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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3.06.16. 주일오전 -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마가복음 31)


막0645to56 -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마가31).pdf


20130616SM (#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6장 45-56절



    예수님께서는 하루 종일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많은 말씀들로 사람들의 영혼을 먹이셨고, 오병이어로 그들의 배를 채워 주셨습니다. 거기 모여있던 사람들에게 그 날은 인생 최고의 잔칫날 이었을 것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렇게 몸도 영혼도 온전히 만족을 누린 날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 우리의 몸과 영혼의 문제를 한꺼번에 그리고 온전히 만족스럽게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은 우리 주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과 영혼, 그러니까 우리 존재 전체가 만족을 누리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잘 모를 수 있어도 주님은 다 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안다고 해도 그것을 얻고 또 채울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시고 또 채워주실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한 분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참된 복음이 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이신 예수님을 믿을 수 있고 또 믿어야만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되어주실 수 있고, 또 기꺼이 그렇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항상 우리 주님을 내 영혼의 주인이실 뿐 아니라 현실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서 주님 주시는 은혜로 인생을 부족함 없이 채워가는 복된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참 멋진 날이었습니다. 그 날은 하늘나라의 잔치가 땅에서 벌어진 날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런 멋진 잔치를 마친 후, 예수님은 갑자기 제자들을 재촉하셨습니다. 갑자기 제자들을 배에 타게 하시고는 벳새다로 가게 하셨습니다. 자신은 기도를 하시기 위해서 제자들과 떨어져서 근처에 있는 산으로 가시면서 말입니다. 여러분, 왜 주님은 제자들을 그렇게 재촉했고, 그랬으면서도 자신은 그 배에 타고 함께 가시지 않으셨을까요? 서두르시기는 당신이 서두르시고서 왜 제자들만 보내셨을까요? 주님의 이런 행동은 그 당시 제자들도 이해하기 힘들었겠지만 이해하기 힘들기는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이유가 없는 행동을 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고, 그래서 이렇게 서둘러 이해하기 힘든 일을 행하셨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중요한 이유와 목적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가복음을 함께 공부하면서 알게된 것 한가지는 예수님의 갑작스럽고 이해하기 힘든 행동들은 모두 제자들에게 무언가를 보여주시고, 또 가르쳐 주시려는 행동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해하기가 과히 쉽지 않은 예수님의 행동 속에는 제자들을 위한 보석같은 가르침이 들어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그 가르침을 찾아내서 그것을 믿음으로 우리를 위한 것으로 취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시려는 놀라운 은혜를 우리의 것으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조금 부수적인 내용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떨어지셔서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다는 사실로 부터 우리를 위한 소중한 교훈 한 가지를 얻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도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은 바쁘고 번잡한 사역과 일상적인 일들을 떠나서 기도하는 시간은 예수님에게도 꼭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종종 그렇게 하셨으며, 어떤 때는 기도할 짬을 내기 위해 새벽이 되기도 전에 일어나서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하기도 하실 만큼 기도를 중요하게 생각하셨다고 말해 줍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에게도 기도가 이만큼 중요하고 또 필요한 일이었다면 우리에게는 어떻겠습니까? 우리에게 기도는 더더욱 필요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셨고, 그래서 우리에게도 기도가 꼭 필요하다는 것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 여러분, 기도하지 않는 삶은 하나님의 은혜가 다스리는 삶이 될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삶은 그래서 혼잡해지고 방향을 잃어버리기가 쉽습니다. 당장 급한 일에 휩쓸려서 탈진해 버리는 무의미한 삶이 되고, 꼭 필요한 것을 공급받지 못하는 삶이 되기 쉽습니다. 두번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모범이십니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지를 알려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기도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셨다는 것은 우리는 더더욱 그래야 한다는 뜻입니다. 꼭 기도하시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꼭 기도시간을 가지시고 또 바쁘고 번잡할수록 더욱 기도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삶을 채우고 여러분의 삶을 질서 있게 움직여 가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배를 띄워 벳새다로 향하던 제자들은 중간에서 꽤 센 바람을 만나서 노를 젖는데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그 때 시간은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였는데, 그 어스름한 새벽에 호수 중간에서 큰 난관을 만난 것입니다. 끙끙대며 노를 젖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니 누군가가 그 거센 바람을 거슬러 물위를 미끄러지듯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물 위를 걷는다? 여러분은 사람이 물 위를 걷는 것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만약 새벽이 어슴프레할 때 아무도 없는 호수 중간에서 그런 광경을 본다면 어떤 느낌이 드시겠습니까? 그걸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우리들의 반응은 둘 중의 하나겠죠. 그 자리에서 혼절하든지 아니면 소리를 지르던지 말입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사람같은 것이 물 위를 걸어 점점 자기들에게로 가까이 오고 또 그렇게 배를 지나쳐 가려고 할 때까지 그게 누구인지는 처다 보거나 생각해 보려고 하지도 않고 “유령이다!”라고 하면서 소리만 질러댔습니다. 사람같기는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이라면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으니, 그렇다면 사람같지만 사람이 아닌 것, 그러니까 유령일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정신줄을 놓은 제자들에 비해 예수님은 차분하시기만 했습니다. “안심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배에 오르셨는데, 그러자 바람은 언제 불었느냐는 듯이 잦아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배에 타시자 마자 바람이 잦아드는 것을 보고 또다시 많이 놀랐습니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서 제자들이 물고기 다섯 개와 떡 두 덩어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일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 일을 통해 마음이 밝아진 것이 아니라 둔해졌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본문을 가만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행동들이 일부러 하신 것이라는 인상을 여기 저기에서 받게 됩니다. 처음에 굳이 그 늦은 시간에 제자들을 재촉해서 배를 태워 보낸 것이나 새벽녘까지 혼자 뭍에 계시다가 바람이 거세지고 나서야 기다렸다는 듯이 제자들을 향해서 물위를 걸어 가신 일이나 또 그렇게 하신 다음 그냥 제자들을 지나쳐 가려고 하셨던 것 등. 이 모든 행동들은 무언가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일부러 취하신 것들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먼저 우리는 이 사건이 예수님께서 제자들만 따로 배에 태워 보내신 후에 일어났던 사건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캄캄한 호수 위에서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을 거스르며 싸우는 제자들의 상황은 그 전 날 예수님께서 들판에서 24,000명의 군중을 앞에 놓고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말씀하셨을 때의 상황과 많이 닮아있습니다. 그 때 그 말씀이 “앞으로 너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너희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을 만날 때, 너희의 힘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할 때 너희들은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이었듯이, 지금 제자들이 처해있는 상황 또한 그 자체가 “너희가 앞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이런 어려움에 맞닥뜨리면 그 때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이 인도해 가시는 우리의 삶,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 속에도 난관이 있고 반대가 있을까요? 캄캄하고 힘겹기만한 그런 상황이 생겨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당연히 그럴 수 있습니다. 거센 바람처럼 우리를 거스르는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고, 캄캄한 호수 위의 작은 배처럼 두렵고 힘겨운 상황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워 보내신 배 위에서 세차게 거스르는 바람을 만났던 제자들처럼 우리들도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면, 난관도 없고 어려움도 없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주님이 그런 약속을 해 주신 적이 없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고난과 고통에서 열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물론 믿음으로 예수님의 인도를 따라가면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 마음대로 갈 때보다는 평안한 길을 가게 되고, 훨씬 더 든든하고 기쁨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곧 고통과 고난과는 상관이 없는 삶을 살게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이렇게 질문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느냐고 말입니다. 아마 경험해 보신 분은 이미 이런 질문의 답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 것이 고통과 고난이 찾아온 다음을 달라지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르면서 만나게 되는 난관들은 그것 자체로 끝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들은 모두가 다 주님의 질문을 담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주님은 “너는 어떻게 하겠니? 어떻게 하면 이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겠니? 나도 만족하고 너도 만족할 수 있는 정답은 무엇일까?”하고 묻고 계십니다. 


    바람을 거스르며 힘겹게 노를 저어 보지만 전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제자들...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자신들을 그런 난관 속으로 몰아 넣은 주님을 원망하지 않았을까요? 굳이 그 밤에 우리를 보내시더니 우리를 이 지경에 처하게 만들었다고 입이 댓발이나 나와서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때 바로 그 상황 속으로 뛰어 들어오셨습니다. 바람부는 바다 위, 배를 타고도 건너지 못할 바람부는 바다 위를 걸어서 말입니다. 주님이 우리가 처해있는 고난과 고통 속으로 뛰어들어 오시는 것은 대개 일상적인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아주 기적적으로 그렇게 하실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너무나 놀라운 방식으로 그렇게 하시기 때문에 당사자 조차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이 종료되고 난 후에야 그 동안의 되어진 것들을 돌아보면서 ‘아, 그 때 그게 하나님의 은혜였구나! 그 때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었구나!”하고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상황 속에 개입하시고 도와주시는 것을 당장 알아차리는 것이 그만큼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주님께서 개입하시고 도와주시기 시작했던 그 순간부터 주님이 함께 하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분명히 그런 난관들을 훨씬 더 수월하게 겪어냈을 것입니다.  


    거센 바람이 부는 바다 위를 걸어 오셨던 예수님은 제자들을 그냥 지나쳐 가시려고 했습니다.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제자들이 바람 때문에 고통당하는 것을 보시고서 제자들에게로 오셨다면 빨리 배에 올라 타시고 제자들을 도와 주셔야 하는데 그냥 지나치려고 하셨다니, 혹시 우리 성경이 잘못 기록되었거나 혹은 잘못 번역된 것이 아닐까요? 저도 그런 생각이 들어서 영어성경과 원어성경까지 다 뒤져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다 똑같았습니다. 모든 성경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로 오셨지만 그냥 지나쳐 가시려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행동이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이상한 행동이라면 분명히 여기에도 무슨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이런 상황을 가정해 보면 그 답을 찾을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집에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연락도 없이 너무 갑자기 찾아와서 경황이 없어서 반갑게 맞이하지도 못했고 또 대접도 잘 해주지 못했습니다. 정신을 좀 차리고 제대로 대접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그 친구가 이렇게 말합십니다. “야, 이제 나 가야겠다. 너 많이 바쁜 모양인데 내가 괜히 왔지? 그치? 나 이제 간다.” 여러분, 이것이 진짜 간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나를 잡고서 제대로 대접해 달라는 말입니까? 분명히 후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행동도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지나가시려고 지나가셨던 것이 아니라 실은 그 반대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것이 처음 호수 위를 걸어오실 때부터 제자들에게 원하셨던 반응이었고 또 기대하셨던 정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정답은 앞으로도 주욱 제자들이 비슷한 상황이 되면 내놓아야 할 정답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지나쳐 가시려고 하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기는 커녕 오히려 유령으로 착각하고 소리만 질러대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냥 지나쳐 가시려고 했던 것은 “나를 보라!”는 제스츄어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여기 있으니 나를 붙들고 나에게 도움을 청하라는 힌트였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결국 끝까지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정답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상황을 모두 해결해 놓으시고 나서도 그저 놀라고만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당장의 도움도 얻는데도 실패했을 뿐 아니라 미래를 위한 예습도 하지 못했습니다. 


    마가복음은 제자들이 끝까지 예수님께서 바라셨던 답을 내놓지 못한 이유가 그들이 오병이어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결국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신 사건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만약 제자들이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서 무언가를 확실해 배웠다면 물위를 걸으셨던 것에 대해서도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오병이어 사건에서 반드시 붙잡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놓친 것은 무엇일까요? 성도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24,000명이나 되는 대책 없는 목자 없는 양같은 이스라엘 백성들, 그런 사람들의 영혼을 그 입에서 흘러 나오는 말씀으로 풍족하게 먹이시고, 또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그 모든 사람들을 배부르게 먹이고 열 두 광주리나 남기시는 놀라운 능력과 은혜를 베푸신 분이라면 그 분은 누구이시겠습니까? 아니, 누구이실 수 밖에 없겠습니까? 그런 분이 실재한다면 그 분은 하나님이실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구약성경은 아주 여러 곳에서 하나님을 자기 백성을 책임지고 먹이시는 분으로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또 약속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미 알아차리신 분도 계시겠지만, 오병이어 사건은 구약의 시편 한 구절을 현실로 옮겨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노래하는 시편 23편의 1절과 2절이 바로 그 구절들입니다. 그래서 오병이어 사건은 예수님께서 시편 23편의 약속을 있는 그대로 성취하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증거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기들 옆에 있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커녕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 조차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처음 제자들이 오병이어 사건에서 놓쳤던, 정말 놓쳐서는 안되었던 것은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엄청난 진리였습니다. 


    굳이 바다를 걸으셨던 것도 바로 이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일부러 선택하신  행동이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먹이시는 분이시기도 하지만, 물위를 걸으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특히 욥기 9장 8절과 11절에는 아주 명확하게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고...” 만약 제자들이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발견했다면, 물결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도 하나님이신 줄 당연히 알아보았을 것이고, 그러면 그들은 예수님을 그냥 지나가시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환영하고 모셔 들이며 도움을 요청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전에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제자들은 지금도 그것을 깨닫는데 실패했고, 그래서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유령으로 착각하며 두려워하기만 했던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걸음을 멈추시고 방향을 바꾸어 배 안으로 성금 걸어 들어오셨고 그렇게 풍랑을 잠재워 주셨습니다. 비록 믿음이 없고 그래서 꼭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제자들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도와주셨고 또 그들을 위험과 난관으로부터 건져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두려워하고 놀라고 있는 제자들에게 “안심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위로와 확신의 말씀까지 주셨습니다. 그러는 중에 제자들과 예수님께서 탔던 배는 육지에 도착했는데, 그 곳은 처음 목적지로 삼았던 벳새다가 아니라 게네사렛이었습니다. 큰 일 난 것일까요? 전혀 엉뚱한데 와 있으니 말입니다. 제자들 혼자 왔다면 큰일이었을 수도 있지만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니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그저 예수님을 따라 다시 여행을 시작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곳에서도 다른 곳에서 처럼 수많은 사람들을 돌보고 고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대는 사람은 모두가 다 치료를 받게 해 주셨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으셨던 사건 또한 제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실습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이 두 사건을 통해서 배우고 또 확신해야할 가장 중요한 진리는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당신의 백성을 40년 넘는 세월동안 한 번도 굶기지 않으시고 넉넉하게 먹이시고 또 물 위를 성큼 성큼 걸으셨던 구약성경의 하나님이 바로 지금 눈 앞에 서 계신 그 예수님이시라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이 지금도 그들의 영적인 필요와 육체적인 필요를 모두 채워주시며, 그들이 처한 모든 곤경 속으로 성큼 성큼 걸어 들어오셔서 도와주시고 건져주시는 분이시라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두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확신시켜 주시기를 원하셨던 가장 중요한 진리였습니다. 우리가 본문을 공부하면서 얻어야만 하는 확신 또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친구요, 상담자요, 위로자요, 언제나 함께 해주는 분으로 생각하기는 하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진리에 자신의 믿음을 묶어놓고 신앙생활하는 성도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친구나, 상담자, 위로자로만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면 예수님이 굉장히 친근하고 가깝게 여겨지는 유익은 있지만, 우리의 믿음이 거기에만 머물러 있으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진짜 능력을 누리기는 어려워 집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의 참된 능력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의지하며 살아갈 때 생겨납니다. 그 믿음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또 하나님을 섬기면서 만나게 되는 어려움들을 예수님께 맡길 때 그 위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 믿음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 예수님이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확신하고 의지하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나를 위해서 목숨까지 내놓을 정도로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믿고서 살아간다면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 하고 무엇을 근심하겠습니까? 이런 확신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두려워하게 하고 또 근심하게 하는 일들이 있을 때, 그것을 자신이 붙들고 끙끙거리기 보다는 자신을 완전히 사랑하시는 전능하신 예수님의 손에 맡기고 그 두려움 대신 담대함을, 근심대신 평안함을 얻게될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이 내 친구요, 상담자요, 위로자이며 또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의 삶은 정말 얼마나 든든한 삶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통해서 우리가 믿는 것들을 우리의 현실이 되게 해 주실 때, 그러한 인생은 현실적으로도 얼마나 풍성한 삶이 되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앙 안에서 예수님을 따라가며 살아가더라도 우리에게는 부족함과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더 힘겨운 삶을 살아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상황 속에 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어김없이 그런 상황 속으로 걸어 들어 오시고 또 우리를 향해 다가오십니다. 항상 예외 없이 그렇게 하십니다. 그럴 때, 그 예수님을 그냥 지나치게 해서는 안됩니다. 빨리 그 상황 속으로 예수님을 모셔 들여야 하며, 그 분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분이 그 상황을 풀어가시도록 해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그 인생은 더 풍성하고 든든한 인생, 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항상 믿음의 눈을 열어놓으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은 믿음의 눈을 열어놓지 못해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또 참여하면서도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깨닫지 못했고, 오늘 말씀처럼 오히려 마음이 둔해졌습니다. 그래서 도와주시려고 찾아오신 예수님을 유령이라고 두려워하기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살아갈 수 있기에 충분한 크고 작은 증거들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이 닫혀 있어서 그 증거들을 보지 못하고 그래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며 사는 우리의 믿음이 확고해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우리의 마음은 더 둔해질 수 있고, 그러면 그런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더 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될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예수님이 바로 전지전능하신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의 모든 상황 속으로 찾아오셔서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항상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분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키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며 우리 인생의 풍랑을 잠잠케 해 주실 것입니다. 때로 제자들처럼 잘못된 곳으로 갔다고 여겨질 때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을 따를 수만 있다면 그 곳에서도 예수님은 그 분의 일을 하실 것이며 거기서 우리의 인생을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바로 그 곳이 풍성한 주님의 은혜가 베풀어지는 자리가 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나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언제나 말씀하십니다. “나다. 나 하나님이다. 두려워하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눈을 열어 이 예수님을 보시고, 손을 뻗어 이 예수님을 붙드십시오. 이 예수님을 항상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 속에서 예수님을 더욱 더 신뢰하심으로써 신뢰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삶 속에서 보여주시는 크고 작은 증거들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시고, 그 눈을 통해 더 큰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항상 더 큰 믿음으로 나아가게 해 달라고. 


  1. 내가 처한 난관이나 어려움이 있습니까? 그 속에서 주님을 신뢰하게 해 달라고. 그 속에서 예수님의 하나님되심을 믿고 또 붙들 수 있게 해 달라고. 그래서 그 믿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해 달라고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