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938to42 - 요셉과 니고데모(요한119).pdf
본 문 : 요한복음 19장 38-42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여러가지 면에서 우리들로부터 아주 오랜 세월동안 인간이 간직해 왔던 미덕들을 하나씩 하나씩 빼앗아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 관심, 기쁨, 감사, 나눔…… 세상은 더 풍족해 가고, 더 편리해져 가지만 그런 점에서 사람의 마음은 오히려 더 빈곤해져 가고 있고 텅 비어져 가고 있다는 것은 신불신을 막론하고 모두가 다 지적하는 모든 사람들의 문제일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하게 손상을 받거나 희미해져 버린 미덕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용기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현대인들은 모두가 다 겁쟁이가 되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용기가 없어지는 것은 우리가 점점 더 가치나 의미보다는 이익에 민감해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용기를 내려면 큰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가 많은데, 그런 댓가를 치르기를 꺼리다 보니, 나와 직접 연관된 일이 아니면, 내 이익과 관련된 일이 아니면 좀처럼 나서려고 하지 않고, 용기를 내지 않는 것이 당연한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속에도 예수님의 죽음과 연관된 두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입니다. 둘은 모두 예수님의 제자에 속해 있었습니다. 12제자는 아니었지만 많은 제자중에 이들도 속해 있었습니다. 요셉은 돌아가신 예수님을 장례지낼 묘지를 제공했고, 니고데모는 장례에 쓸 향품들을 제공했습니다. 이들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장례를 아마도 무척 초라한 장례가 되었을 것입니다. 관례상 처형당한 죄수의 시체는 치욕스러운 방법으로 제거되었다고 합니다. 아마 이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예수님도 까마귀나 독수리의 밥으로 광야에 버려졌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 둘이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에 용기를 냈기 때문에 예수님의 장례는 온전한 장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사건과 관련해서 아리마대 요셉에 대한 이야기는 마가복음 15장 42절 이하에 조금 더 자세하게 나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요셉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하니 이 사람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아리마데 요셉은 분명 예수님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신분은 다른 제자들과는 무척 달랐습니다. 이 사람은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산헤드린 공회원이면 지금 우리나라의 국회의원 이상의 신분입니다. 이런 신분으로써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와 제사장들이 함께 작당을 해서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당시 상황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일 뿐만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신분과 관계를 모두 포기해야 하는 일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숨기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이제까지는 그것을 드러내놓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이제까지의 자신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의로우신 주님의 죽음 앞에서 더 이상 자신의 양심과 바른 생각을 거부할 수 없었고 그래서 당당히 빌라도 앞에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찾아서는 자신의 묘지에 장사지냈던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진 것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면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가치있고 정직한 선택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위해서 가진 것을 내려놓기를 꺼리는 법입니다. 그래서 밝혀야 할 것을 숨기게 되고 바른 것에서 멀어지게 되죠. 요셉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서 빌라도를 찾아오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과 별반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가장 그 사실을 숨겨야할 때에 드러내었고, 결국 상황으로 보아서는 가장 정직하기 어려운 때에 정직한 길을 택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예수믿는 사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의 마땅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불이익 앞에서 망설일 수 있습니다. 손해 앞에서 주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끝까지 양심을 속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어느 시점엔가는 옳은 방향으로 되돌아 와야 합니다.
니고데모도 그랬습니다. 이 사람도 유대인의 관원이었고 또 랍비였습니다. 이 사람도 처음에 예수님께 나올 때에는 무척 주저하고 숨기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 2절을 보시면, 니고데모는 영생이라는 아주 중요한 주제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왔지만, 그러면서도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진리를 찾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둠에 속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예수님을 찾아올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에게는 영생의 문제보다 자신의 입장이나 체면이 더 중요했으니까요. 그런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은 모든 사람들, 심지어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을 떠난 상황에서 당당하게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백 근이나 되는 침향을 가지고 예수님의 장례를 제대로 치뤄 드리려고 말입니다.
요셉과 니고데모는 유대의 관원이었습니다. 이런 신분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숨겼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끝까지 그렇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의 양심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의 양심이 그들을 결국에는 어두운 곳을 떠나 밝은 곳, 진리가 있는 곳으로 나오게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신실함과 정직함이란 아무런 고민도 망설임도 없는 상태를 말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시험도 없는 상태는 인간의 삶 속에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가끔 성도들 중에는 고민하는 것조차, 망설이는 것조차 죄라고, 불신앙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신데, 인간의 본성은 타락해 있어서 자신의 이익이 걸린 일에 있어서는 고민할 수 밖에 없고, 망설일 수 밖에 없으며, 불신앙적인 생각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주님께서는 이것까지 나무라지는 않으십니다. 중요한 것,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그런 고민 후에, 그렇게 망설인 후에, 그런 불신앙적인 생각이 든 후에 어떻게 하느냐, 결국에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처음에는 어떤 반응을 보였고 어떤 선택을 해서 어디로 향해 갔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정직하게 반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하며, 그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항상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또 우리의 삶을 그런 방향으로 이끌어 가야 할 것입니다.
아리마데 요셉과 니고데모의 그런 용기있는 돌이킴 덕분에 예수님의 장례는 성경의 예언대로 부자의 묘실에 장사지내지는 그런 장례가 될 수 있었고, 정직한 헌신이 향기와 영광을 더하는 온전한 장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가치있고 의미있는 것 중에서 쉬운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을 살아가려면 조금의 불편함이나 손해를 감수할 수 있는 용기를 완전히 잃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처음에는 고민하고 처음에는 시험을 당하더라도 결국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양심을 지키심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무게있고 가치있는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