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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04.17. 새벽예배 - 어찌하여 우느냐(요한복음 121)


요2011to18 - 어찌하여 우느냐(요한121).pdf


20130417D (#1).mp3.zip



  문 : 요한복음 20장 11-18절


베드로와 요한은 빈 무덤만 확인하고서 금새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정말 전형적인 남자의 반응이죠.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이미 두 번째 예수님의 무덤에 온 것이지만 두 사람이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여전히 무덤에 남아있었습니다. 잠시 동안은 무덤 밖에서 울기만 하다가 이제 직접 무덤 안을 확인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안에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예수님께서 누우셨던 그 자리에 하나는 머리쪽, 하나는 발쪽에 앉아있었습니다. 물론 이들은 천사였지만 마리아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천사가 물었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마리아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했던 말만 반복했습니다.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러는 찰라 뒤에서는 인기척이 났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또 한 남자가 서 있었습니다. 그 남자도 마리아에게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여자여 어찌하며 울며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그를 동산을 지키는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있는 줄 알겠다 싶어서 그 사람에게 간청을 합니다. “당신이 시신을 옮기셨다면 어디 두었는지 알려주세요. 그러면 제가 가지고 가겠습니다.” 그 남자는 동산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이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렇게 보면 마리아는 그가 그렇게 찾고 있는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을 눈 앞에 두고도 전혀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 목소리를 듣고도 자기 앞에 서 있는 분이 자기가 찾는 예수님이신지를 모를 수 있는지 우리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이지만 마리아는 그랬습니다. 자기 앞에 서서 자기에게 말을 걸고 있는데도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를 보았습니다. 또 예수님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두 번이나 똑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왜 우느냐?” 이것은 우는 이유를 묻는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이 두 번의 질문은 울 이유가 없는데 왜 우느냐는 반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질문 중에서 두 번째 질문, 그러니까 “누구를 찾느냐?”는 질문은 “왜 다시 살아난 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찾느냐? 내가 이렇게 다시 살아 네 눈 앞에 있는데 왜 너는 계속 죽은 나를 찾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천사들의 질문도, 예수님의 질문도 마리아의 주의를 환기시켜서 빈 무덤이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이 도둑맞은 증거가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신 증거라는 것을 알려주려고 마리아에게 주어진 말씀이었지만 마리아는 그 두 가지 경험을 통해서도 전혀 슬픔과 절망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누가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해서 이런 특권을 누렸습니까? 천사가 그것도 둘씩이나 나타나고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시고... 정말 그 누구도 누릴 수 없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두 번의 특권을 모두 놓쳐 버렸습니다. 


제가 목사로 성도들을 도와주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신앙적인 권면들을 하고 상담을 해 드리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그런 권면과 상담을 잘 받아들입니다. 권면과 상담을 통해서 자신의 상황을 다시 보게 되고 그래서 예전보다는 훨씬 더 수월하게 상황에 대처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분들은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안되는 이유,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만 이야기 합니다. 그렇게 되면 상담과 권면은 아무런 도움이 안됩니다. 몇 시간을 이야기하고 또 몇 번을 반복해서 이야기 해도 계속 제 자리에서 근심과 걱정, 고통에 빠져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상황, 자기가 생각하는 자신의 상황에 지나치게 몰두해 있거나 함몰되어 있으면, 그 상황 때문에 굉장히 힘들고 고통스러우면서도 그 자리에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그럴 때는 수많은 설교를 듣고 권면을 듣고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직접적인 은혜의 기회를 주시더라도 그 기회마저 놓쳐버리고 맙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말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성경 속에만 있지 않습니다. 현실 속에도,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 속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 그리고 자신이 느끼는 슬픔과 고통만 생각하느라고 그 이외의 것들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 속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그런 것은 성도에게 어울리는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있고 또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어제도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항상 이 자리는 남겨놓고 있어야 합니다. 마리아가 만약에 예수님께서 생전에 예수님께서 해 주신 부활에 대한 말씀을 생각할 수 있을 정도만이라도 자신이 느끼는 자신의 슬픔에 대해서 여유가 있었다면, 천사들이 말을 걸었을 때, 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질문을 해 오실 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막달라 마리아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자기 슬픔과 자기 생각에 빠져서 빈 무덤을 통해, 천사를 통해, 그리고 직접 나타나셔서 부활을 알려주시고 보여주시려는 그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슬픔과 아픔 가운데 있는 막달라 마리아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살아계실 때, 마리아를 불렀던 그 음성으로 막달라 마리아를 불렀습니다. “마리아야”하고 말입니다. 그 부르심이 마리아에게는 빛이 되었습니다. 마리아를 그가 함몰되어 있었던 깊은 어둠 속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빛이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아니, 자신을 부르시는 분이 부활하신 주님이라는 사실을 직감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슬픔에 빠져있던 마리아를 일깨웠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 부르심에 “랍오니”라는 말로 대답했습니다. “랍오니!” 이 말은 선생님을 아주 친밀하게 부르는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힘든 상황과 슬픔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우리 밖에서 우리에게 들려오는 권면이나 위로에 조차도 귀를 기울이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도 주님은 여전히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 계속해서 찾아오시고 우리를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애쓰십니다. 그럴 때 주님은 우리에게 친밀하고 개인적으로 다가오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리아가 자신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것이 예수님의 음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이름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부르신 마리아의 이름 속에는 마리아를 향한 예수님의 모든 마음과 사랑, 그리고 그를 아시는 모든 아심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그 어떤 은혜의 수단도 받아들이기 힘들 때는 오히려 너무 애쓰지 말고 잠잠히 그 동안의 나와 주님 사이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와 그 관계 속에서 나누었던 주님과의 교제를 묵상해 보는 것이 더 도움이 될 때가 많습니다. 주님과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누린 은혜들을 묵상하게 될 때, 우리 영혼은 다시 일어설 힘을 얻게 되고, 그 따뜻하고 능력있는 은혜를 다시 기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묵상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 주님과의 풍성한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는 슬픔과 아픔을 견디어 낼 힘을 얻게 되고, 그러면 마음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며 삶도 달라지게 됩니다. 더 이상 눈에 보이는 것, 몸으로 느껴지는 것이 전부가 아닌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드디어 빈 무덤은 예수님의 시신이 도둑맞은 증거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증거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앞에서 자신에게 말을 걸고 이름을 부르시는 분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불쌍한 예수님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영광스러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마 너무 기쁜 마리아는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했었던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나를 붙잡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학자들은 이 말씀을 이렇게 또 저렇게 해석하지만 저는 이 말씀이 “나를 붙잡고 있는 것보다는 내가 하늘로 가는 것이 너희에게 훨씬 더 유익하니 나를 붙잡지 말아라”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자신을 붙잡지 말라고 하시면서 “아직 내가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이전에도 여러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전에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만 한다고 하셨을 때, 더불어 말씀해 주신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번째는 가셔야만 하늘의 거처를 마련하고 제자들을 맞이해 들일 수 있고, 두번째는 가셔야만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실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붙잡으면 안됩니다. 예수님을 놓아드려야 하며 아버지께로 가셔서 우리를 위한 영원한 거처를 마련하시도록 성령을 보내주시도록 해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 뿐만 아니라 그 후에 영광스럽게 부활하시고 또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죄가 용서되었음을 믿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하늘영광의 소망과 성령의 능력이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바로 이 두 가지를 힘입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음성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막달라 마리아는 더 이상 울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첫번째 전령이 되어 제자들에게 에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달려 갔습니다. 


우리가 절망과 슬픔 속에 있을 때, 그럴 때 일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상황이나 감정이 아니라 나와 우리 주님 사이의 개인적인 관계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 관계 안에서 나의 이름을 불러주시는 주님을 다시 만나야 합니다. 그 만남이 없기에 우리의 슬픔과 절망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내주신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잊지 말고 우리를 위한 영원한 거처가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에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실망과 슬픔의 자리를 벗어나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 기쁨과 소망 그리고 증인의 자리로 되돌아 갈 수 있습니다. 언제나 제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이 능력있는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