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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07.02.새벽예배 -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세기10)


창0204to07-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10) (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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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 : 창세기 2장 4-9절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이 두 구절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평가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도 ‘심히’ 좋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 하나 만들어 놓으신 모든 피조물이 어울려서 만들어 내는 질서와 조화는 완벽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도 나무랄데 없이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가 하나님께서 온 세상과 그 안의 모든 것들을 만드신 일에 대한 큰 그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망원경으로 조망해 본 그림이자 또한 큰 설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의 모든 창조가 끝났다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 한 후에 다시 한 번 창조이야기를 반복합니다. 그것도 어찌보면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말입니다. 이렇게 서로 달라보이는 창조이야기가 성경에 두 개 나오기 때문에 성도들 뿐만 아니라 학자들도 오랫동안 굉장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런 것을 증거로 들이대면서 성경이 인간이 이런 저런 자료를 종합하여 만든 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까지 나왔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두 이야기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같은 사건인데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 나오는 창조이야기는 창조를 멀리서 망원경으로 바라본 것이라면, 두 번째 창조이야기는 한 가지를 집중적으로 가까이서, 그러니까 비유를 하자면 현미경으로 들여다 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관찰대상이 되는 것은 바로 인간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포함한 2장 17절까지의 이야기는 그러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 중에서도 인간의 타락에 대한 이야기의 서막 역할을 하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는 과연 인간이 과연 어떻게 지음받아 하나님의 형상이 되었는지, 그리고 그 인간이 처음 살았던 환경은 어떤 환경이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맺었던 깨뜨려서는 안되었던 언약은 무엇이었는지 하는 내용들이 들어있습니다. 연극으로 표현하면 2장 4절 부터는 2막이 시작된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2막의 주제는 인간의 타락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2장 4절부터 나오는 이야기는 연극으로 표현하면 웅대하고 아름다운 서막이 끝나고 이제 비극이 시작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처음 보여주는 모습은 이 세상에 인간이 만들어지기 전의 땅, 그러니까 지표면의 모습입니다. 5절은 그 때는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자라지 않았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서 지면을 적셨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식물을 만드신 것은 셋째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만드신 것은 여섯째 날이었습니다. 1장의 기록에 따르면 식물이 사람보다 먼저 지어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직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들에는 초목이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자라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두 이야기의 차례가 맞질 않습니다. 이것은 사실 창세기 1장과 창세기 2장을 서로 다른 전설의 기록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 메세지와는 크게 상관이 없지만 말씀드리면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이 문제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잠시 1장 11절과 2장 5절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무슨 차이점이 보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세째날 창조된 것은 씨를 가진 채소와 과일나무였습니다. 그렇지만 2장 5절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그냥 초목과 채소입니다. 씨가 있고 없고가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씨가 없으면 스스로 후손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경작을 해야 그 경작을 통해서 번식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째날에 만든 식물들은 자생력과 스스로 번식능력이 있는 식물들이라면 2장 5절이 말하는 것은 그런 능력이 없는 반드시 인간의 경작을 필요로 하는 식물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손길이 반드시 필요한 식물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후에 땅에서 자라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의 세심하시고 완전하신 일하심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없는 동안 사람들의 손길이 꼭 필요한 식물들은 땅 속에 아직은 발아되지 않은 생명으로, 가능성으로만 묻혀있었습니다. 땅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식물들을 낼 준비를 하며 사람들이 땅에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던 것입니다. 풀 하나 세상에 내시고 초목하나 탄생하게 하시는 것도 이렇게 세심하게 계획하시고 차례에 따라 행하셨다면 하나님의 백성이요 또 자녀인 우리들의 삶을 위해서는 어떻게 일하실까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어떻게 돌보고 또 섭리하고 계신다고 생각하고 또 믿어야 할까요? 때로 우리 삶에는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의 삶을 빈틈없이 돌보고 계시는가 하는 질문이 생기게 하는 일들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때도 하나님이 여전히 나의 삶을 완전히 돌보고 인도하신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씨도 없는 풀 한 포기 보다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우리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구원하신 우리들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들에 핀 백합화보다 훨씬 더 귀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이 의심되실 때마다 씨없는 풀과 초목들을 떠올리시고 그것들이 어떻게 이 세상에 있게 되었는지를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를 믿는 믿음을 회복하는 치료제로 사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런 것들은 우리의 육신의 양식이 되어줄 뿐 아니라, 우리의 영혼의 회복을 위해서도 없어서 안될 역할을 해 줄 것입니다. 


    이제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1장을 보면 삼위 하나님께서 삼위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자고 의논하시고 합의하신 후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셨다고 말하고 있는데, 7절은 그렇게 사람을 만드신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먼저 7절은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의 재료는 흙, 땅에 흩어져 있는 티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들을 모으셔서 도공이 도자기를 만들듯이 사람을 빗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사람은 아직 온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흙을 빗어 사람을 만드신 후, 그 다음 그 코에 생기, 그러니까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을 때,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고, 살아있는 영이 되었고, 살아있는 숨결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숨결을 불어넣지 않으신 식물과 동물 또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2장 7절이 말하는 인간의 생명은 그런 생명과는 다른 생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은 식물이나 짐승들이 살아있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살아있음이 없을 때, 인간은 겉으로 보기에는 생명을 가지고 있어도 이미 흙과 티끌에 불과합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사람으로 살아있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눠주신 생명의 숨결입니다. 그렇다면 이 생명의 숨결은 무엇이었을까요? 요한복음 20장 22절을 보면,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부활하신 예수님, 성자 하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숨을 내쉬셨습니다. 하나님의 숨결을 나눠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성령을 받으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직 ‘생령’이 아닌 사람에게 나눠주신 생명의 숨결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님’입니다.  


    인간을 참된 인간이게 하는 것, 그리고 그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살아있게 하는 것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코에 불어넣어주신 성령님이십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사람에게서 사람의 참 생명인 성령님을 떠나가게 했고, 그래서 인간은 그 이후로 참된 생명없이 살아가는, 실제로 하나님 앞에서는 죽은 존재로 살아가는 상태가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참 사람이 되려면 그 사람은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진짜 사는 것처럼 살아가려면 그 사람은 성령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참으로 살아있는 존재가 되게 해 주시기 위해서 태초에 나눠주셨던 생명의 숨결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처음 기록부터 우리가 왜 성령충만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처음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 대로의 ‘생령’ 그러니까 참으로 살아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온전한 섭리와 인도하심을 믿으며 사시기 바랍니다. 항상 성령충만을 위해서 기도하시며 더욱 더 우리의 생명의 숨결인 성령님으로 채워져 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 안에서 점점 더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가심으로써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래 허락하셨던 풍성하고 온전한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