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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06.07.새벽예배-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요한이서4)


요이0107to11-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요이0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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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 : 요한이서 1장 07-11절


이단이라는 말은 끝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이단인지 아닌지는 끝까지 가 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이 이단이고, 그래서 그만큼 정통, 그러니까 진짜와 구분이 잘 가지 않는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이단이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도 정통과 구분이 아주 잘 간다면 이단은 사실 커질래야 커질 수가 없고 전혀 위험한 것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단은 아주 정확한 분별력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면 구분해 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굉장히 위험합니다. 이런 분별력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면 사실 정통교단에서 안수를 받고 목회자가 된 사람들까지도 분별력 없이 끌려들어가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냥 생각해 보면 어떻게 목회자가 이단인지도 분별하지 못하고 그럴 수가 있느냐고 생각되지만 충분히 그럴 수가 있습니다. 이단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사실 교리인데, 죄송스럽습니다만 현실적으로 보면 목회자들 중에서도  교리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한 경우가 많고, 그런 경우에는 더 효과적이면 더 은혜로워 보이면 쉽게 이단으로 끌려들어갈 수 있습니다. 명확한 기준이 없을 때는 그저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만 판단하게 마련인데 사실 현상적인 측면에서만 보면 이단이 더 뜨겁고 확실하고 나타나는 증거도 많기 때문입니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의 항변은 여기가 더 은혜롭고, 여기가 더 뜨겁고, 여기가 더 증거도 많이 나타나는데 왜 우리를 이단이라고 하느냐는 것인데 그것은 사실 이단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아니라 무엇을 믿고 있는가 하는 내용으로 분별하는 것을 모르고서 하는 굉장히 무식한 항변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이단들이 우리가 더 뜨겁다, 우리가 더 확실하다, 우리가 더 기쁘다, 우리가 더 헌신적이다라고 말할 때, 정통 쪽에서 그런 주장에 대해서 ‘아니다!’라고 자신있게 대답하지 못하는 것은 참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어찌 가짜가 더 진짜 같은 이런 상황에 대해서 진짜가 할 말이 없을 수가 있습니까? 왜 정통이 이단보다도 열정적이지 못하며, 자기가 믿는 것을 확실이 모르고, 또 더 헌신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확실하게 신뢰하지 못합니까? 아무튼 이것은 우리 정통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확실하게 해결해야할 문제라는 것만큼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요한은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와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보면 기독교는 처음부터 이단에 굉장히 많이 시달려 왔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사탄의 장난이 심했던 것이죠. 요즘 이단은 정말 정말 말도 안되는 저질 이단들이지만 요한이서가 기록되었던 당시에는 이단들이 굉장히 고차원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로 믿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에 대한 주장이 달랐습니다. 우리가 요한일서를 공부할 때 이미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그 당시의 이단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진짜 몸을 가진 진짜 인간으로 오시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이단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땅과 하늘, 몸과 영혼을 완전히 나누고 땅은 악하지만 하늘은 선하고, 몸은 악하지만 영혼은 선하다는 사고방식이 굉장히 유행했습니다. 조금 생각할 줄 안다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이런 생각을 당연하게 여겼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만약 몸은 악하고 영혼만 선하다면 예수님은 절대로 이 세상에 진짜 몸을 가지고 오실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악하다는 이야기가 되니까요.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은 이 세상에 진짜 몸을 입고 오신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게 되었는데, 이게 이런 이분적인 사고방식에 물들어 있던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설득력있는 주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본다면 말도 안되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를 믿는 믿음은 사람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구속의 은혜를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가짜가 짊어진 십자가가 되니까요. 


게다가 이런 생각은 당시에 그렇기 때문에 몸은 전혀 중요하지 않고 영혼만 중요하다, 몸으로 하는 행동은 구원과 전혀 상관없고 영적인 지식만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그래서 성도들을 도덕적으로 전혀 무감각한 사람들로 만들어 놓고 있었습니다. 영혼만 생각하는 종교는 결국에는 사람을 무책임하게 만들고 맙니다. 그런 종교는 믿음은 강조하지만 그 믿음의 열매인 행위와 삶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과 교묘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게 문제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쉽게 가고 싶어하니까요.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거듭나고 구원받은 사람의 몸으로 사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아무래도 무겁습니다. 여전히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던 차에 그저 영혼이나 구원받아라, 그저 믿고 아멘해라 그러면 된다고 말해주는 메세지를 들으면 진위여부를 떠나서 쉽고 가볍다는 이유만으로 그 쪽으로 쏠리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우리에게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고 권면합니다. 삼가라는 말은 주의하라는 말입니다. 이단이 뭐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원래 성경이 말하는 진리와 다르면 사실은 다 이단입니다. 몸을 이야기하지 않고 영혼만 이야기하는 것도 실은 이단입니다. 그것도 우리 영혼을 망치는 적그리스도입니다. 


지나치면 안됩니다. 지나치면 다 망가집니다. 지나친다는 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보다 더 믿는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자기 마음대로 무언가를 빼는 것도 거기 포함됩니다. 둘 다 자신이 넘어가면 안되는 선을 지나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요한은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믿어야 한다는 뜻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계명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유일한 해결책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인간이 되어 오신 하나님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 분의 교훈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분명히 믿는 것이 우선이지만 그 믿음에 걸맞는 삶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교훈과 가르침은 단순히 마음으로 믿는 믿음에 대한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에 따르는 순종도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그를 집에 들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인사는 당시에 교제를 의미했기 때문에 요한이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이지만 우리가 몸이 없고 영혼만 있는 복음, 행위가 없는 믿음만 이야기하는 가르침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을 말하는 것은 모두가 다 우리 영혼을 위험하게 하는 거짓이니 근처에도 가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너무 많습니다. 정말 말도 안되는 이단부터 정통과 거의 구분이 안되는 이단까지 특히 우리가 사는 이 땅 위에는 미혹하는 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스스로 삼가야 합니다. 듣기 좋은 것, 보여주는 것이 많은 것, 그리고 나를 편하게만 해 주는 것에 현혹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항상 우리의 구원은 몸의 구속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몸을 무시하고 그 몸으로 살아가는 삶을 무시하는 복음은 복음일 수가 없습니다. 항상 그리스도의 교훈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분은 단순히 옳은 것을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몸으로 가르침대로 사셨습니다. 그 모든 것이 우리 주님의 교훈입니다. 말씀 뿐만이 아니라 삶도 우리 주님의 교훈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이 교훈의 터 위에 세울 때, 우리는 아들과 아버지를 모두 모시는 신앙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언제나 몸과 마음, 몸과 영혼의 균형을 잘 이루심으로써 하나님 안에 안전히 거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