사랑에 대해 더 민감해져야 할 것입니다. 좋은 신앙, 굳건한 신앙, 그러면서도 감격이 넘치는 사랑을 원한다면 이것을 우선시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에 깊이 깨달아지면 깨달아질수록 여러분의 신앙도 그 만큼 깊어져 갈 것이고, 주님을 향한 사랑도 더욱 커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은 주님의 마지막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어머니를 잊지 않았고, 그 고통의 순간에도 어머니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던 분이셨지만, 동시에 인간적인 책임도 다하신 분이셨습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을 핑계로 인간적인 책임을 소홀히 할 때가 많지만, 우리 주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만큼, 땅에 있는 어머니도 소중하게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계실 때에, 고르반에 대해서 책망하신 적이 있습니다. 고르반은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라는 뜻으로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고르반’이라는 말을 자신들의 인간적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사용했습니다. 특히 부모를 모시고 공경해야 할 의무를 회피하려고 할 때, 부모에게 드려야 할 것에 대해서 ‘고르반’을 선언함으로써 부모에게 드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람들이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이런 관행을 위선과 거짓이라고 나무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의무와 사람들을 향한 의무를 주셨습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우리가 소홀히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먼저냐 사람이 먼저냐 한다면, 분명히 하나님이 먼저입니다. 국법을 지킬 것인가, 신앙을 지킬 것인가 하는 두 가지 문제가 첨예하게 부딪히고 있다면 우리는 신앙을 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를 할 수 있으면서도 편리를 위해서, 내 이익을 위해서 둘 중의 한 가지를 소홀히 할 때가 많은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적으로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때로는 아주 특별한 부르심으로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의무를 잠시 뒤로 해야 할 때가 있지만, 이것을 일반화시켜서는 아무 때나 적용시켜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만큼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균형잡힌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이 세상을 구원하실 막중한 책임을 지고 이 땅에 오셨고, 살아가셨고, 또 지금 그것을 위해서 지금 십자가에 달려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땅에서 자신을 낳아주고 키워준 어머니 마리아를 잊지 않고 있었고 또 그렇게 다. 가장 위대하고 막중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임무가 완성되는 그 중요한 순간에도 가장 기본적인 자녀로서의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신앙은 주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 안에서 다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주님의 사랑을 아는 만큼만 주님을 사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주님의 사랑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기도와 묵상을 통해, 그리고 삶의 순간 순간 주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고 또 느끼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신앙도 더 깊어지고 풍성해 질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은 가족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흉내내며 사랑할 때, 주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수학을 열심히 공부해 본 사람이 수학이 얼마나 어려운 줄 압니다. 그래서 사랑하려고 애써 본 사람들만이 주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사랑이 얼마나 깊고 풍성한 사랑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주님의 사랑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러셨듯이 힘들고 어려워도 사람을 사랑하는 일을 소홀히 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다. 그럴 때, 우리들의 신앙은 비로소 주님을 닮은, 그래서 주님을 떠나지 않는 참된 신앙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또 그 분의 사랑에 대한 감격으로 가득 찬 신앙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사람들을 사랑하는 신앙을 두 날개를 모두 소유하는 사랑 안에 견고히 거하는 신앙인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