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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3.06.07. 금요기도회 - 너희 앞에 그를 증언하였느니라(사도행전 16)


행0222to35 - 너희 앞에 그를 증언하였느니라(사도행전1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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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2장 22-36절


성령충만은 교회의 역사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더불어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사건이었습니다. 성령충만함이 없었다면 교회는 아마 시작도 해 보지 못하고 슬며시 자취를 감추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많은 학자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성령충만함이 이 세상에 교회를 탄생하게 한 원동력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만약 성령충만함이 없었다면 교회는 이 세상을 복음을 전하는 소명을 행할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성령충만함은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담대함과 권능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소심하고 주눅들어 있었던 그들을 담대한 하나님의 군대로 변화시켜서 이들이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가는 곳마다 복음을 외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둘째로 성령님께서 성도들에게 충만하게 부어진 일은 그 사건 자체가 복음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처음 선포되는 복음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역할을 했습니다. 성령님께서 교회 위에 충만하게 임하시자 성도들이 세계 각지의 언어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큰 일을 선포하게 되었고, 이 일은 그 당시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모여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특히 그 일을 하나님께서 요엘선지자에게 주셨던 마지막 날에 대한 예언의 성취로 설명했던 베드로의 설명은 그 사람들을 그 자리에 완전히 멈춰서서 들려오는 복음에 귀를 기울일 일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안팎으로 도우시는 성령님의 일하심에 힘 입어서 22절부터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베드로는 청중을 향해서 이미 당신들에게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야만 하는 증거가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행하신 수많은 이적들과 권세있는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 아니시라면 행하실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일들 자체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참되심을 증거하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그것을 무시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물론 그것은 악한 지도자들의 선동을 받아서 분위기에 휩쓸려 저지른 일이었지만,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 분명한 예수님을 모함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죄를 저지른 것만큼은 확실했습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아주 정확하게 지적하는 일로부터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복음을 전해지는 출발점이 어디인지를 보게 됩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출발점은 인간의 죄악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죄를 해결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 복음은 복음다운 복음이 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듣고 철저히 깨달은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아직 복음을 제대로 듣고 믿는 기회를 가져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신앙의 초기에 자신이 어떤 의미에서 죄인이며 그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확실한 메세지를 반드시 들어야 하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반드시 통과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수십년씩 교회에 다니고 또 심지어는 교회에서 중요한 직분을 맡고 있으면서도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한 성도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바로 이 처음 과정을 확실히 통과하지 못한 채로 신앙생활을 해 왔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확신, 그리고 죄를 용서받았다는 확신이 없으면 그는 구원의 확신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에는 하나님 편에서 보아야만 보이는 차원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은 인간이 저지른 죄악이기 이전에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에 약속에 의한 것이었고, 그것의 성취였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복음 앞에서 하나님께 정말 무한한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까지도 죄없이 죽게 만드는 것이 인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인간들까지 구원하시려고 아들을 내어주신 것을 바로 그 십자가에서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볼 때 마다 우리는 거기서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얼굴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었지만 바로 그 하나님 덕분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비록 지금도 죄에서 완전히 떠나지 못하고 있지만 여전히 죄를 용서받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십가가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우리를 용서하시고 다시 자녀 삼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영원전부터 계획하신 계획임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십자가를 볼 때, 우리가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이유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인간이 저지른 악행 중에서 최고의 악행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 악행까지도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과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악한 일들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안심하고 평강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그 악한 십자가를 구원의 사건으로 바꾸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시고 우리가 바로 그 분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실로 십자가를 믿는 믿음은 우리에게서 근심을 가져가고 두려움을 가져갑니다. 거기서 최고의 죄악마저 최선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그 분을 붙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십자가가 죽음으로 끝났다다면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가 죄인에게 소망이 되는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뒤에는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부활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화목제를 기쁘게 받으셨다는 증거이고 또 우리 부활의 확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부활 또한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다윗이 예수님의 부활을 이미 예언했고, 그 예언에 따라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당시 제자들과 성도들을 제외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경험되고 증명된 어떤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성도들에게만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 이 이야기만 가지고는 유대인들에게 부활을 증명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하려면 무언가 확실한 증거가 더 필요했는데, 그 증거가 놀랍게도 성령님의 충만한 임재였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지금 보고 듣고 있는 것보다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그 때 유대인들이 보고 들었던 일들은 도무지 우연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갈릴리의 촌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그것도 세계 각지의 언어로 이야기 했고, 그 이야기들은 거부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그들에게 들려졌으니까요. 그래서 그것은 베드로가 이야기한대로 요엘을 통해서 약속하신 성령님이 임하신 증거로 받아들여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유대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들어서 잘 알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올라가시면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신 예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제자들과 성도들이 성령님의 임재 가운데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무엇까지 분명해 지는 것입니까? 자신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가셨다는 것도 분명해 지고, 그 성령님은 바로 그렇게 높여지신 예수님께서 보내신 것이라는 것도 분명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까지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령충만해지자 마자 이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의 충만하신 임재야 말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높여지셨다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령충만함을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의 증거로 유대인들에게 확실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함을 덧입었을 때, 제자들과 성도들이 갑자기 담대해 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성령님께서 그들의 속 사람을 그렇게 새롭게 만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는 현실과 두려움에 짓눌리고 상처입은 그들의 영혼을 강건하게 해 주셨으니까요. 그런데, 성령충만함은 예수를 믿거나 믿지 않거나 간에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직간접적으로 함께 경험되는 너무도 확실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만큼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증거하는 명확한 증거가 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더욱 담대해 질 수 있었습니다. 이미 성령님의 임재를 통해 내면적으로도 변화가 되고, 그 손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증거까지 쥐어져 있으니 그들이 당당하지 않을래야 당당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확신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에만 머문 것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또 다시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 이것은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가 유대인들이 믿고 있었던 것처럼 다윗 자신에 대한 이야기일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셨으니” 베드로는 이 말씀은 다윗에 대한 것이 아니며, 주께서 내 주께, 그러니까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께 하신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께 내가 너의 원수, 그러니까 사탄을 완전히 이길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공식적인 하늘나라의 상속자로, 하나님과 함께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으로 인정하신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성령님의 충만한 임재라는 사건을 예수님을 성부 하나님의 명실상부한 후계자요 또 지금도 하나님과 함께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으로 증명해 보이는데 까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너무나 당연하고 확신있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이 구절에서 주라는 말은 그 당시 시저와 같은 왕들에게만 사용했던 단어입니다. 그러니 한 시대의 한 나라의 주는 한 사람 밖에 존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성령충만함을 근거로 해서 예수님이 죄를 해결해 주시는 그리스도이실 뿐 아니라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하나님과 더불어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이시라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해 보였고, 그 사실을 담대하게 선포했던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성령충만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확신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첫번째 확신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신의 죄의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하셨다는 확신입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한 사람은 죄를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고 그래서 자신이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죄 용서와 구원의 확신 뿐만 아니라 그 예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자기 자신과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는 왕이시라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도 주십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한 사람은 예수님을 내 영혼을 책임지시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 나의 현실도 책임지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시고, 나 개인 뿐만 아니라 온 우주의 역사까지도 다스리시고 섭리하시는 분이시라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베드로가 첫번째 복음설교를 통해서 가장 확신있게 선포하며 증명하고 있는 것은 바로 오직 예수님만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영원의 구주일 뿐만 아니라 현실을 다스리시는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당시 상황으로 베드로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다! 예수님이 왕이다!”라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이 베드로가 성령충만함을 입은 후에 얻게 되었던 가장 기쁜 확신이었고,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만한 발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 땅에서 불완전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한, 이러한 흔들림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흔들림이 너무 자주, 그리고 심하게 찾아온다면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묶어 놓아야 할 것에 묶어 놓지 않았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지탱해줄만한 것이 못되는 것에 믿음을 묶어놓으니 그렇게 쉽게 흔들리는 것이죠.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자신이 왕이라고 여기는 것에 자신의 삶을 묶어 놓고 살아갑니다. 그렇게 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세상을 다스린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야 말로 진짜 왕이시라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야 말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실세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이 세상 그 어떤 것, 그 누구를 왕으로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담대함은 바로 여기서 생겨난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자신과 온 세상의 왕으로 받아들이자 그는 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만세반석을 자기 삶의 기초와 주인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죄인이 죄 용서를 받고, 예수님을 온 세상의 왕으로 확신하는 믿음 가운데서 담대하고 흔들림 없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복음이 복음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영혼을 구원하신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그 분이 현실적으로도 흔들림이 없는 사람들로 살게 해 주시는 우리의 왕이시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성령님께서는 이 복음을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되게 해 줍니다. 성령님께서는 복음을 통해 우리를 가망 없는 죄인의 자리에서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로, 그리고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살던 우리를 영원한 왕이신 예수님을 믿고 섬기는 든든한 자리로 옮겨 주십니다.  


성령님의 충만하심 가운데서 복음을 들은 사람은 죄용서와 구원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현실 속에서도 온 세상의 영원하신 왕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두려움과 불안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고 산다는 것, 성령님의 은혜 가운데 산다는 것은 이렇게 대단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러한 복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복을 향해 점점 더 가까이 가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항상 성령충만함 가운데서 예수님의 빈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하신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우리의 삶과 온 우주의 왕으로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시기 바랍니다. 우리 눈에 두 분이 밝히 보일수록 우리가 전하는 복음도 능력이 있어질 것이고, 우리의 삶과 영혼 또한 더 안전해 질 것입니다. 항상 성령님 안에서 십자가를 바라보심으로써 이 놀라운 복을 더욱 더 온전하게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