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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3.06.21.금요기도회 -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사도행전 18)


행0240to47 -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사도행전1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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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사도행전 2장 40-47절


    “형제들아 어찌할꼬?” 


    유대인들의 이 질문은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가장 위대하고 올바른 질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질문 덕분에 어떻게 보면 그들이 평생을 찾았고, 그들의 조상들이 수천년 동안 찾아왔던 해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답해 주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베드로는 이 말로 시작해서 또 다시 여러가지 이야기로 복음을 위한 확실한 증거들을 증거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반응이 단지 일시적인 감정으로 끝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더디 자라고 또 자꾸 흔들리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 ‘확증된’ 것이 아니라 감정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확신이란 확신을 위한 증거가 충분할 때만 생겨나는 것입니다. 신앙적인 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 믿음은 단순한 복음을 듣는 일로도 생겨날 수 있지만, 그것이 더 확실하고 흔들리지 않는 것이 되려면 반드시 그 믿음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근거들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교리를 공부하고 성경을 공부하며 또 계속해서 수많은 설교를 들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앙은 확증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확증되지 않은 신앙은 견고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이것이 베드로의 결론이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여러가지 증거로 확신시킨 후에 마지막으로 한 권면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결과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우리는 구원이라는 말을 들으면 영혼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이 구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내용인 것만큼은 사실입니다. 결국 나중에 영원한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고 또 하나님을 섬겨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그 전에 확실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가지는 현실적인 의미입니다. 성경이 사용하는 ‘세대’라는 말은 어떤 특정한 기간을 뜻하기도 하지만, 어떤 특정한 정신이나 사고방식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뜻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리고 ‘패역했다’는 말은 굽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술에 취하면 자신은 똑바로 걷는다고 생각하지만 똑바로 걷지를 못합니다. 술에 취하면 똑바로 걸을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굽어져 있다는 말, 패역했다는 말이 가지는 의미입니다. 패역한 세대는 자신이 패역했다는 것을 모릅니다. 자신은 바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를 못합니다. 이미 하나님을 향해서 바로 갈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패역한 세대” 이 말은 굉장히 강한 말이어서 이런 말을 편안하고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사는 세대가 패역한 정신과 사고방식이 지배하는 세대이며, 이미 하나님을 향해서 바르게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굽은 마음과 정신이 지배하는 세대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패역해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거기서 구원을 얻으려는 마음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노아시대를 보면 이것이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 중에서 그 시대에 대해서 문제를 느끼는 사람은 노아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시대가 문제가 없는 시대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죄가 당연시되는 가장 악한 시대였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었고, 또 결국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 시대의 문제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의 정신이 패역해져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러한 하나님의 판단에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모두 자신이 이 세상에서 구별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면서도 그 세상을 다스리는 정신과 사고방식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여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굉장히 힘들어 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이 세상을 지배하는 사고방식이 얼마나 굽어져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심각하게 어긋나가고 있는지 그것을 확실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만약 노아처럼 자신이 사는 세대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는 영적인 분별력이 있다면 자신이 그 세대로부터 구원받아야 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그 시대의 시대정신과 사고방식 중에서 적어도 성경적이지 않고 신앙적이지 않은 것과는 결별을 선언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분명히 이렇게 질문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서 어떻게 살아?”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그럴까요? 이 시대를 살아가려면 이 시대가 요구하는 모든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을 다 받아들여야 할까요? 다 거기맞춰 살아가야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대개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것은 전혀 증명된 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렇게 생각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의 거의 대부분이 그런 이야기들과 그런 모습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모르게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두려움은 근거도 없는 것이고 증명된 적도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로부터 구원을 받으라”라고 말했을 때, 거기 모였던 사람들 전부가 다 이 말을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4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이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그 말을 받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하고 탄식 섞인 질문을 했지만, 베드로의 이 요구 앞에서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사람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어느 곳에서나 그 사회를 지배하는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을 거스른다는 것은 참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러면 도태될 것 같고, 따돌림을 받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럴 때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고 많은 경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로부터 구원을 받으라” 이 말을 받은 사람들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만이 참으로 회개한 사람으로써 회개한 삶을 살기로 결단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생각과 두려움대로라면 이제 이 사람들의 삶은 분명히 고통스러워져야 합니다. 따돌림을 받아야 하고 큰 불이익을 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랬을까요? 이들의 삶이 불행해졌을까요? 전혀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성경이 알려주는 ‘패역한 세대로 부터 구원을 받은’ 사람들, 그렇게 자신이 사는 세대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을 떠난 사람들의 모습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먼저 42절은 그렇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에 힘쓰더라” 우리 말 성경에는 기도하는 일에만 힘쓴 것으로 되어 있지만 원래대로 하면 여기 기록되어 있는 모든 것, 즉 사도들의 가르침과 성도와 삶을 나누는 교제와 성찬을 나누는 일과 기도에 헌신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44절 이하는 그것을 좀 더 자세히 기록합니다. 먼저 44절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이 구절은 먼저 이전의 삶을 회개하고 패역한 세대로 부터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경제생활이 어떻게 달라졌가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이 진짜 회개했다고 할 때, 그 사람의 회개를 가장 명확하고 확실하게 증명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의 지갑입니다. 참된 회개는 돈에 대한 그 사람의 태도를 바꿔놓게 되어 있습니다. 돈이란 그 어떤 것으로도 변할 수 있는 능력과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것을 가져다 주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건도 되고, 때로는 건강도 되고, 힘도 되고, 자존심도 되고 평안함도 됩니다. 편리함도 되고 심지어는 돈은 사람도 살 수 있고 그 사람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돈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매력적인 것인 동시에 가장 욕심을 내는 것이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경쟁하는 가장 강력한 적수가 됩니다. 그래서 이 돈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다는 것은 그가 이제는 참으로 하나님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삼고, 예수님께서 그를 위한 모든 것이 되어주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살게 되었음을 증명해 주는 가장 좋은 증거가 됩니다. 


    44절과 45절을 보면서 이것을 교회의 이상으로 삼고 자꾸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의 교회들과 성도들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을 다 팔아서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는 이런 상태가 되면 정말 좋겠지요. 그렇지만 이 구절들 속에는 그것보다 더 큰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돈에 욕심을 내고 돈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 돈이 나의 힘과 안전이 되어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또 만족을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물론 돈에게는 어느 정도 그런 능력이 있기도 합니다. 정말 결정적인 순간이나 제일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돈에 대한 욕심이 줄어들고 집착이 약해졌고 그래서 그것을 다른 이들을 위해서 내놓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그의 삶의 무게중심이 돈에서 돈이 아닌 다른 것으로 이동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 때 회개한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할 때, 억지로나 의무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혜택을 입은 사람들과 기쁘게 교제를 나눌 수가 없었을 테니까요. 사도들은 절대로 그렇게 하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믿으려면 전 재산을 다 팔아 내놓아야 한다. 내 것 네 것이 없이 모두 나눠 쓸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행동들은 그렇게 강요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런 힘든 일을, 사람이라면 누구나 꺼려할 수 밖에 없는 일들을 그렇게 자발적이고 기쁘게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이제 그들은 돈이 아니라 다른 것에 의지하며, 다른 것을 믿으며, 다른 것에서 만족을 얻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들이 일단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믿음으로 돌아서자 그들에게는 무엇으로도 흔들 수 없는 확신과 평안이 찾아왔고 만족이 생겨났습니다. 그 동안 그 무엇으로도 얻을 수 없었던 것을 한꺼번에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는 그들의 삶에서 별 의미가 없어진 것을 가장 의미있게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여러분은 이 구절 속에서 어떤 모습을 보십니까? 혹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비로소 하나가 된 행복한 식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강요된 것은 행복하고 기쁘지 않습니다. 이들이 그렇게 그 모든 벽을 허물고 모든 것을 나누었으면서도 서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나눔이 기쁘고 자발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은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죄를 해결받고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회개하고 패역한 세대로 부터 구원을 받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베드로의 요구를 받아들여 진심으로 하나님께로 돌이켰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도 힘든 과정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패역한 세대로 부터 돌아서자 그들에게 는 놀라운 복이 부어졌습니다. 그들은 자유와 넉넉함을 얻었고 또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참된 가족과 그 가족들과 함께 사는 행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그러면 이것이 전부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47절 뒤쪽을 보면 그 마지막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말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교회의 모습입니다.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할렐루야! 그들은 패역한 세대를 떠났습니다. 그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을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려하던 것과는 반대의 일이 벌어집니다. 왕따가 되고 핍박을 받게 된 것이 아니라 온 백성에게 칭찬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칭찬의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더해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대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을 떠나서 하나님께로 갈 때, 우리의 삶이 불행해질 것이라는 생각은 정말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의 경우를 생각해 보아도 이것은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요즘 기독교가 욕을 먹고 천덕꾸러기가 되어 있는데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회개했기 때문인가요? 우리가 세상의 정신과 삶의 방식을 따라가지 않고 있기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교회가 그리고 성도들이 이 패역한 세대를 따라가고 있고, 어느 면에서는 앞장서기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패역한 세대를 따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대안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패역한 세대를 거슬러 다르게 살면서도 행복하고 당당하게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예를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에게서 참된 회개의 열매가 맺혀지기 시작한다면 그들은 우리를 칭찬하게 될 것입니다. 입을 모아 칭찬하고 우리에게로 와서 우리와 함께 하려고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회개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게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 패역한 세대로 부터 구원을 받아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면서도 사람들의 칭찬까지 받는 그런 사람들이 되게 하는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회개하고 이 세대로부터 돌아서는 것이 힘들고 손해만 보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 그래서 회개를 거부하게 만드는 것은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회개는 선물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은혜입니다. 우리를 행복하고 자유롭게 하려고, 또 믿지 않는 사람들을 참된 길로 인도하게 하려고 부어주시는 가장 큰 복입니다. 우리는 이 복을 놓쳐셔는 안됩니다. 


    우리 모두 이 패역한 세대로 부터 확실하게 구원을 받아서 자유롭고 능력있게 살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는 복을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