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0201to13 -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3(사도행전12).pdf
본문 : 사도행전 2장 1-13절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진실로 성령충만하기를 원하십니까? 이것을 진정으로 소원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충만을 주실 것을 기대하며 기다리고 계십니까? 제가 이것을 거듭해서 묻는 이유는 우리가 성령충만함을 덧입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성령충만함을 향한 여러분의 마음을 더 크고 간절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기도하시며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기대하면서 기도한 성도들,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과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지 10일이 되는 날, 성령님은 급하게 그리고 강하게 임하셨습니다. 이 순간은 역사상 어쩌면 가장 결정적인 순간일지도 모릅니다. 그 오랜 세월을 기다리신 하나님의 소원과 예수님께서 주신 가장 중요한 약속이 동시에 이루어진 순간이며, 드디어 하나님의 영을 지닌 하나님의 새 백성이 창조되는 영광스러운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예루살렘에 모여 이 약속을 믿고 기도했던 사람들 중에서 이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각자의 머리 위에 임하셨고, 모든 성도들은 그 성령님의 넘치도록 채워주심을 경험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를 향한 제 소원이기도 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 모두가 다 성령충만의 은혜를 받기를 소원합니다. 가능할까요? 불가능할까요? 가능합니다.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렇게 하시고 않하시고는 하나님께 달려있겠지만 이것은 분명히 가능한 일이고 그래서 저는 이것을 소원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계속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런 소원으로 하나가 된다면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3절과 4절에서 처음 임했던 성령충만의 역사에 대해서 설명한 다음, 사도행전은 5절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 때에...” 언제입니까? 오순절입니까? 아닙니다. 처음 성도들이 성령충만을 덧입었을 그 때를 말합니다.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 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오순절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었던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유대교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드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그 때 예루살렘은 그렇게 모여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도시의 이름을 사도행전에서 이미 들었습니다. 바로 성령충만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지정해 주신 도시가 예루살렘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때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첫번째 가장 중요한 조건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왜 그 아픔이 있는 도시, 가장 처절한 실패를 경험한 도시, 가장 큰 슬픔을 당했던 도시를 떠나지 말라고 하시는지 몰랐습니다. 그 구절을 읽는 우리도 그것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성령충만의 약속이 이루어지자 제자들은, 그리고 이 이야기를 전해듣는 우리들도 그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제자들과 성도들이 모였던 곳에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그 때 성령님은 아주 강한 바람소리로 임하셨습니다.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아주 멀리까지 들렸고, 그래서 예루살렘에 모였던 사람들은 이 소리가 도대체 무슨 소린가 해서 소리를 좇아 모여들었습니다. 나중에 보겠지만 그 때 베드로가 전하는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이 3,000명이나 되었던 것으로 보아서 그 소리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컸을 것이고 그래서 꽤 먼 곳까지 퍼져 갔던 곳이 분명합니다.
처음 성도들에게 임하셨던 성령님은 그 사람들로 하여금 ‘말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요즘 말하는 ‘방언’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사용한 말은 그 당시 어떤 특정한 지역에서 사용되고 있었던 그 지역의 언어였습니다. 그래서 그곳으로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아주 크게 놀랐습니다. 그들이 한 눈에 보기에도 거기 모여 ‘말하는’ 사람들은 갈릴리 촌사람들이 분명했는데, 다 다른 지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거기서 자신들이 사용하는 말로 똑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각자가 듣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평범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한 이야기를 말입니다.
역사의 테잎을 아주 오래전으로 되감아 보면 처음 인류의 역사 속에서는 이 날 이 곳에서 일어났던 일과 정반대의 사건이 하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하늘까지 높이기 위해서 교만의 탑인 바벨탑을 쌓아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그런 죄악을 징벌하고 또 더 심한 범죄를 막기 위해서 그 때까지만 해도 하나였던 언어를 아주 여럿으로 쪼개셨습니다. 더 이상 의사소통을 할 수 없게 된 그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여기 저기 온 세상에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때 이후로 세상은 말을 매개로 해서 하나가 된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인류는 그렇게 달라진 언어로 서로 서로 자신에 관한 이야기만 하게 되었고 그래서 점점 더 관계의 골은 깊어져만 갔습니다. 말을 하면 할수록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더 심각하게 멀이지고 갈라지는 그런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때로 말이 일치하지 않으면, 더 이상 서로 말을 섞을 수 없게 되면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해 오순절의 예루살렘에서는 120명의 사람들이 다 다른 지역의 언어로 이야기를 했지만 놀랍게도 그것을 듣는 모든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하나의 이야기로 들었습니다. 이미 다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언어로 모두가 다 알아들을 수 있게 만드는 일은 불가능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령충만한 사람들의 입술에 각기 다른 언어를 집어넣어 주셨고, 그렇게 모두가 다 다른 언어를 통해 하나의 메세지를 듣게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큰 일’,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습니다. 바로 그렇게 전해진 하늘의 언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바벨탑 사건의 저주가 풀어지게 되었고 다시 사람들은 하나의 가장 위대한 이야기인 복음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죄로 인해서 갈래 갈래 갈라진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로는 아무래도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똑같은 한국말을 쓰더라도 갈등과 갈라짐은 더 심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상대방에게 아픔을 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쓰는 말이 죄로 인해 갈라진 우리의 마음에서 나오는 우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친절한 말을 하는 것도, 또 다 이해하고 용납하는 듯한 말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우리가 주님께서 주시는 불의 혀처럼 갈라져 우리 각자에게 임하시는 ‘새 혀’를 선물받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새 혀로 우리의 이야기가 아닌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일’에 대한 이야기를 말입니다.
우리가 새 혀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전할 때, 이 세상도 우리를 통해 하나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 안에서 하나로 회복되어져 가지만, 그것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문제는 거의가 다 말이 만들어 내는 문제입니다. 이 사람은 이 이야기를 하고, 저 사람은 저 이야기를 합니다. 내 이야기만 하고 또 남의 이야기만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저마다 달리 생각하고 달리 이해합니다. 이렇게 새롭게되지 못한 혀로 새롭게 되지 못한 이야기를 하니 그것이 교회를 나누고 하나가 되지 못하게 하며 상처와 아픔이 있는 곳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방법은 새 혀를 받고 새 이야기를 하는 것 하나 밖에 없습니다. 오늘날은 세상도 교회도 서로 다른 말로, 갈래 갈래 갈라져 버린 바벨평야를 닮아 있습니다. 이런 세상과 교회는 다시 이런 상처를 싸매고 하나로 이어줄 새 혀를 지닌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충만함을 덧입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새롭게 된 우리의 혀, 복음으로 뜨겁게 된 혀로 우리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을 말해야 합니다. 복음과 그 복음이 우리 안에 일으킨 놀라운 기적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하나가 될 수 있고, 또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전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해 낼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함을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나에게도 임하게 하셔서 나의 혀를 거듭나게 하시고 내 혀를 통해 상처가 치유되고 갈라진 것이 하나되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혀는 교회와 세상을 화목케 하는 새 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혀가 이런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혀로 변화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순절 예루살렘에 모였던 사람들은 정말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세계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을만큼 넓은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성령충만한 성도들에게서 똑같은 이야기를 듣는 일이 그들에게는 더욱 더 놀랍고 당황스러운 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입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회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듣는도다” (키노트 화면을 띄운다) 이 구절들에서 언급된 지역을 그림으로 표시하면 이렇습니다. (클릭) 여기가 바로 예루살렘이구요. 이 지도에서 네모 상자 안의 빨간 색으로 표시된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그 때 오순절의 예루살렘, 그리고 처음 성도들의 주변에 모두 모여있었고 그들이 다 하나님께 주신 새 언어, 그들을 하나로 만들 수 있는 복음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듯이 성령충만에 대한 예수님의 두 번째 약속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이 약속은 물론 나중에 아주 아주 나중에 아직은 등장하지도 않은 바울이 로마에 갈 때, 그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미 사도행전 2장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세상을 향해 가는 방식이 아니라 세상이 제자들을 향해 오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충만을 기다리라고 하셨던 진짜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오순절에 갈릴리 사람들인 성도들이 성령충만하게 될 때, 거기서 일어나게될 일들을 내다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성령충만의 은혜가 일으키는 정말 놀라운 기적입니다. 하나님은 로마가 아니라 예루살렘이 온 세상의 중심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헬라의 능력있고 똑똑하고 유명한 사람들이 아니라 갈릴리의 촌 사람들이 온 세상 사람들의 주역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을 보게 됩니다. 또 세상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각도 배우게 됩니다. 사람들에게는 중심만 중심입니다. 변두리는 결코 중심이 될 수 없습니다. 주연만 주연입니다. 조연은 결코 주연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미 중심이 된 중심에만 관심을 갖고 이미 주연이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만들어진 중심을 찾고 주연을 찾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어디라도 중심을 만드시고 그 누구라도 주연을 만드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예루살렘을 세계 역사의 중심이 되게 하시고, 거기 모였던 갈릴리 촌 사람들을 세계 역사의 주역이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온 세상을 예루살렘으로 모으시고 그렇게 모인 온 세상이 갈릴리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게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물론 어디를 그렇게 하시고, 누구를 그렇게 하실지는 하나님만 아시겠지만 그래서 그 어디도, 그 누구도 중심이 되고 주역이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것. 이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처음 성도들이 성령충만을 덧입게 되었을 때,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세계의 중심이 되었고, 거기 모였던 갈릴리의 촌사람들은 그 역사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역사상 그 누구도 한 적도 할 수도 없었던 일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이 훌륭한 곳이어서입니까? 갈릴리 사람들이 특출나서였습니까?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성령충만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즘 하나님 앞에서 저 자신에 대해서 많은 것을 회개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들 중의 하나가 바로 저 자신을 바라보는 저 자신의 시각에 대한 것입니다. 저는 사실 저 자신을 많이 제한해 왔습니다. 이것은 아니고 저것은 안되고 또 저것은 할 수 없고, 저것도 내 그릇은 아니고... 그렇지만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를 부르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제가 저를 제한한다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오히려 큰 교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도달하게 된 결론은 저 자신의 크기와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서 아얘 생각을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용하시든 마음껏 사용하시도록 열어놓고 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성령충만함을 허락하신다면 일의 크기야 어떨지 모르지만 분명히 제가 하나님을 위한 의미있는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럴 때, 저는 하나님 보시기에 적어도 저에게 맡겨주신 일에 있어서는 중심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에게는 어디가 중심일까요? 뉴욕? 런던? 파리? 도쿄? 서울? 어느 곳이 세상의 중심일까요? 또 그러면 누가 그 세상을 움직이는 주역이 될까요? 정치가? 유엔 사무총장? 세계적인 기업가? 천재적인 과학자?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세상의 중심은 성령충만한 성도들이 있는 곳이며, 하나님께 있어서 세상의 주역은 바로 성령충만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이게 믿어지십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아주 중요한 메세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충만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있는 곳이 중심이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세상이 그 중심을 향하 모이게 하십니다.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에게 찾아왔던 것처럼, 온 세상이 갈릴리 사람들에게 모여들었던 것처럼, 그렇게 만드셔서라도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이루십니다.
저는 요즘 걱정이 하나 생겼습니다. 제가 요즘 하는 설교들을 이렇게 살펴보니 굉장히 큰 이야기, 오늘 본문의 표현으로 하면 ‘하나님의 큰일’에 대해서만 설교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성경본문이 계속 그런 엄청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설교하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혹시 우리 성도들이 제 설교를 그냥 성도들을 위로하고 힘주기 위해서 들려주는 현실감 없는 좋은 이야기 정도로 들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아닌 걱정이 생겨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런데 저는 결코 그런 의도로 설교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정말 그 모든 것을 믿습니다. 그 믿음으로 설교합니다. 만약 우리가 성경에 나와있는 약속을 붙들고 믿음으로 그것을 위해서 기대하며 기도한다면,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 얼마든지 우리 교회, 우리 성도들의 삶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믿고서 설교하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도 너무 엄청난 이야기라고 해서 현실감 없이 들으시면 절대로 안됩니다. 저는 믿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붙들고 기도하고 기다린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성령충만을 허락하실 것이고, 그러면 우리가, 그리고 우리 교회가 어떤 의미에서건 하나님의 중심이 되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우리의 ‘온 세상’을 위한 중심이 되고, 또 그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온 세상이 우리에게로 모여오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렇게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안 믿을래야 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믿지 못하는 것은 자꾸 우리 자신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일에 있어서 우리 자신의 지금 모습을 볼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만 보면 됩니다.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이루실 하나님만 보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 주실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면서 믿음으로 기도하면 됩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을 위한 중심으로 삼아주실 때까지 한 마음 한 뜻으로 기도하며 기다려서 하나님께서 우리 입술을 새롭게 하실 때, 바벨과 같은 세상, 바벨과 같은 교회를 복음으로 치유하며, 또 하나님께서 새롭게 이루시는 놀라운 일을 목격하는 행복한 예수님의 증인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