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일0411to16-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요일19).pdf
본 문 : 요한일서 4장 11-16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증거되고 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은 성도들이 서로를 사랑해야하는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자신의 아들을 희생제물로 내어주신 그 사랑덕분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에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크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자녀 삼으셨는데 어찌 피조물인 우리끼리의 작은 허물과 차이 때문에 서로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만으로도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만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유 뿐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를 사랑할 때, 우리 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12절의 설명인데, 우리는 이 구절 속에서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성도들 사이의 사랑을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사랑이 없는 곳에는 거하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시려는 사람들은 분명히 사랑해야 합니다. 적어도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저는 이번에 요한일서를 묵상하면서 정말 많은 찔림과 도전을 받게 됩니다. 그렇지만 또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 기회가 저에게는 성도를 사랑하는 사랑의 절박함과 절실함에 대한 확실한 교훈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사랑하는 일을 피해갈 수 없으니 이제는 정말 사랑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방향으로 가려고 미약하나마 마음을 쏟아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그 분과 친밀하며 그 분과 함께 거하기 위해서는 결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될 때,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풍성히 거하고 그 사랑의 능력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행함과 진실함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결혼하기 전, 자녀를 낳아 길러보기 전에 부모님의 사랑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문득 문득 자기의 모습 위로 겹쳐지는 부모님의 모습을 통해서 비로소 부모님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또한 그렇게 깨달아진 부모님의 사랑은 우리를 든든히 붙들어 주고 뒷받침해 주는 기초가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머리로만 생각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아직 제대로 아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를 견고하게 해주는 그런 사랑도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심겨진 사랑으로 하나님을 흉내내며 사랑하려고 애쓸 때, 그 위에 문득 문득 겹쳐져 다가오는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로 알게 되고 또 그 사랑 안에서 순결한 삶의 능력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일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우리 중 누구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될 때,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고 우리 안에 자라나기 시작한 하나님의 사랑이 더 확실해 지고 온전해 집니다. 성령님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신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며, 나는 그 분의 사랑을 확실히 받고 있다는 확신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주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라면 이기적이 되어도 좋습니다. 이것은 자신을 진실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대로 제대로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보면 12, 13절과 15절이 똑같은 결론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12절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방법에 대해서, 그리고 13절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합니다. 15절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런데, 12절과 13절은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반면에 15절은 우리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전혀 달라보이는 12,13절과 15절은 실은 완전히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서로 사랑하는 일은 결국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는 일과 같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는 어떻게 연결될까요?
우리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 그것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것을 알고 있으며 그것이 틀리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이것이 없어서는 안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고 가장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복음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니까 복음이 감격이 되지 않고, 복음이 우리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 전체가 복음을 언급할 때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이야기할 때마다 빼먹지 않고 이야기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우리의 구원자가 되어주신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 신약성경 전체가 한결같이 이야기 해주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 그래서 그것은 단순히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내가 그 사랑을 받았으며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며 나아가서 그 사랑을 누리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일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일과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는 일은 똑같은 결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일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래서 믿음은 사랑을 통해서 역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믿음을 일깨우고,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이런 믿음일 때, 우리의 사랑이 이런 사랑일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풍성하고 능력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려면 사랑 안에 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우리 속에 거하게 하려면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확실하고 보장된 방법입니다.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통해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안에 온전히 거하는 사랑받는 자녀들로 살아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