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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수요일 저녁

2013.06.12.수요저녁 -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고린도전서 5)

고전0111to13 -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고전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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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고린도전서 1장 11절 – 13절


백인백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사람이기 때문에 가지게 되는 공통점들이 있지만, 생각이나 취향은 모든 사람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저런 사람도 있게 마련입니다. 똑같은 옷을 보고도 어떤 사람은 정말 멋진 옷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떤 사람은 저걸 누가 입겠느냐고 악평을 하기도 합니다. 같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짜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싱겁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느낄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 다르게 판단한다는 것 자체는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다양성 안에서 이해되고 절충되면 훨씬 더 좋은 것들이 생겨날 수 있기 때문에 더 유익합니다. 문제는 그렇게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그것을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주장할 때 생겨나는 갈등과 간격이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것, 그것이 문제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고린도 교회는 참 복받은 교회였습니다. 당대의 최고의 목회자들인 바울과 아볼로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양육을 받았습니다. 또 그들 중의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수석제자인 베드로로 부터 가르침을 받는 복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게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그것 때문에 분열하고 다투게 되었습니다 이런 행운과 최고의 복이 그들에게는 복이 아니라 독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이 편파적이어서 사람들을 한 쪽으로 기운, 자기 아니면 안되는 줄 아는 외골수로 만들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들의 목회가 비인격적이고 부족해서 그 상처가 그들을 나뉘고 싸우게 만든 것일까요? 물론 목회자들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바가 다르고 자신이 목회할 당시 교회의 상황에 따라서 그 때 강조하지 않으면 안되는 내용들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가르칠 때, 강조하는 바가 조금씩 다를 수 있고 또 실제로는 달라야 하기도 합니다. 성경에도 그런 흔적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로마서와 야고보서입니다. 똑같은 복음을 이야기하는데 로마서는 믿음을, 그리고 야고보서는 행위를 강조합니다. 그것은 그 편지를 받는 교회의 상황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교회들은 이신칭의의 복음을 중심으로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지만, 야고보서를 읽을 교회는 너무 믿음에 걸맞는 행위가 없어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믿음의 열매인 행위를 중심으로 복음을 들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서와 야고보서가 달랐던 만큼은 아니었겠지만, 바울과 아볼로, 그리고 베드로도 분명 서로 차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목회하던 당시의 고린도 교회가 처해 있는 상황과 또 개인적인 강조점 때문에 아주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면 그 가르침이 다르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점을 제외하면 세 사람의 목회와 사역은 가장 바람직한 모습의 사역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만약 이들이 이 세 목회자의 가르침과 본을 잘 조화시키고 서로가 다른 목회자에게 받은 영향력을 잘 나눌 수만 있었다면 고린도 교회는 지상의 그 어떤 교회가 누린 풍성함보다 더 큰 영적인 풍성함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그렇게 다르고 훌륭한 목회자들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은혜로 누리지 못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목회자에 따라서 이리저리 나뉘어서 싸우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자신은  그 어떤 사람도 아닌 그리스도에게 속해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까지 가세해서 고린도 교회는 모두가 모두와 다투는 아비규환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나 더 좋아하고 덜 좋아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이렇게 서로가 그 사람이 아니면 안된다고 하니 그게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엄청난 문제를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파벌의 중심이 되는 것은 그 대상이 되는 사람에게 원인이 있을 때도 있지만, 그 사람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취향과 스타일이 그 원인이 될 때가 더 많습니다. 특히 그 중심이 되는 사람이 더 훌륭하고 더 존경스러운 사람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사람을 끄는 힘이 강력하기 때문에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 사람을 중심으로 패가 나뉘게 되기가 더 쉽습니다. 우리는 특정 목회자 당대에는 정말 아름답게 성장하고 건강하게 보였던 교회가 다음 세대로 넘어가면서 큰 몸살을 겪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되는데, 어떤 경우에는 후임자가 전임자보다 턱없이 부족하거나 도덕적인 결함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될 때도 있지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더 크고 주된 이유들 중의 하나는 이미 그 교회가 지나치게 전임목회자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 교회 성도들의 스타일이 전임목회자에게 익숙해 졌고 또 굳어져서 전임목회자와 다른 스타일의 목회자를 받아들이지도 인정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차이와 스타일의 문제를 옳고 그름의 문제와 혼동하는 것, 그것이 이러한 혼란의 커다란 원인일 때가 많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었었던 첫번째 파당은 스스로를 바울에게 속한 자라고 불렀던 “바울파”입니다. 고린도 전서 4장 15절을 보면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다”고 쓰고 있습니다. 고린도의 성도들 중 많은 수는 바울의 영적인 아들과 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바울에 의해서 전도되었고, 양육받았으며, 짙은 영적인 어둠과 죽음 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바울에게 결코 갚을 수 없는 영적인 빚을 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에 대한 맹목적인 애착을 가진 사람들이 많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바울의 말이라면, 그리고 바울이 가르쳤다고 생각되는 것이라면 묻지마 식으로 받아들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당대의 가장 훌륭한 선생에게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으니 자신들만을 일류로 여겼을 것이라는 것도 어렵지 않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미 오래 전에 그들을 떠났지만, 바울을 향한 그들의 추억은 없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 추억이 자신들의 성도로서의 ‘수준’과 ‘정통성’을 결정하며, 다른 이들과 자신들을 구분하는 차별조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교회에 최고라고 인정할 수 있는 목회자를 주시는 것은 그 교회가 누릴 수 있는 정말 엄청난 복이며 특권입니다. 오히려 다른 교회는 목회자 때문에 고민하고 힘들어하기도 하는데, 그런 목회자에게서 배우고 양육받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그건 정말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 특권이 큰 만큼 위험이 더 큰 것도 사실입니다. 그만큼 그 밑에서 배운 성도들은 그 목회자 중심이 되기 쉽고, 그래서 그 목회자와 다른 유형의 지도자는 인정하지 못하기가 쉬우며, 나아가서 그 사람을 최고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과도 등을 지게 되고, 자기들만이 최고라고 생각하게 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은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스물 일곱살 때 고등학교 때부터 다니던 교회를 떠나 이름만 대면 다 아실 그 당시로서는 정말 최고의 목회자가 목회하는 최고의 교회로 옮긴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가 집 가까이 있었다는 것은 저에게 정말 커다란 복이었죠. 그런데, 제가 그 교회의 청년부에 들어가서 활동을 하면서 한가지 때문에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청년들 중의 많은 수가 그저 자신이 그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의 신앙적인 수준을 굉장히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밖에서 들어간 제가 보기에는 전혀 아니었죠. 저는 그 때 알았습니다. 사람은 너무 좋은 것을 가져도 망가진다는 것을 말입니다. 좋은 것을 가졌을 때는 그만큼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가진 것과 자신을 동일한 수준으로 여기게 됩니다. 우리는 영적인 영역에서도 얼마든지 이런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알맹이를 살피지 않은 채로 껍데기만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려는 실수 말입니다. 


책을 한권만 읽은 사람하고는 대화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다른 책은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 책에서 말하는 것만이 진리라고 생각할 뿐 진리의 풍성함과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대화가 안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에게만 배우고 그 사람에게만 빠져 있는 사람은 무척 위험한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진리는 어쩌면 파내도 파내도 끝이 없는 광맥과도 같습니다. 무한한 매장량을 가진 유전과도 같습니다. 그 풍성함을 모두 그것도 혼자서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나 다 부분적인 진리만을 알 수 있고, 또 그것을 전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 일부분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은혜롭고 충분히 풍성할만큼 진리의 세계는 넓고 풍성합니다. 그래서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도, 진리를 배우는 사람도 내가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진리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를 제한하게 되고, 스스로도 그 안에 갇혀서 그 진리의 풍성함을 누릴 수 없게 되어집니다. 게다가 그런 태도는 진리의 다른 측면과,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 아집에 빠지게 만듭니다. 그게 심해지면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멸시하게 되며, 그리고 분쟁으로 가게 되고 결국은 몸된 교회를 쪼개는 결과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두 번째 파당은 스스로를 아볼로에게 속했다고 주장했던 “아볼로파”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 18장과 19장의 내용을 보면 아볼로는 애굽의 알렉산드리아 출신이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당시 최고의 대학도시였습니다. 바울이 자라고 교육받았던 다소도 비슷한 곳이기는 했지만 알렉산드리아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거기에서 나서 거기서 교육을 받고, 게다가 학문적으로 탁월한 재능과 웅변능력을 가졌던 그가 복음을 가르치는 것은 남달랐을 것입니다. 그의 가르침은 그 누구도 빈틈을 찾을 수 없는 치밀하고 명확한 것이었고, 당대 최고의 학문이라고 불리던 학문들의 모든 경향이 녹아들어간 박식한 것이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 그가 바울을 이어서 고린도 교회의 목회자가 되었고, 그러한 그의 가르침은 자연스럽게 그 교회에 엘리트적인 요소를 만들게 되었을 것입니다. 고린도가 비록 극심하게 타락한 도시였지만, 그래도 철학이 무척 발달한 도시였음을 생각해 본다면 고린도 교회 안에도 지식인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들은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아볼로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아볼로에게서 많은 영향력을 받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러면서 이들이 지적인 우월감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많이 알고, 다른 사람들보다 깊고 논리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지적인 설교를 하고 그런 설교를 듣는 일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사실 많이 생각하게 하고 고민하게 하는 지적인 메시지가 전해지지 않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면 교회 안에서는 더 깊은 진리들을 가르치고 배우기가 어렵습니다. 아볼로 파의 문제는 그들이 지적인 가르침을 듣고 그것을 좋아했다는데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그것 때문에 지적인 우월감에 빠졌고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그들과 다투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도 아볼로가 의도한 바는 전혀 아니었지만, 고린도의 성도들 중에는 그렇게 되어져 간 사람들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각기 지적인 능력이 다 다르기 마련입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 중에 특히 인문학, 그러니까 문과쪽 학문을 연구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원래부터 논리적인 이해력이 능력이 발달해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실 그런 경향 때문에 인문학을 선택해서 공부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지요. 성향이 그렇다 보니 설교도 그런 설교를 좋아합니다. 풍부한 증거들과 논리적인 설득력, 문학적인 표현들로 가득 찬 설교를 좋아합니다. 교회 안에서 교리연구 모임이나 독서모임을 만들면 가장 좋아하는 분들이 바로 이런 성향을 가진 분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향의 사람들이 가지는 위험성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런 메시지를 즐기는 설교 소비자가 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적으로 잘 짜여지고 설득력 있는 설교를 들으면서 자기 삶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지적인 즐거움을 느끼면서 그것이 신앙생활의 전부인 양 생각하게 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두 번째 잘못에 빠지게 되는데, 자신이 그런 수준높은 메시지를 잘 알아듣고 좋아한다는 사실로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차별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는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나은 사람,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우월함과 훌륭함은 결코 내 지적인 능력과 지적인 취향에 있지 않습니다. 참된 탁월함은 그렇게 알아들은 말씀으로 내가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가 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 메시지를 통해서 내 속사람과 삶도 고상하고 아름다운 주님을 닮은 삶이 되고 있느냐 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성향을 이렇게 자신의 변화와 연결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지적인 능력이라는 선물은 오히려 우리를 교만하게 하고, 완고하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세번째 파당은 “베드로파”였습니다. 베드로는 정통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속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주로 유대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형태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8장 이후에 보면 제물로 바쳤던 고기를 먹는 일로 인해 일어난 갈등이 소개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그런 갈등이 있었다는 것은 고린도 교회에도 예수는 믿지만 아직 완전히 유대교의 율법 중심의 영향력으로 부터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전에 늦게 예수믿고 소천한 한 집사님의 1주기 추도예배를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불도가 엄청나게 센 집안이었지만, 지금은 다 예수를 믿고 계십니다. 그런데, 제가 그 집에 도착하자마자 조금 이상한 모양의 잘 차려진 상 하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상 위에는 홍동백서는 아니었지만, 거의 제사음식에 가까운 음식들이 가득 차려져 있었고, 그 앞 의자에는 고인되시는 집사님의 사진이 있었고 그 앞에는 고인이 사용하시던 성경책이 놓여있었습니다. 일찌감치 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직도 우상숭배한다고, 어리석다고 비난할지 모르지만, 사실 모든 종교는 모두 인간의 영혼에 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영혼에 뿌리박힌 이전 종교의 영향을 하루 아침에 청소해 낸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베드로파에 속한 사람들도 이런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율법적인 신앙이 굉장히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율법적인 신앙이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 정해진 것만 지키면 좋은 신앙인이 될 수 있으니, 신앙을 위해 고민할 것 없이 얼마나 편합니까? 또 지킨만큼 다 자기 만족과 확신을 주니 그것도 큰 유혹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또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정해진 의무들만 지키면 좋은 신앙인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의무를 다하는 일을 통해서 자기 신앙을 지키려고 합니다. 문제는 이 기준을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져다 대고 자기처럼 하지 못하는 사람을 등급이하의 신앙인으로 취급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신앙의 의무들은 지켜야 합니다. 최소한 지키려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지키지 못하는 것을 잘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의무란 말 그대로 의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좋은 신앙을 위한 최선이나 전부가 아니라 최소요구사항입니다. 기본이라는 것이죠. 기본은 기본입니다. 출발점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아무리 빈틈없이 행해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내 공이 될 수 없고, 내 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우리의 생각이 자꾸 그 쪽으로 흐르기 쉽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런 분들은 명확한 것, 간단한 것을 좋아하고 그래서 언제나 “그러니까 내가 해야 할 것을 말해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행하면서 만족과 확신을 느끼며, 그것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우월감을 느끼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내 자유의사에 따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해진 규칙만 지키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둘 사이의 균형을 잘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되 법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어서, 내 자발적인 의지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내가 행하는 신앙적인 의무들이 내 의로 변하고 남을 평가절하하는 교만함의 조건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네번째 부류는 자신을 그리스도당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도 저도 다 싫고 자신은 그리스도께만 속해 있다고 여겼던 사람들입니다. 겉으로 보면 아주 훌륭해 보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누구나 그리스도께만 속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자신들만 그리스도께 속했다고 생각하는, 정말 심각한 영적인 교만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에도 이런 성도들이 있습니다. 누가 이런 성도들일까요? 소위 은사위주의 직통계시파들이나 자신의 생각과 판단력을 과신한 나머지 자기 생각대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대개 이런 분들은 전체 교회와 화평하지 못하고, 독단과 편견, 자기 우월감에 빠지기 쉽습니다. 내가 성도라면, 다른 사람들도 성도입니다. 그리고 나는 전체 교회의 한 지체이며 그 속의 한 개인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뿔뿔이 흩어놓지 않으시고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 두신 이유는 교회로 하여금 성도 개인을 지도하고 그 신앙을 검증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성도가 교회에게 그런 역할을 맡기지 않으면 성도 개개인은 결코 영적으로 안전하지 못합니다. 진리가 아닌 자기의 주관적인 느낌을 믿는 사람이 되고 그래서, 스스로 영적으로 스스로 망하는 길을 가게 됩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이런 기준이 되어줄 만한 교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네 가지 파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을 중심으로, 또 자신들의 성향과 취향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치우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도 사람입니다. 사람은 항상 자신의 성향에 따라서 어느 한 쪽으로 기울기가 쉽습니다. 기본적으로 균형감각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이든 내가 남보다 낫다고 생각할 때,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신앙적으로 볼 때, 어느 한 쪽으로기우는 것은 전혀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곰곰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과연 어떤 쪽으로 기울기 쉬운 성향이 있습니까? 자신만이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바울파”입니까? 자기의 지적인 능력과 신앙의 깊이를 혼동하는 “아볼로파”입니까? 이런 저런 규칙을 지키면서 자기 의와 만족에 빠져있는 “베드로파”입니까? 아니면 예수님과 직통한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파”입니까? 어느 쪽이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교만한 것이고, 모두가 참된 진리에서 벗어난 그릇된 것입니다. 건강한 신앙인은 무슨 이유로건 결코 다른 성도들과 자신을 구분하거나 유치한 우월감에 빠지지 않습니다. 또 그것 때문에 갈등을 만들어 내지도 않습니다. 


사람은 제 각기 취향과 성향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리고 많은 성향들이 성장하는 가운데 생겨나거나 강해지고 약해지기도 합니다. 개인의 신앙색깔은 그 취향과 성향에 크게 영향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의 취향이나 성향이 진리가 아니며, 상대적이고 언제나 변할 수 있는 주관적인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칩착은 미숙함의 표지입니다. 신앙을 전체의 일부분에 불과한 무엇 하나에 묶어 놓는 것은 그 사람의 신앙이 아직 성숙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에는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을만큼 더 넓고 다양한 측면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리를 그렇게 크게 만들어 놓으신 이유는 그 중 마음에 드는 하나만 붙들고 살라고 그러신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면들을 통해서 신앙의 풍성함, 진리의 풍성함,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알고 누리라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게 어떤 사람이건, 어떤 확신이건 오로지 그것 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는 진리란 그렇게 좁아터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 그 무엇에라도 묶여있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집착은 교만과 갈등을 만들어 냅니다. 한 가지에 집착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는 건강할 수도 없고, 평안할수도 없습니다. 모두가 모두에게 적이 되고 경쟁자가 되는 사회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문제를 만드는 자들이 아니라 평화를 만드는 자들로 부르셨습니다. 무슨 이유에서건 자신을 따로 떼어내지 마십시오. 교만과 우월감, 자기 의를 극복할 때, 그것들을 이겨내려는 의지를 가질 때 우리는 우리의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만드는 우리의 소명을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도 영적으로 안전한 가운데 하나님과 신앙의 풍성함을 누리며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그 누구나 그 무엇이 아닌 진정으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