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3.06.14. 금요기도회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사도행전 17)


행0237to42 -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사도행전17).pdf


20130614FE (#1).mp3.zip



    

    본문 : 사도행전 2장 37-42절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사실 저에게는 굉장히 의미가 깊은 본문입니다. 제가 설교자로 사역을 하면서 설교사역에 대해서 깨달은 것이 참 많이 있었지만, 오늘 본문이 저에게 준 도전은 설교사역 뿐만 아니라 목회 자체에 대해 완전히 다르게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처음에 사역을 시작할 때, 그저 말씀만 제대로 설교하면 다 되는 줄 알았습니다. 말씀 자체가 일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만 애썼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 사역에 이렇다할 열매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를 고민했습니다. 처음에는 스스로를 자책하기만 했습니다. ‘내가 말씀을 제대로 설교하지 못해서 그렇다. 나에게 말씀을 제대로 가르칠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다’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열매맺는 사역을 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리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셨고 이것이 기도에 대한 답이 되었던 것입니다. 


    한 번의 설교, 그것도 듣기 좋은 세련된 설교가 아니라 직격탄과도 같은 직설적인 설교가 3,000명을 회개시키고 새 사람으로 만들었다. 항상 보아왔고 익히 알고 있었던 내용이지만 새롭게 다가온 이 말씀은 저에게 정말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왜 그 때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왜 나에게는 이와 비슷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그 답은 성령님에게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성령님께서 주시는 능력과 말씀으로 설교하였지만 저는 그저 그저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가 그런 놀라운 일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신 성령님께서 그런 일을 행하셨던 것인데 그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 날 이후로 저는 이 본문을 저를 위한 모범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성령충만함을 달라고,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어서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만이라도 베드로와 같은 역할을 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까지도 저의 가장 중요한 기도제목 중의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언젠가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저의 기도에 분명히 응답해 주실 것이고, 그래서 우리 교회에도 그 날 예루살렘에서의 부흥을 닮은 영적인 부흥이 일어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저에게 이런 소원을 주셨으니, 또 이 소원은 분명히 선한 소원이니 허락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성령충만한 베드로가 첫번째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가 전한 복음의 요지는 이러했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성령충만함을 증거로 제시하며 외치는 베드로의 설교는 그 자리에 있었던 그 어떤 사람도 부인할 수 없는 논리적이고 분명한 설교였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설교의 능력은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 날 베드로가 했던 설교는 베드로의 설교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께서 베드로의 입술을 통해서 듣게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굳어져 버린 양심을 깨뜨리면서 영혼 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음 깊이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큰 일을 저지르고 엄청난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셨는데, 자신들이 그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고, 하나님께서는 그 메시야를 다시 살리셔서 온 우주의 왕으로 세우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 저기서 유대인들의 탄식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들은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형제들이여, 우리가 어떻게하면 좋겠습니까? 이 죄는 해결받을 방법이 없습니까? 어떻게 하면 이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지난 금요일에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위로하고 칭찬하는 일부터 시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실패와 죄악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사람들은 맨 처음에 무엇보다도 자신을 향해 탄식하게 됩니다. 자신의 소망없는 처지와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지만, 그러면서도 도저히 자기 힘으로는 그런 처지를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진짜 복음으로 들려지고 또 구원의 능력이 되는 순간이 바로 이 순간입니다. 이 순간이야 말로 복음이 자기 죄 때문에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그 절망에서 빠져나올 확실한 방법을 알려주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고 절망하는 것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지만 그것이 사람을 복음으로 인도해 줄 수만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최고의 복이고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나쁜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더 가까이 가게 해 줄 수만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탄식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우리 주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이 말씀 속에는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다시 하나님께 받아들여 질 수 있는 방법 뿐만 아니라 성령님이라는 놀라운 선물을 받게 된다는 은혜로운 약속까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은 정말 얼마나 복된 소식입니까?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소식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원수인 죄인이었던 우리를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케 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본문은 하나님께서 그런 복을 아낌없이 넉넉하게 주신다고 증언합니다. 그가 누구이건 어디에 있건 또 어느 시대를 살아가건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든지 성령을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복음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얼마나 놀랍고 풍성한지 모릅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가 어떤 죄인이든지 ‘얼마든지’ 용서하시고, ‘얼마든지’ 구원하실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성령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복음이 우리를 든든하게 하고 복음이 우리를 부요하게 하며, 복음이 우리를 평안하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복음은 ‘얼마든지’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주는 이런 복을 얻고 누리면서 살아가려면 이 복음을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복음의 내용 뿐만 아니라 복음이 요구하는 것까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설교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말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우리의 영혼의 구원자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과 현실의 왕이며 주인이시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복음의 은혜와 유익, 그리고 능력을 제대로 누리려면 무엇보다도 이것이 온전하게 인정되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구원의 방법을 묻는 유대인들에게 제일 먼저 요구했던 것은 ‘회개’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 죄가 무엇인가요? 바로 자기 자신을 주인삼고, 이 세상을 주인삼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그 주인을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옛 주인에게서 180도 돌아서서 새로운 주인에게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 새 주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또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세례가 무엇입니까? 세례는 내가 이제는 옛 주인을 떠나 회개한 사람이라는 것을 자신과 교회 앞에서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증언하는 예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이제 나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예식입니다. 그런데, 이 세례 속에는 또 하나의 아주 중요하고 무거운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아의 죽음’입니다. 세례는 원래 침례였습니다. 머리를 잡고 물에 푹 담갔다가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온 몸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두 물에 잠기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죽음입니다. 옛 자아의 죽음입니다. 세례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래서 이제는 옛날의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으로 사시는 것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죄 용서를 받고 구원을 얻으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죄가 잘못된 것임을 인정하고 그것으로부터 돌이켜야 합니다. 내가 주인되고, 이 세상을 주인삼아 살았던 삶을 청산하고 예수님을 새 주인으로 맞아들여야 합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것은 나에게 그렇게 하겠다는 의사가 충분하다는 것, 복음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또 받아들이겠다는 것을 스스로 결단하고 증명하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비로소 우리는 죄 용서를 받게 됩니다. 다시 하나님의 자녀요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그 다음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바로 성령님이라는 선물입니다.  성령님은 사실 선물이라고 부를 수 없는 분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니까요. 그런데, 성경은 외람되게도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약속된 선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황송하게도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능력으로 옛날의 거듭나지 못한 삶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 땅에서도 하나님을 주인 삼아 거룩하고 능력있는 삶을 살게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복음을 이야기하면서 단순히 죄 용서 받는 것만을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성령의 선물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복음 속에는 성령충만이라는 선물을 받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 성령충만이 몇몇 사람에게만 특별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이것이 베드로가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면 성령을 ‘받을 수도 있다’가 아니라 ‘받으라’라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모든 자들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까요. 


    이런 점에서 본다면, 오늘날의 성도들은 복음이 약속하고 있는 은혜를 전부 다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성령충만함의 약속이 복음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교회가 얼마나 되며, 또 그것을 알고 있는 성도들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성령충만이 과연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는 따로 하더라도 성령충만이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자들에게 약속되어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한데 말입니다. 사실 성령충만함을 신앙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라고 말하면 이야기가 굉장히 복잡해 집니다. 예수를 믿는 것과 성령충만함을 얻는 것은 시간차를 두고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중간에 머물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영적인 혼란이 생겨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성령충만함을 방언과 같은 어떤 눈에 보여지는 현상을 중심으로 해서 생각하게 되면 그것도 큰 문제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성령충만함이란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믿게 하시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어찌보면 성령충만함을 받는 것이 복음을 들어야 하는 이유이고 또 구원의 완성이라고 까지 말하는 것 같습니다. 성령충만함에서 죄와 싸워 이길 능력이 나오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힘이 나오고,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니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복음을 이야기하면서 이것을 말하지 않고 또 듣지 못한다면, 그래서 성령충만함에 대해서 무관심 채로 신앙생활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 되겠습니까? 우리에게 성령충만함이 없다면 우리는 구원얻은 자답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죄를 이기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영광스럽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여도 그것은 반쪽짜리 구원 밖에 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은 성령충만함을 향해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단순히 영혼의 구원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새롭게 나의 주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덧입어 하나님의 백성답게 아름답고 능력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멋진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찌할꼬?”하는 모든 탄식어린 질문의 해답은 성령충만 안에 있습니다.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도,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영광스러운 삶을 사는 것도 모두가 다 성령충만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복음 속에 넣어놓으셨고, 구원과 함께 약속하신 성령충만의 복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선물을 꼭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의 선물 안에서 하나님을 주인삼아 거룩하고 능력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