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0112to14 - 오로지 기도에 힘쓰니라(사도행전8).pdf
본문 : 사도행전 1장 12-14절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것이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람들에 불과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이었고 약속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남기고는 감람산에서 훌쩍 하늘로 올라가 버리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저 뿔뿔이 흩어지든지 아니면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저 예수님의 약속을 붙들고서 그 약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리든지 말입니다.
다행히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그 예수님과 40일을 함께 지내시기 전하고는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전의 실수와 실패를 답습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원래 머물던 한 다락방으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약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차피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것이니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때까지 그냥 기다리기만 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들이 그냥 기도했다고 말하지 않고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그 다락방에 모였던 사람들이 120명이나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12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계속해서 기도에 헌신했던 것입니다.
원래 성령충만함을 주시고 권능을 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이 되게 해 주시겠다는 것에는 별다른 조건이 붙어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그저 기다리라고만 하셨지 별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으니까요. 그런데, 이들은 그 기다림을 그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이나 간절함도 없이 수동적으로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그런 기다림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주실테니 기다리라는 말씀을 주실 때까지 기도에 전념하라. 성령충만을 위한 기도에 헌신하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령충만을 주실 때까지 오로지 이것을 위한 기도에 헌신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에 대한 약속을 주실 때, 그 약속의 성취를 위해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다리라’고 하시는 것은 ‘주실 때까지 계속 기도하면서 기다리라’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수많은 약속이 있습니다. 공급해 주심에 대한 약속, 보호에 대한 약속, 인도에 대한 약속, 구원에 대한 약속, 완전한 섭리에 대한 약속 등. 정말 수많은 은혜에 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이런 약속을 대할 때, ‘아! 하나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셨고,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으니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이렇게 해 주실 거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또 그런 약속들이 성경에 있으니 그 모든 약속들이 내 삶에 그냥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는 것이죠. 그런데, 정말 그렇던가요?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만 하고 살아가면 약속된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던가요?
많은 성도들이 성경의 약속을 잘 믿지 못합니다. 그냥 읽거나 들을 때는 믿어지는 것 같은데, 살아보니 성경의 약속이 자신의 삶에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랬을 것입니다. 성경의 약속이 삶 속에서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요? 성경의 약속이 거짓말이기 때문일까요? 그게 아니라면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혹시 그 약속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반응이 잘못되어서 그런 것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기다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진짜 의미를 잘못 알아들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서 “내가 너희를 만족하게 해 주겠다. 부족함이 없게 해 주겠다”고 말씀하신 약속이 굉장히 많습니다. 읽을 때는 참 은혜롭고 너무 좋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아무리 살아봐도 영 만족이 없습니다. 여전히 부족함이 느껴집니다. 마음에는 그러한 만족이 주는 기쁨과 평안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약속이 있지만 그 약속이 현실로 이어지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실 것을 기다릴 때, 우리가 적어도 어느 정도는 꼭 만족시켜야 할 두 가지 조건이 있는데 우리가 그 조건을 만족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두 가지 조건이란 바로 믿음이며, 또 그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만족을 약속하셨다고 해서 우리는 그저 넉놓고 그 만족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온전한 만족을 약속하셨으니 하나님께서 그 만족을 주실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내 경험과 생각이 어떻든지 간에 하나님 안에서 온전한 만족이 가능하며 하나님께서는 그 만족을 꼭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 믿음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달라고 주실 줄로 믿는다고, 꼭 허락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두 가지는 두 개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첫번째 것이 확실하면 두번째 것은 그냥 따라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사람은 그 약속의 성취를 위해서 기도하게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상합니다. 믿음이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언제나 진중한 기도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진짜 좋은 것, 그러면서도 도저히 세상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믿을 때, 그 믿음은 반드시 간절한 기도, 끈질긴 기도, 그러면서도 힘있는 기도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도저히 얻을 수 없는 것, 그리고 그 어떤 현실적인 것보다 더 현실적이고 가장 능력있는 것.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충만입니다. 성령충만함이란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온전히 거하시는 것이니까요. 성령충만은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좋고, 만족스러우며, 실제적인 능력을 지닌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절대로 이 세상에서, 그리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내 힘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성령충만함이 이렇게 좋고, 이것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확신한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할까요?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그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이것을 위해서 기도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 성령충만이 지금까지 나를 묶고 있던 모든 것에서 나를 풀어주고 그래서 능력있고 가치있는 하나님을 위한 최고의 삶을 살게 해 준다는데 그것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거듭 말씀드리지만 오늘 우리에게도 성령충만함의 약속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은 언제나 동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오늘도 그 때처럼 성령충만한 자들을 온전히 변화시키고 능력있게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나 자신을 위해서나 가장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으십니까? 우리가 성령충만하면 그 옛날 제자들과 성도들처럼 하나님을 위해 가치있고 능력있고 또 자유로운 삶을 살며, 교회적으로는 정말 온전한 우리가 꿈꾸는 그런 교회를 이루어 가게 될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요? 이것을 정말로 믿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요? 달라고 졸라야지요. 떼를 써야지요. 주신다고 하셨고, 그러면 그렇게 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니 그것을 믿고 주실 때가지 기도해야지요. 전 예수믿는 성도들을 보면서 참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나쁜 일, 힘든 일이 생기면 그것을 가지고는 그렇게 열심히 뜨겁게 기도하면서, 왜 가장 좋은 것을 주시겠다는데 그것은 간절히 구하지 않는지, 왜 달라고 조르지, 왜 그것에 대해서는 욕심을 내지 않는지 말입니다. 물론 예수를 믿으면서 현실적인 문제도 해결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문제해결 중심의 신앙은 진짜로 능력있는 신앙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 신앙은 문제가 있으면 뜨거워졌다가도 문제가 해결되면 식어 버리고, 또 문제가 생겨야만 다시 간절해 지는 것이어서 신앙의 열정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성도들은 기도했습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오로지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하루 이틀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주실 때까지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약속대로 받았고, 또 그래서 약속대로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 기도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해 줍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메, 마태와 및 알페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이 명단의 맨 앞에는 12명의 사도들의 이름이 들어있습니다. 사실 이 명단은 가룟 유다를 제외하면 누가복음 6장에 나오는 명단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두 명단 사이에는 작지만 큰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그 이름들의 차례가 다릅니다. 별것 아닌 것같아 보이는 이 차이점 속에는 커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명단은 가족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명단은 그것이 마구 뒤섞여 있습니다. 여기에 왜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을까요? 그것은 이들의 과거역사를 생각해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예전에 함께 예수님을 따라다니기는 했지만 저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 이익이란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한 자리 차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그 순간에도 서로 니가 높으니 내가 높으니 하고 다투었고, 형제가 예수님 옆에 착 붙어서는 왕이 되시면 자기들을 예수님 양쪽 제일 높은 자리에 앉혀 달라고 청탁하기도 했습니다. 그 기회를 놓친 다른 사람들은 화를 내고 그들을 괴씸히 여기기 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락방에서 그들은 더 이상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그런 틀을 다 깨고 모두가 다 헤쳐모여를 했습니다. 한 울타리 속에 있으면서도 물과 기름처럼 따로 놀던 그들이 이제는 그런 모든 이익과 구분을 넘어서서 이미 하나가 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점은 그 열 한 명 중에 셀롯인 시몬이 여젼히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셀롯인은 열심당원인데요. 이들은 테러나 무력의 사용도 불사하는 급진적인 독립운동단체였습니다. 처음에 시몬이 예수님을 따라다닐 때, 그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독립하는 것을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온톤 그런 관심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놀랍게도 성령충만을 덧입기 위해서 기도하는 자리에 함께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 시몬에게 사고방식과 가치관에 아주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그들 중에는 마리아와 예수님의 동생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전에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잡으러 돌아다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제는 예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는 자리에 함께 있습니다. 또 그 자리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자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는데요. 당시로서는 어떤 모임에 다수의 여인들이 남자들과 함께 동등하게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은 정말 굉장한 일일 수 밖에 없습니다.
성령충만을 입기 전이었지만, 이미 초대교회의 모습은 이렇게 변화되어 있었습니다. 그 동안의 알력과 갈등, 개인적인 이익을 넘어서고, 자신의 정치적인 성향을 넘어서고, 불신앙도 넘어섰으며, 심지어는 당시로서는 아무도 넘으려고 하지 않았던 성별의 장벽까지 넘어서서 이제 이들은 말 그대로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는’ 하나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다른 사람들, 어찌보면 전혀 하나가 될 수 없어 보이는 이런 사람들이 그들을 묶어 줄 수 있는 예수님도 계시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었을까요? 무엇이 이들을 성령충만도 받기 전에 이렇게 변화시킬 수 있었을까요? 수많은 교회들이 하나가 되려고 정말 애를 많이 쓰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되는 일은 정말 정말 어려운 것 같습니다. 물론 노력이 부족해서 그럴 때가 많지만 사실 진짜 아주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교회를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 교회는 서로 손을 맞잡고 서로를 바라보게 합니다. 분명히 이런 노력들이 필요하겠지만 그렇게 한다고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두 손을 맞잡을 필요가 없습니다. 한 손만 잡으면 됩니다. 그렇게 한 손만 잡고 그 다음에는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바라보라고 하신 그것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돌아가 보면 그 때 그 다락방에 모였던 사람들은 서로가 하나가 되겠다고 힘을 쓴 것도 아니고 무슨 특별한 프로그램을 진행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미 그동안 넘지 못했던 벽을 넘어서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이들에게 예전에는 없었던 공통의 소망과 영적인 관심사가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바로 성령충만을 받는 것,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서 온 세상을 위한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교회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은 하나가 되고자 하는 노력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노력도 필요하지만, 그 일을 위해서 진짜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성령충만함을 주시겠다는 약속에 대한 불타는 소망과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맡겨주신 소명에 대한 일치된 관심입니다. 우리가 그 약속과 그 소명에 사로잡히게 될 때, 우리는 하나가 되지 말라고 해도 저절로 하나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도 목적의식이 없으면 확신을 가지고 힘차게, 그리고 기쁘게 살아가지 못합니다. 언제나 불안하고 또 허전하기 마련입니다. 또 한 가지에 집중된 집중력 있는 삶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무질서하고 어수선한 삶을 살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좋아보이는 교회라도 그 교회에 방향이 없고 목적이 없으면 그 교회는, 그리고 그 교회 성도들은 신앙의 참된 기쁨과 능력을 알 수가 없고 결국 신앙은 흐지부지해 지며,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작은 갈등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에 소망을 두어야 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에 자기 자신을 맞추어 가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와 성도들은 하나가 되어서 능력있고 집중력있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믿음의 능력을 알며 보람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소명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충만을 덧입을 때 비로소 이루어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기도에 전념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광현교회를 사랑하십니까? 이 교회를 정말 아끼십니까? 그래서 우리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본연의 소명에 충실한 그런 교회가 되는 것을 보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충만함을 주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는 일에 한 마음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마음 속에는 성령충만하게 되었을 때에 우리를 통해 이루어질 일들, 많은 사람들이 천국의 그물에 건져 올려지는 광경을 그리면서 말입니다. 이런 기도가 회복될 때, 우리 교회는 참으로 하나된 교회가 될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과 우리 자신을 위한 최고의 교회가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기도드리실 때마다, 잊지 마시고 항상 성령충만의 약속을 붙들고 그 약속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다 예수님의 증인의 삶을 살아가게 해 달라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기도를 통해 성령충만해 지며, 모든 벽을 넘어서서 진짜로 하나가 되며, 복음의 증인이 되는 능력과 즐거움을 아는 내가 되고, 또 우리가 되는 것을 꿈꾸면서, 그 그림을 마음에 그리면서 이것을 위해서 꼭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성령충만을 덧입기 위해서, 그래서 복음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드리는 기도에 헌신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통해 우리 광현교회를 하나로 묶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성령충만함의 영광을 보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약속과 소명을 붙들고 허락해 주실 때까지 함께 기도에 헌신함으로써 주님 주시는 가장 좋은 것을 받아누리는 그런 교회의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