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0101to03-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고전2).pdf
본문 : 고린도 전서 1장 1-3절
성도란 같은 것을 다르게 보는 사람이고 그래서 다르게 반응하고 다르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신앙이 우리에게 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별로 큰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사실 우리의 삶이란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일들에 대한 반응으로 이어져 가는 것이니까요. 성도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라고 많이들 이야기 하는데,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보고 다르게 산다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가 성도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다르게 반응하고 다르게 선택하는 사람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성도의 삶 속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한 가지 아주 결정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성도는 세상을 볼 때, 그리고 자신을 볼 때 그 모든 것을 전혀 다르게 보게 하는 하나님이라는 랜즈를 통해서 보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파란색으로 보는 것을 빨간색으로 보기도 하고, 또 빨간색으로 보는 것을 파란색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런 차이 때문에 갈등이 생겨나기도 하지만 이런 차이야 말로 성도로 하여금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차이이기도 합니다.
또 성도는 다른 북소리를 듣고, 그 북소리에 맞추어서 행진하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땅에서 크게 들리는 북소리를 듣고 거기에 발을 맞추려고 안깐힘을 쓸 때, 성도들은 하늘에서 들려오는 북소리를 듣고, 그 북소리에 맞춰 행진합니다. 그 소리가 때로는 미미하고 투박하기 그지 없는 소리라고 하더라도 그 북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소리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행진하는 속도와 박자도 다르고 심지어는 방향도 완전히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북소리를 들을 수 있느냐, 그리고 그 북소리에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점이 그가 성도인가 아닌가를 드러내는 기준이 됩니다. 성도는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에게는 크고 화려한 세상의 북소리 말고도 꼭 따라가야 하고 보조를 맞추어야 할 더 중요한 소리가 있음을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르게 보고 다른 것을 듣기 때문에 성도에게는 색다른 능력이 생기게 됩니다.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그냥 귀에 들리는 대로 듣고 평가하고 반응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그것입니다. 바로 이 능력이 우리를 절망의 순간에 다시 세우고, 고통의 순간에 견디게 하며, 우리를 뒤흔들어 넘어뜨리려는 세상의 진동으로부터 지켜줍니다.
고린도 교회는 겉으로 보기에 아주 엉망진창인 교회였습니다. 그 어떤 교회보다도 많은 은사를 받았고, 정말 훌륭한 목회자들로 부터 오랫동안 양육을 받는 특권을 누렸지만, 그 선한 것들을 다 던져 버리고 가지 말아야 할 길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고린도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도 결코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향한 자신의 사랑과 열심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고린도 교회의 목회자였으며, 그들을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는 영적인 아버지로 남아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의 성도들을 형제로 여겼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과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형제요 자매로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그는 계속해서 그 눈으로만 성도들을 바라 보았습니다. 가족은 어쨋든 가족입니다. 그 관계는 취소되거나 파괴될 수 없습니다. 마음에 안든다고 해서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쫓아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피의 값을 주고 사셔서 하나로 만드신 이유는 교회가 이런 점에서 세상의 어떤 모임과도 다른 모습을 가진 하늘가족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교회가 형제와 자매로 이루어진 새 가족이라는 사실이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했습니다. 비록 고린도 교회가 형편없이 무너지고 망가졌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가족이 된 그들을 포기할 수 없었고, 그들의 형제요 목회자로서 계속해서 가르치고 권면하며 기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2절로 넘어오면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이 말 속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한 마음과 생각을 끝까지 지킬 수 있었던 두번째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인간적인 눈으로 교회를 보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는 있어서 교회는 그 교회의 현재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와 상관없이 언제나 “하나님의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결코 “내 교회”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너희 교회”라고 부르지도 않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교회를 바라보아야 할 가장 올바르고 기본적인 시각입니다. 교회는 누구의 소유입니까?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만드셨고, 또 스스로 죄의 종으로 팔린 것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셨기 때문에, 그렇게 비싼 댓가를 치르고 구속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유일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우리들이 이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잊지 않고 실제의 신앙생활에 적용하면서 살아간다면 교회 안에 생기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생기지도 않고 또 쉽게 해결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흔히들 “성도는 교회에 대해서 주인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만, 사실 이 말은 맞는 말이 아닙니다. 주인의식은 누가 가져야 합니까? 주인만 주인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왜 자꾸 나라에 정치가들로 인해서 문제가 생기나요? 주인이 아닌 사람들이 주인행세를 하기 때문입니다. 머슴과 청지기들이 자신이 주인인 줄 알고 마음대로 하려고 들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교회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도는 교회에 대해서 주인의식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주인의식 대신 지체의식과 종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누구이든 나는 그 교회에 속한 몸 속의 한 지체에 불과합니다. 그 교회를 섬겨야 할 한 사람의 종에 불과합니다. 몸의 지체가, 종이 자꾸 주인이라 생각하고, 주인이 되려고 하면 자신에게도 교회에도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주인이라고 생각하니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 모두가 다 자기 기준을 따라 교회 안에 있게 되고, 그 차이를 극복해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자기 자신을 그리고 교회를 이렇게 생각하면 교회를 바라보는 마음과 생각도 왜곡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아닌 “내 교회”라고 생각할 때, 교회는 내 맘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며 그렇게 되지 않을 때, 그 기준에 맞지 않을 때, 억지로 뜯어 고치려고 하거나 그게 실패하면 교회를 향해서 쉽게 비관하고 포기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를 붙드는 것은 우리가 아닙니다. 교회를 붙드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의 교회이니 그 분이 붙드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럴 능력은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에 하나님만 붙드실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교회를 바라보면서 포기하고 절망할 권리가 전혀 없습니다. 포기와 절망은 주인의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모습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면 우리가 그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회개하고 돌이켜 고치는 일 밖에 없습니다. 끝까지 사랑하며 섬기는 일 밖에 없습니다. 지체이고 종이니까요. 요즘 인터넷을 보면 교회가 죽었다, 끝났다, 교회에 소망이 없다는 비판 섞인 글들이 많이 올라옵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교회에 대해서 충분히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믿는 사람들까지도 너무 쉽게 단정적으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야 이해가 가지만 성도들이 그런 이야기를 쉽게 입에 올리는 것은 그가 아직도 교회를 바라보는 인간적인 시각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교회의 주인이 인간이며, 그 교회를 붙드는 것이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가지고서 죽었느니 살았느니 소망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교회는 주님이 붙드십니다. 단 한 순간도 사람들이 사람들의 힘과 노력으로 교회를 붙들었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그 교회의 지체일 뿐이며, 그 교회를 섬기는 종들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열심히 섬기면 됩니다. 교회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며, 몸에 속한 지체로서 충실히 그 역할을 감당하면 됩니다. 잘못된 것이 있다면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다 하십니다. 교회는 항상 ‘하나님의 교회’이니까요.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자신이 그런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아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를 말해 줍니다. 그는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 지고...” 우리말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거룩하게 하신 일이 과거의 일처럼 되어 있지만, 원문에서는 현재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져 가고...”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고린도 교회는 사실 거룩하고는 담을 쌓은 모습이었습니다. 은혜받고 예수 믿기 전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었고 오히려 그 은혜로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바울은 그래도 고린도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게 되었고, 또 지금도 거룩하며 또 지금도 계속해서 거룩해져 가고 있는 교회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교회를 향한 바울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교회는 거룩합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모습이 아무리 엉망으로 망가져 있다고 해도 교회는 여전히 거룩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리스도께서 그 분의 보혈로 씻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께서 거룩하다 인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리고 성도는 자신을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셨고, 그래서 지금도 거룩해져 가고 있는 중이라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자신의 정체성이요 자신의 자존심으로 여겨야 합니다. 물론 나의 잘못과 실수로, 또 교회 안에 존재하는 죄때문에 그 거룩함이 손상되고 또 희미해 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거룩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의 거룩이 온전치 못하다는데 있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그런 모습 때문에 교회의 거룩함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그 거룩함을 지키고 더 온전케 하려는 노력을 그만두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교회에 대한, 성도로서 자기 자신에 대한 거룩한 기대와 소망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설사 죄 때문에 성도가, 그리고 교회가 거룩함을 거의 다 잃어버렸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좌절하고 거룩함에 대한 소망을 포기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렇다는 판단이 들었다면 다시 거룩한 길로 가야 합니다. 그래서, 거룩함을 회복하고 되찾아야 합니다. 다시 거룩해져 가야만 합니다. 이미 거룩해진 사람들로서 계속해서 거룩해져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눈에 보이는 우리의 모습이 형편없을 때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생각과 판단이 아니라 그 모습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이며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게 하시고, 거룩하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교회를 붙들고 더 거룩하게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일에 있어서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과 생각을 붙들어 매어놓아야 하는 변함없는 사실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눈에 보이는 현실이 큽니까? 아니면 그 현실을 향한 하나님의 판단과 말씀이 큽니까? 둘 중에 어떤 것이 더 영원하고 어떤 것이 더 견고합니까?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아니라 그 현실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과 말씀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받아들이고 반응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보이는 대로의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과 말씀일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사람의 눈으로 교회를 바라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보이는 대로만 보고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교회를 향한 장미빛 꿈을 꾸자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은 현실로 보아야 합니다. 죄는 여전히 죄이고, 부족함은 부족함입니다. 그런 것들은 여전히 부끄러운 우리의 모습이며, 우리는 분명히 그런 것들을 버리고 떠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을 따른 저의 권면은 이제는 그런 것들보다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거룩한 부르심을 더 결정적인 것으로 여기며 우리를 부르신 분을 믿어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걸어보자는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면 나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시 한 번 마음을 단단히 먹고, 하나님께서 여전히 기대를 걸고 계신다면 나도 계속해서 기대를 걸겠다고 나의 눈이 아니라 믿음의 눈을 열어 우리 자신을 보자는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우리의 이름은 성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를 때에 “성도”라는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성도들아!”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대답합니다. “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라고 말입니다. “성도...”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사용하는 우리의 이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것이 우리가 유일하게 대답하며 불러야 할 할 오직 한 분이신 우리 주님의 이름입니다. “성도”라는 우리의 이름은 우리 주님만 아시는 우리의 비밀스러운 이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만 부를 수 있는 우리 주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입니다. 주님과 우리는 서로만 아는 비밀스러운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고 응답하는 그런 관계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러한 관계 안에서 우리를 붙드십니다. 그 분이 우리를 성도로 부르고 우리가 스스로 성도인 것을 잊지 않는 한, 그 분이 우리의 주인이 되시고, 우리가 그 분의 이름을 주님의 이름으로 부르고 따르는 한, 그렇게 서로 이름을 부르고 이름을 부름으로써 응답하는 그 분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한 우리의 성도됨은 목자되신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더 온전해져 갈 것입니다.
때로 우리 눈에 보이는 우리 교회의 모습, 그리고 이 땅의 교회의 모습이 엉망진창으로 보일지라도, 우리 속에 죄와 허물이 많을지라도, 심지어는 세상으로부터도 욕을 먹는 교회가 되어있어 마음이 답답할지라도 우리는 교회에 대한 소망을 버려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분의 소망을 거두시지 않는 한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요즘처럼 교회가 싸잡아서 욕을 먹었을 때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 변명할 수 없는 죄악들로 비난받았을 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들처럼 교회에 대해서 비관적이고 거친 눈을 가지게 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신앙이 있다면 우리는 다른 눈을 뜨고 다른 귀를 열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르게 보고 다르게 들으며 다르게 반응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잘못은, 몸으로 느껴지는 허물은 물론 우리의 모습이고 우리의 책임입니다. 부끄럽고 안타까운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으며,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소망과 기대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짜 붙들고 다시 따라나서야 할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제가 부목사로 교회를 섬길 때는 사람이 교회를 보는 시각과 하나님께서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 사이에 얼마나 심각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몰랐습니다. 사람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교회를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힘드는 일인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제가 담임목회자로 교회를 섬기기 시작하니 그것은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싸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교회를 보려면,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교회와 성도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되어질 성도와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모습을 볼 때, 예측되어지는 미래의 모습보다 하나님의 마음에 그려져 있는 성도들과 교회의 모습을 보고 그것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실제로 이것은 믿음의 싸움이고 또 전쟁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어떤 모습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하는 그런 전쟁입니다. 제가 이 싸움을 하는 중에 하나님께서는 말씀 한 구절을 다시 보게 하셨습니다. 그 구절은 빌립보서 1장 6절입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제가 이 구절을 붙들고 기도하면서 이 구절에 믿음을 더하면서 부터 저는 수세에서 공세로 돌아설 수 있었습니다. 성도나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 그 안에서 착한 일을 이미 시작하셨고 또 이루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고 그 하나님께 소망과 기대를 걸고 목회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이 싸움은 계속될 것 같습니다. 제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목회하는 것을 사탄이 가만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까요. 그러나, 이제는 사탄이 공격해 올 때마다 그 공격을 막아내고 또 다시 반격을 가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았으니 싸움이 계속되더라도 앞으로는 이전처럼 그렇게 뒤로 물러서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셨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그렇게 시작하신 착한 일을 이루실까요? 이것을 진실로 믿으십니까? 이제 이 믿음으로 여러분 자신을 바라보시고 또 다른 성도들과 교회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만들어 가심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고 그 분의 뒤만 따라 가십시다.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가 한 번 맡겨 보십시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을 지키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믿음이 있고, 하나님에 대한 이런 소망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서로에게 소망을 두며 서로를 향해 바울처럼 변함없는 축복의 말을 건넬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라고 말입니다.
성도는 언제나 사면초가입니다. 우리를 무너뜨리려는 사탄이 사방에서 절망의 노래, 포기의 노래를 불러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노래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부족하고 연약해도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의 교회라 부르시고 거룩한 자들이라 부르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불러 주시는 힘나게 하고 신나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며 그 분의 북소리에 맞춰 행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사탄의 사면초가를 뚫고 밝은 빛 가운데로 행진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더 거룩해져 가는 하나님의 교회로 세워져 갈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사도 바울을 따라, 하나님을 따라 서로를 이렇게 불러주고 또 이렇게 서로를 축복하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이미 시작하신 착한 일이 이루어가시는 것을 서로가 서로를 통해서 함께 지켜보는 복된 교회,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