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0714to23 -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마가33).pdf
설교본문 : 마가복음 7장 14-23절
유대인들, 특별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 앞에서의 정결함을 정말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정결함을 지키라고 주신 법들을 또다시 천 가지가 넘는 작은 법들로 겹겹이 둘러싸서 그 작은 법들을 잘 지키면 원래 하나님께서 주신 법들은 자동으로 지킬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런 노력 자체는 선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만큼 진지하고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니까요. 그런데도, 이러한 이들의 노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얼마나 신경써서 제대로 하려고 노력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보고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다고, 하나님을 헛되게 경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들이 하나님께서 왜 정결을 위한 율법들을 주셨는지, 그리고 율법들을 통해서 진짜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은 채로 그 하나 하나의 법들만을 지키려고 애썼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결할 것을 명령하며, 그것을 위해서 지켜야 할 여러가지 까다로운 법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들에게 그렇게 까다로운 법들을 주신 것일까요? 물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항상 정결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정결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의 정결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할까요? 그렇지 않을까요? 여전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는 사실은 지금도 변함이 없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서고 또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려면 정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미 예수님께서 율법 중에서 의식법이라고 불리는 제사나 성결에 대한 법들은 완전히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 하나의 법들을 지킬 필요는 없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성결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원리만큼은 그대로 남아있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중요합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결법을 주신 것은 하나님 앞에서 조심스럽게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모든 법은 일종의 안내선을 입니다. 그 안내선을 따라서 걸어갈 때, 자신도 위험하지 않을 수 있고, 또 다른 이들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도록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왜 굳이 이런 안내선이 필요한 것일까요? 그것은 아담이후 우리에게는 그 선을 만들고 또 자발적으로 지킬 수 있는 능력이 많이 부족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결법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 마음대로 살면 안되는 사람들이다. 그러면 점점 몸도 마음도 나에게서 멀어져 갈 수 밖에 없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조심하라고 가이드 라인을 준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또 망각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 법 자체를 지키는 일에만 신경을 쓰면서 살았고, 형식적으로 그런 것들만 지키면 된다고 가르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결국 말과 행동은 그렇지 않지만 마음은 빠져버린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또 그것을 가르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손도 씻지 않고 밥을 먹었다고 따지고 들어서 저를 불편하게 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돌아가고 나서 예수님은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해 주셔야 할 말씀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주님은 모인 사람들을 향해서 다 듣고서 모두 깨달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누군가가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섬기려면 반드시 이 원리를 알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말씀처럼 우리의 신앙이 헛된 것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도 또한 주님의 이 말씀을 이해해야 하고 또 온전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야 말로 참된 신앙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지금 보고 있듯이 이 말씀은 말씀만 놓고보면 분명하기 보다는 조금은 모호한 말씀에 가깝습니다. 사용된 단어 자체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이 말씀 안에서 사용된 말들이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것에 대해서 말씀 자체가 설명해 주는 바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밖에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고 안에서 나오는 것은 무엇인가?’하는 문제가 명확해지지 않으면 나머지 말씀들 또한 뜻을 알 수 없는 말씀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물론 눈치가 빠른 사람들이라면 적어도 앞 쪽의 말씀은 알아들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 조금 전에 예수님께서 손을 씻지 않고서 음식을 먹는 일에 대해서 말씀하셨으니까 밖에서 들어가는 것은 바로 그런 음식들을 말하는 것이구나. 그런 것들은 사람을 더럽히지 못한다는 말씀이구나.’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내용들, 그러니까 왜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못하는지, 또 안에서 나오는 것은 무엇인지,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는 말의 뜻은 무엇인지 하는 것은 여전히 알 수가 없는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을 모두 알아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제자들도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지키느라고 그 자리에서는 아는 척 했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으니까요.
사람들이 다 돌아가고 예수님과 제자들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아무도 없으니 제자들은 아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넌지시 물었습니다. 되돌아 온 것은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는 예수님의 꾸중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꾸중을 들을 줄 알고 있었습니다. 전에도 이미 그렇게 몇 번 깨진 경험이 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또 물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꾸중을 하시면서도 꼭 가르쳐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았고,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모르는 것은 꾸중을 들을 것을 각오하고서라도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제자들의 이런 수고가 없었더라면 우리들 또한 이 말씀의 정확한 의미를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의 태도는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가 오래 믿어도 신앙에 대해서, 그리고 진리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에 있어서는 모른다는 것 자체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모르면서도 모르는 것을 모르고 있거나 혹은 모르면서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짜 문제는 알고 싶어하는 의욕도 없고 그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에 대해서 묻는 일이 창피하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질문해야 합니다. 알려달라고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이해해야 하고 또 깨달음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더 깊고 든든한 신앙, 그리고 올바른 신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좋은 학생은 질문이 없는 학생이 아니라 모르는 것, 이해되지 않는 것을 질문하는 학생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성도가 되려면 질문이 있어야 합니다. 겸손하게 배우고 깨닫기 위해서 질문하는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더 확실한 믿음의 이유를 가지고, 꼭 지켜야 할 것을 지키면서 신앙생활하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성도들이 될 수 있습니다. 또 그래야 신앙이 헛일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말씀을 설명해 주십니다. 먼저 주님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히지 못한다’는 말씀부터 설명해 주셨습니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음식을 말합니다. 앞서 나온 이야기에 나오는 말로 하면 ‘손을 씻지 않고서 먹는 음식’을 말합니다. 손을 씻는 일을 자꾸 잊어버리는 저 같은 사람에게는 이 말씀은 정말 복음입니다. 주님은 음식이, 음식 자체가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이런 설명을 덧붙이셨습니다.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제자들을 비롯한 당시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정결의 문제를 겉사람과 형식의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손을 씻고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규칙들을 형식적으로 지키는 일과 직결되어 있는 일로 이해했던 것이죠. 그렇지만 주님은 이미 그러셨듯이 그런 겉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마음을 보고 계시며 그것을 문제삼고 계십니다. 겉사람의 더러움이 아니라 속 사람의 오염, 마음의 오염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오는 것, 그러니까 음식은 그것이 손을 씻고서 먹은 음식이든 아니든 전혀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마음을 더럽히지 못합니다. 반대로 마음을 깨끗하게 하지도 못합니다. 음식이란 그저 입으로 들어와서 뒤로 나가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런 것을 가지고 사람이 정결하니 더러우니 하는 것, 특히 율법이 정해준 것도 아니라 거기 덧붙여진, 이런 저런 다 외울 수도 없는 복잡한 규정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의 사람의 정결함을 결정하고 평가하려고 드는 것은 정당한 것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정결의 문제를 몸의 문제, 겉사람의 문제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 놓쳐서는 안되는 것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마음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짜로 정결해야 할 것은 자신들의 마음인데 그들은 그 마음을 놓쳐버렸고 그 마음이 더럽혀지는 것에는 무관심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몸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만 생각하느라고 정작 자기 속에서 무엇이 나오고 있으며 그것이 자기 영혼에 어떤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0절 밖에 안되는 본문에 이 말씀이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주님이 이 말씀을 세 번이나 반복하신 이유는 이 진리를 깨닫고 이 진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오늘 말씀 전체에서 이 구절만큼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두번째로 이 말씀을 설명해 주십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히느니라.” 일단 주님은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더럽힌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정말 우리 인간에 대한 놀라운 통찰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이 자신을 더럽힌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얼마나 음식을 가려 먹으려고 애쓰는지 모릅니다. 식품은 유기농 제품만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구요. 물도 한 병에 몇 천원짜리가 다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알프스 공기라고 해서 공기까지 압축해서 팔고 있습니다. 몸만 그런 것이 아니죠. 자신의 생각과 마음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보는 것, 듣는 것, 남들에게 받는 상처, 환경... 이런 것들이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망가뜨린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그런 일들에 대해서 굉장히 민감해 합니다. 물론 맞습니다. 몸이든 마음이든 외부의 환경과 조건에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서 살아갑니다. 바로 자기 안에서 무엇이 나오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은 과연 우리 자신에게 어떤 악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하는 것 말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단점이 있다거나 능력이 부족하다거나 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래도 그렇게 힘들어 하지 않지만 자신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고 악하다는 것은 굉장히 불쾌해 하며 인정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분명한 증거와 그것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이 죄인이며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무조건 거부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불쾌함이 거절의 이유가 될 때, 사실 인간은 그 자리에서 더 이상 발전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문제는 문제로 인정되기 시작할 때만 그 해결책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만 있고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없다면 우리는 굳이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서 스스로를 불쾌하게 하고 절망으로 몰아넣을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미 해결책이 주어져 있다면, 이미 그 죄라는 질병에 대한 치료약이 개발되어 있다면, 내가 그 질병에 걸려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오히려 꼭 필요한 일이 될 것이고, 그래서 굉장히 복된 일이 될 것입니다. 그것 자체가 치료와 회복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니까요.
인간은 죄인입니다. 존재의 구석 구석이 죄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서는 죄된 것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렇게 그 사람의 속에서 그 사람 밖으로 나온 죄들은 그 사람의 주변사람들도 힘들게 하고 또 그가 사는 세상도 망가뜨리지만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그 사람 자신을 망가뜨리고 더럽힙니다. 실은 이것이, 사람들이 자주 자주 잊게 되는 죄가 진짜 무서운 이유이며, 또 죄를 지으면 안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죄의 무서움은 그 죄가 그 죄를 짓는 사람의 존재 자체에 심각하고 악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마치 잉크를 한 방울 물컵에 떨어뜨리면 물 전체가 속속들이 검게 변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죄와 그 죄를 짓는 사람이 분리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죄를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죠. 그렇지만 죄와 그 죄를 짓는 사람은 결코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계속해서 죄를 지으면서 악해지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거짓말을 한 번 할 때는 굉장히 힘이 듭니다. 양심의 가책이 생기니까요. 그런데 이 거짓말이 두 번, 세 번 계속되면 어떻게 됩니까? 거짓말 하는 것이 점점 쉬워집니다. 더 이상 양심의 가책도 생기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가 한 거짓말이 우리 마음과 존재자체를 거짓에 익숙한 상태로 망가뜨려 놓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악한 일에 중독되는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나중에는 악한 일이 주는 즐거움에도 익숙해 질 정도로 영혼이 망가져 버리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들의 목록은 악한 것의 대표적인 예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하나의 줄기에 붙어있는 열 두개의 가지로 이루어진 나무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의 줄기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악한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속에서 나오는 얼마나 많은 악한 것들이 우리의 마을 더럽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신 동시에 그 모든 것들의 기둥의 역할을 하는 것이 우리의 ‘악한 생각’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의 말씀이니 그 어떤 사람들의 진단보다도 정확한 진단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여기서 우리 마음의 정결에 관한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우리에게 알려주는 해답은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정결케 하려면 무엇보다도 우리의 생각을 잘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존재와 삶을 더럽히는 악한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 악한 생각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실제로 생각만큼 자기 마음대로 하기 힘든 것이 없습니다. 악한 생각을 없애 보려고 애쓰고 노력하지만 그건 너무나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초등학생 쯤 되는 아이들이 어울려서 재미있게 놀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다섯살짜리 아이가 하나 오더니 끼워달라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 놀이는 다섯살짜리가 할 수 없는 놀이이기 때문에 끼워줄 수가 없는데도 막무가내입니다. 그래서 함께 놀던 아이 중의 하나가 꾀를 내어서 이렇게 조건을 달았다고 합니다. “너. 지금부터 3분 동안만 분홍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으면 너도 끼워줄께. 알았지?” 다섯살짜리 아이가 이 일에 성공했을까요? 실패했을까요?” 실패했습니다. 분홍코끼리를 3분동안 생각하지 않는 것이 뭐가 힘들까 하실지도 모르지만 분홍코끼리는 이상하게도 생각하지 않으려는 그 순간부터 우리 생각을 차지하기 시작합니다. 또 분홍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으려는 시도 안에 이미 분홍코끼리에 대한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입니다. 의심되신다면 댁에 가셔서 한 번 실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악한 생각도 이와 거의 비슷합니다. 악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순간 악한 생각이 찾아옵니다. 떨쳐 버리려는 순간 머리 속에 자리를 잡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죄성, 그러니까 악한 것으로 기울기 쉬운 성향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결함의 문제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나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우리 속에 들어있는 ‘악한 생각’에 관한 문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정결함을 얻으려면 그 문제부터 해결하려고 해야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게 답 같지만 아직 완전한 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말씀드린 대로 우리에게는 마음의 정결함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답이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도 답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해답, 복음이라는 해답이 있습니다. 바로 이 해답 때문에 우리가 죄인이며, 그래서 항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더럽힐 수 밖에 없다는 사실 앞에서도 좌절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때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전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정결하라는 명령도 그런 것들 중의 하나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러한 요구를 받을 때마다 꼭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불가능해 보이는 명령과 요구 뒤에는 항상 “그러니까 네 힘이 아니라 나의 능력을 의지해라. 내가 너에게 줄 은혜에 의지하거라.”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메세지가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구약의 정결법을 보면 정결하기 위해서 지켜야 할 규정들 뿐만 아니라 그 규정을 지키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생겨날 수 밖에 없는 부정함을 씻을 수 있는 방법을 함께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처음부터 우리의 정결함은 어떤 법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해야 해야만 얻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결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겉사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악한 생각을 다스리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분명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은 완전하게 성공할 수는 없습니다. 성공보다 실패가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더럽혀진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곁으로 가지고 가야하며, 그 분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일에 게을리 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한 마음의 불결함도 씻음 받게 될 것이고, 그럴 때마다 실제로 더 정결한 사람으로 변화되어져 갈 것입니다. 마음 속에서 악한 생각들이 사라져 가는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정결해진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 마음에 민감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것들이 다시 우리의 마음과 삶을 더럽히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며 그런 것들과 싸워야 합니다. 그래도 부족한 것, 그래도 더러워진 것은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다시 씻어주시고 다시 깨끗하게 해 주시는 십자가 앞으로 가져가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정결케 될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정결한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복음이며, 우리가 붙들어야 할 십가의 은혜입니다.
항상 다시 정결케 해 주시는 십자가의 은혜 속에서 마음을 정결케 하며, 그 마음을 담아 하나님을 섬기셔서 언제나 하나님과의 풍성한 교제 속에 머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