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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3.05.24.금요기도회 -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2(사도행전 14)

행0204to21 -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2(사도행전1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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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2장 14-21절


사람들은 자신이나 혹은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서 대개는 ‘현재의 상태가 정상적인 상태다’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욕심도 당연한 것이고, 불만도 당연한 것이고,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받으면 살아가는 것도 당연한 것이며, 요즘에는 완전히 비뚤어지고 어긋나가고 있는 성적인 욕망까지도 자연스롭고 정상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세상이 망가지고, 자신이 망가지는 것을 보면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이 어딘가 잘못되어 있는 존재이며, 그래서 고쳐지고 바로잡아져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그 죄로 인해서 생각하고 느끼고 욕망하는 모든 것이 심각하게 일그러져 있으며, 인간이 겪는 모든 문제들은 바로 여기서부터 생겨난다고 진단합니다. 인간에 대한 두 가지 설명 중에서 무엇을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것은 결국 무엇을 믿을 것인가 하는 믿음의 문제이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인간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보다는 성경의 진단이 더 정확하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자연상태의 인간이 정상이고 그래서 생각하고 느끼고 욕망하는 것이 모두 다 선하고 정상적이라면 그런 사람들이 모여사는 이 세상이 이렇게 거칠고 불안하며 살기힘든 곳이 될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스스로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은 정상이 아닙니다. 결코 그렇게 바람직한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들에게는 고쳐져야 하고 바로 잡아져야 할 곳이 굉장히 많습니다. 이것이 성경과 세상의 현실이 함께 보여주는 우리들의 현주소입니다. 만약 이런 진단과 판단이 그저 진단과 판단에서 머물고 이것을 해결할 방법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이런 이야기를 듣고 받아들이는 일은 그저 불쾌한 일이 될 것이고 또 받아들인다고 해도 별 유익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우리들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고 또 우리에게 이것을 해결할 방법이 주어진다면 오히려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또 인정하는 것은 우리에게 ‘복음’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진단과 평가는 우리에게 더 나은 존재가 되어서 더 멋지고 제대로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우리가 그 길을 발견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우리가 원래 지음받은 것과는 다른 비정상적인 상태에 있음을 알려주는 것은 우리가 지금 우리의 상태보다도 훨씬 더 훌륭한 모습으로 회복되어야 하며, 그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절망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이 아니라 가장 소망넘치는 노래를 들려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에 들어온 죄가 인간에게서 빼앗아간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 그러니까 ‘하나님의 함께하심’입니다. 사실 인간이 경험하고 있는 문제들과 부족함은 모두가 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들입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안에서 하나님께의지해서 살아갈 때만 가장 아름다운 상태에서 온전하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졌습니다. 그런데, 죄는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러니, 그 이후의 인간의 삶은 점점 더 악화될 수 밖에 없게 되었고, 인간의 성품이나 마음도 점점 더 망가져 갈 수 밖에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며 살 수 있게 되었는데도 이상하게도 점점 더 큰 두려움과 근심, 그리고 허무함과 무의미함 속에서 살아가게 되고 성품은 왜 점점 더 거칠어져 가는가 하는 문제 바로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라는 하나의 답으로 대답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런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답을 얻은 셈입니다. 하나님을 다시 돌아오시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동안 풀 수 없었던 문제들이 풀리고 답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으로 되돌아오시면 일어나는 가장 놀라운 사건은 그 이전에는 그 무엇으로도 바꾸거나 새롭게 할 수 없었던 사람이 변하고 새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변하고 새롭게 되니 그것이 답이 됩니다. 모든 문제가 사람에게 있기 때문에 사람이 새롭게 회복되면 답은 거기서 저절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를 통해서 그런 모습을 봅니다. 베드로는 그야말로 답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좌충우돌하며 감정에 치우쳐 있었고, 책임지지 못할 말들을 함부로 했고, 그러면서도 가장 비겁한 배신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하나님이 돌아오시자, 그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 지자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대로의 베드로의 모습이 되었으며,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진짜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감정적으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주 차분하게 상황에 대처합니다. 게다가 이전에는 계집 종 하나 무서워서 세 번이나 거짓말과 저주를 섞어가면서 예수님을 부인하였지만 이제는 수 천명의 군중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없던 지혜와 여유, 그리고 담대함이 생겨난 것입니다. 


물론 그가 이렇게 군중들 앞에 서고 또 그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마 그의 머리 속에는 예전의 실패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눅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배신한 이 입으로 예수님을 전할 수 있을까, 그래도 될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그를 일어서게 하셨고, 또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스스로도 답을 가지지 못했던 인생이 이제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 밖에 없는 답을 들려주는 인생으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님께서는 과거의 우리가 어떠했든지 그것을 문제삼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과거에 아무리 답이 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개의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우리 속사람을 바꾸시고 고치셔서 스스로 답을 발견하게 하시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답을 들려주는 사람이 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저의 과거를 생각해 보면, 제가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기적 중의 입니다. 지금도 완전하지는 않지만, 저의 과거는 아마도 모든 심리적인 문제의 덩어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실패와 좌절이 있었고 상처와 아픔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스스로를 학대한 것은 또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런 저에게 답은 없었습니다. 문제의 근원이 무엇인지도 몰랐으니 답을 알았을리가 없었지요. 그러면서도 아무 근거도 없이 교만하기까지 했으니 저는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다행인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제가 하나님을 계속해서 붙들게 하셨고 결국은 저를 고쳐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이렇게 세우셔서 여러분에게 제가 찾은 답을 이야기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답이 되어 주셨기 때문에 저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답을 들려줄 수 있는 인생을 살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서 지금 그들의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의 설명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사람들은 성도들이 싸구려 술에 취해서 술주정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지금 그들의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술주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약의 선지자인 요엘을 통해 약속해 주셨던 것이 이루어지는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베드로가 그들의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이런 설명을 하지 못했다면 처음 성도들은 꼼짝 없이 아침부터 술에 취해서 주정이나 하는 천하에 쓸모 없는 사람들로 취급당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들이 경험하고 있는 것이 예수님의 약속의 성취일 뿐 아니라 구약시대부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셨던 그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래서 확신가운데 모두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사람의 마음과 성품과 태도를 바꾸십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눈을 바꿔 놓으십니다. 그리고 그 달라진 눈으로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며 바로 그것을 답으로 삼게 하십니다. 우리가 살다가 보면 이런 저런 이해하기 힘들고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일들을 만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그런 일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또 이해하고 계십니까? 그 모든 일들을 어떻게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고 계십니까? 우리가 성령충만하게 되면 이전에 없던 능력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바로 현실에 대한 해석능력입니다. 이전에는 힘들고 당황스러운 일을 만나면, 그 일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좌절하거나 화를 내거나 아니면 그저 체념하기 일수였습니다. 그런데 성령충만해지면 그 이전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일들이 해석되기 시작하고 또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건을 만나고 또 어떤 경험을 하게 되면 그 상황에 맞는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기 시작하고 그 말씀이 틀이 되어서 그런 일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합니다. 무슨 뜻인지가 명확해 집니다. 


당장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전에는 전혀 해석이 되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던 과거의 일들이 가지는 의미까지도 이해가 되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불평거리와 불만거리였으며 나를 화나게 하고 아프게 하기만 했던 바로 그 일들, 계속해서 발목을 붙들고 괴롭혔던 일들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전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게 되고, 때로는 이전과는 완전히 반대가 되는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고통스럽고 슬펐던 과거나 병약했던 경험까지도 감사할 조건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충만한 사람들이 성령님 안에서 얻게 되는 능력이고 또 복입니다. 그들은 그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명확하게 보면서 확신있는 삶을 살게 되고 또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다른 이들을 믿음의 길로 이끌고 소망의 길로 이끄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계속해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여러분, 성도들을 비난했던 사람들과 베드로가 똑같은 일을 얼마나 다르게 보고 있는가 한 번 보십시오. 성령충만의 사건을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그들이 술에 취해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똑같은 일을 예언의 성취일 뿐만 아니라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일의 아주 중요한 시작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큰 소리로 외치고 있습니다. 성령충만한 모습을 보고 술주정을 하고 있다고 보는 해석은 아무리 들어도 아무런 유익이 없는 이야기 입니다. 그러나, 성령충만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이며 종말의 시작이라고 확신하는 해석은 그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알게 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성령충만한 사람이 하는 이야기와 그렇지 않은 사람이 하는 이야기의 차이점입니다. 성령충만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른 이들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하지만 성령충만한 사람의 이야기는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충만해서 우리 삶의 사건들과 세상의 일들을 보고 해석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유익한 역할을 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베드로는 자신들의 성령충만함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며, 나중에는 하나님의 큰 일을 듣고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을 알려주는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요엘 선지자의 입을 빌어 이렇게 선포합니다.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성령충만하기 이전에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라는 틀 속에 갇혀서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양 그렇게 살아갑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성령충만해 지면 완전히 달라집니다. 성령충만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꾸지 못하는 꿈을 꾸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 마음과 생각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곳에 두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곳은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하늘나라를 꿈꿉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 되고, 하늘을 닮은 커다란 사람이 됩니다. 스스로 만들어낸 좁은 생각과 꿈을 떠나서 하늘처럼 자유롭고 하늘처럼 풍성한 사람이 되고,다른 사람들도 같은 꿈을 꾸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귀에 들려오는 노래에 맞추어서만 춤을 추게 되어 있습니다. 땅에서 들려오는 노래만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땅의 춤만 출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들려오는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하늘의 춤을 출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역할은 땅의 노래만 듣고 살았던 우리에게 하늘에서 들려오는 노래를 들을 수 있게 해 주고, 그 노래에 맞춰 춤을 추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령충만하기 전에 땅의 노래만 듣고 그 노래에 맞는 춤 밖에 추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답이 없었고, 그 다른 사람에게도 답이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령충만해지고 그의 귀에 하늘의 노래가 들려오기 시작했을 때 그의 춤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기 귀에 들려오는 하늘의 노래를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그렇게 변한 베드로의 춤을 따라 땅의 춤을 버리고 하늘의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충만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그리고 이 세상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주신 복입니다. 마지막 복이라는 것은 그것이 최고의 복이고 가장 중요한 복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성령충만을 마지막 복으로 주신 이유는 성령충만함만이 우리를 위한 최고의 답, 그리고 충분한 답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복을 주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우선 성령님은 우리의 속사람을 고치십니다. 어그러지고 비뚤어진 우리 속사람, 그런 줄 알면서도 손도 못대고 있었던 속사람을 고치십니다. 그래서 정말로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원래 사람에게 허락된 삶이 어떤 것인지를 맛보려면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또 성령님은 우리의 우리의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게 합니다. 그 눈이 온전해지고 정확하게 만들어 줍니다. 사람들의 상식이나 추측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모든 것을 보고 해석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우리가 답을 찾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답이 없는 인생들을 위한 답이 되게 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꼭 성령충만 하여서 속사람이 새로워지고 온전해지는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꼭 성령충만하여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나와 세상에 대한 답을 얻으시고 다른 이들에게도 그 답을 들려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따라 부르는 노래소리가 커져갈 때, 이 세상에도 우리와 함께 노래부르며 우리와 똑같은 춤을 추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될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노래부르며 구원의 춤을 추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답을 주시고 다시 우리가 세상을 위한 답이 되게 하시는 은혜를 누리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