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06.10.새벽예배 -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한이서05)

요이0112to13-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이05).pdf


20130610D (#1).mp3.zip




  문 : 요한이서 1장 12-13절


요한의 별명은 사랑의 사도입니다. 그는 그 자신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 중의 하나였고 또 예수님을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의 사랑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에서 머물지 않았습니다. 요한의 사랑은 이단을 제외한 모든 성도들에로 향했고, 그 사랑 속에서 더 풍성해지고 분명해 졌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요한의 서신서들이고 그 중에서도 요한이삼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이서의 마지막 인사말을 읽어보면 요한의 교회를 향한 따뜻한 사랑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요한은 아직도 할 말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써 줄 말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딱 하고 싶었던 이야기만 전하고 요한이서를 마감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해 주어야 할 말은 나중에 만나서 이야기 하겠다고 말합니다. 무슨 거창한 이유 때문에 그렇거나, 남겨진 말들이 꼭 만나서 해 주어야할 정도로 긴히 할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그것이 성도들에게 훨씬 더 큰 기쁨을 줄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에게 더 큰 기쁨을 주기 위해서 할 말이 많이 남아있었지만 편지를 마감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면 기쁨을 주고 싶어집니다. 될 수 있는대로 더 큰 기쁨을 주고 싶어집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만 그 고민을 기쁘게 감당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 편지의 마지막 부분을 기록하고 있는 요한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보이는 는 것 같지 않으십니까? 계속 그랬겠지만 특히 요한이 이 마지막 부분을 기록할 때, 활짝 웃으면서 기록했을 것 같습니다. 많이 보고 싶어하는 사람을 만나고 또 그 사람에게 꼭 들려주어야 할 말들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감, 또 자신이 성도들을 만났을 때, 기뻐할 성도들을 떠 올리면서 이 편지를 마감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니까요. 


작년에 제가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동부교회를 사임하고 우리 교회에 부임하기 전에 있었던 일인데요. 지나가다가 교회 앞에서 친하게 지내던 권사님 한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너무 반가워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끝에 갑자기 잠시 말을 끊더니 “목사님, 저희들은 목회자하고의 신뢰가 깨지면 한 6개월동안은 예배도 못 드린답니다. 굉장히 힘들어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항상 씩씩하고 밝게만 신앙생활을 하고 계셔서 그 분의 그런 말씀에 적잖이 놀랐습니다. 그 이야기는 저에게 성도에게 목회자와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하고 예민한지를 다시 한 번 피부로 와 닿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문득 그 때 그 권사님의 말씀이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은 단순한 편지의 마지막 인사말이 아니라 그 인사말 속에 들어있는 목회자와 성도들의 아름다운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목회자도 성도도 모두가 다 인간인지라 언제나 항상 좋은 관계 속에서 지내기가 쉽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잘못도 있을 수 있고 오해도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것 같습니다. 이전에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해서 여전히 그럴 수 없다고만 생각할 수는 없고, 또 완전히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 수 없다고 해서 처음부터 그런 관계를 만들어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너무 안타깝고 무기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한이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대면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성도들이 그냥 편지로만 교훈을 듣는 것보다 직접 요한을 만나서 그렇게 하는 것을 더 기뻐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은 서로 떠나 있지만 편지를 받는 성도들과 편지를 하는 목회자인 요한 사이에는 그만큼의 신뢰와 친밀함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신뢰와 친밀함은 그저 인간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신뢰와 친밀함이 그저 인간적인 것이었다면 아마도 이런 저런 교훈을 주고 권면을 하는 일은 직접 만나는 것보다 오히려 편지로 하는 것이 훨씬 더 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편하게 할 수 있는 좋은 이야기들은 만나서 하는 것이 더 좋지만 진지한 이야기나 충고는 편지로 하는 것이 훨씬 더 편한 것이 사실이니까요. 더 편하다는 말은 그렇게 하는 것이 기분을 덜 나쁘게 한다는 이야기구요. 그런데, 사도 요한은 자신이 목회자로서 성도들에게 더 해 주어야 할 권면과 충고는 만나서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성도들을 더 기쁘게 할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우리가 함께 묵상했던 요한일서와 요한이서가 반복해서 들려주는 기쁨에 대한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참된 기쁨이란 사랑 안에서 진리를 행할 때 비로소 얻고 또 누릴 수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적으로 볼 때, 기쁨은 그것만 따로 떼어서 얻을 수가 없는 것이고, 진리 안에서 사랑을 따라 행할 때 생겨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편지로 가르치고 교훈하는 것보다 만나서 직접 교훈하는 것이 성도들을 더 기쁘게 할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만남이 기쁨을 생겨나게 하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이지만, 편지로 하는 것보다 직접 만나서 교훈하고 권면하는 것이 더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랑이 그저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요한과 성도들이 함께 믿고 있는 진리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성도와 목회자, 목회자와 성도는 요한과 요한의 편지를 받는 성도들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만나는 것을 껄끄러워하는 사이가 아니라 만남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그런 사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단순히 마음맞는 친구들이 만나서 누리는 기쁨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미 살펴본대로 한 진리를 알고 또 믿기 때문에, 서로가 하나의 진리 위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사랑이어야 하며 그런 사랑이어야 그 어떤 순간에도 서로가 정직하게 다시 진리를 이야기하고 또 권면하고 충고해야 할 때도 얼굴과 얼굴을 보는 것을 더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서로 부족하고 서로 연약하지만 그래도 저는 저와 우리 성도들 사이에 이런 사랑을 닮은 사랑이 점점 더 온전해져 가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의 진리 위에서, 그 진리를 믿고서 살아가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고 또 사랑하는, 그래서 그 어떤 순간에도 만남의 기쁨과 함께 하는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는 그런 목회자와 그런 성도들의 교회로 세워져 가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목회자의 자리에서 여러분은 성도의 자리에서 진리를 향해 열린 마음으로 사랑하기 위해서 힘쓴다면 분명 우리들 사이에는 그런 아름다운 관계가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진리 때문에 서로 갈등하고 힘들어 하는 사이가 아니라 진리가 하나로 묶는,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그런 관계가 돈독해져 갈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은총 안에서 이런 아름답고 견고한 관계의 복을 누리는 그런 교회로 세워져 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