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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3.07.05.금요기도회 -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사도행전 20)


행0311to16 -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사도행전2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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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3장 11-16절


40년 동안 단 한 번도 일어서 보거나 걸어본 적이 없었던 사람이 자신을 걷게 해 준 사람에게 큰 감사를 느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었던 장애 때문에 성전 미문에서 구걸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었던 걸인은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 덕분에 걸을 수 있게 되었고, 뛸 수 있게 되었으며, 이제는 성전을 성전답게 드나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에게 느꼈던 고마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그저 그렇게 자신을 고쳐주고 늘 하던대로 기도를 하려고 들어가는 두 사람을 계속해서 쫓아갑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듯이 그렇게 따랐습니다. 


이 모습을 목격한 유대인들은 말 그대로 난리가 났습니다. 두 사람을 쫓아가는 사람이 조금전까지만 해도 성전 미문 앞에서 자기들에게 손을 벌려 푼돈을 청하던, 태어나면서부터 단 한 번도 일어선 적이 없다던 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너무나 놀랐고 그래서 그 일을 일으킨 두 사람 베드로와 요한을 마치 하나님 쳐다보듯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들 중에 있었고 그 사람과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고 있다면 우리라고 해서 다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을 밀치다 시피해서 그래도 성전에서 가장 넓은 곳인 솔로몬의 행각으로 데리고 갔던 것 같습니다. 이 행각은 주로 율법선생들의 가르침이 행해진 장소이기도 했으니까 무언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에는 가장 익숙하고 또 어울리는 장소이기도 했을 것이구요.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두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위대한 가르침을 기다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마치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라도 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는 전혀 뜻 밖의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에게 주목하느냐?” 놀라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일으킨 사람이 두 사람이니 두 사람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구요. 오히려 그렇지 않으면 더 이상하죠. 그러나 두 사람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사람들의 당연한 반응을 이상하게 여기면서 반문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만약 우리가 그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굉장히 어리둥절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놀라운 일을 보면서 놀라는 것인데, 왜 놀라고 묻다니 말입니다. 베드로가 거기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는 것은 적어도 두 사람에게 이 일은 너무나 당연히 일어날 수 있고 또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에게는 그런 일들이 그렇게 여겨질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나머지 유대인들에게는 놀라운 일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오히려 놀라는 것이 더 이상하다는 듯이 반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생각하기에는 자신들 뿐만 아니라 거기 모인 유대인들에게도 그 일은 당연하게 여겨져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베드로는 거기 모인 사람들을 향해서 흔히 사용하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형제들아!’라거나 ‘부형들아!’라거나 혹은 아주 흔하게 ‘여러분!’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대신 ‘이스라엘 사람들아!’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아주 특별한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유대인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르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부르는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반문은 이런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물론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또 성령충만함을 받은 이후였지만 이제 베드로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하나님의 참된 백성들에게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믿음의 세계가 그렇습니다. 알고 경험한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너무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 그것이 신앙의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특징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면 원래 신앙의 세계 안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하고 놀라운 일, 그리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신앙이 가져다 주는 기본적인 복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늘나라 이야기만 나오면 흥분하고 기뻐합니다. 이 땅에서 하늘의 평강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것 때문에 살아간다고 할만큼 생생한 소망이며 또 가장 큰 복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똑같이 예수를 믿어도 어떤 사람에게는 하늘나라는 전혀 관심없는 나라입니다. 땅이 전부인 줄 알고 거기 매여 살아갑니다. 하늘나라 이야기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그저 죽으면 가게 되는 낙원쯤으로만 생각될 뿐입니다.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이것이 베드로의 두 번째 질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보았습니다. 유대인들도 이미 보았습니다. 베드로가 미문에 앉아있던 그 사람, 40년동안 앉아만 있었던 그 사람의 손을 잡아 일으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누가 했습니까? 베드로가 했습니다.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했고,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경건과 권능이 그런 일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자신들을 바라보아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배우게 됩니다. 하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종들이 일으키는 변화들이나 혹은 드러내는 능력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그 동안의 저의 기도가 조금은 잘못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도행전 설교를 시작하면서부터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성령님의 권능을 구했습니다. “성령의 권능을 주옵소서. 성령의 권능을 주옵소서.”하고 말입니다. 성령님의 권능은 설교자와 목회자에게에는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이게 없으면 제대로 열매맺는 사역을 할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그 동안 성령님의 권능을, 아니라고 하면서도, 자꾸 제가 소유할 수 있는 것쯤으로, 하나님이 나에게 양도해 주실 수 있는 것쯤으로 생각했던 것습니다. 본문이 저에게 성령님의 권능에 대한 올바른 생각과 태도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성령님의 권능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신다고 해서 그게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를 통해 드러나는 것 뿐입니다. 베드로는 저에게 그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 주었고, 만약 하나님께서 성령님의 권능을 허락해 주신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교만해지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성령님의 권능을 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주실 때까지 끈질기게 기도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항상 기억하고 고백할 것입니다. 주신다고 내 것이 아니고, 그저 나를 통해 드러나게 되는 것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병자가 고침을 받은 것이 자기들의 능력이나 혹은 경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 베드로는 곧 바로 사람들의 관심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렸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것이 베드로가 밝혀준 그 사건의 의미였습니다. 그 일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신 사건,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님을 메시야로 증명해 보인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만약 예전의 베드로, 성령충만함을 입기 전의 베드로라면 자신에게 집중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반응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전히 그렇게 나서기 좋아하고 앞서기 좋아했던 베드로로 남아있었다면 그는 그 모든 영광을 자신이 취해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미 성령충만해 있었고, 성령님께서는 베드로를 자기 중심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 되게 했습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석하고 모든 것을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도구,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게 하는 도구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충만함을 생각할 때, 우리는 자꾸 성령충만함이 만들어 내는 놀라운 일들이나 능력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물론 성령님은 놀랍게 일하십니다. 성령님이 아니시라면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 성령충만하게 되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임하실 때 일어나는 가장 놀라운 사건은 그 사람이 예수님 중심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며,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려고 애를 쓰게되고... 이것이 성령충만함이 우리 영혼 안에서 만들어 내는 가장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성령충만함의 진짜 능력이 나타납니다. 이전에는 나만 생각했습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과 환경만 생각했습니다. 지혜로워 보이지만 이것은 결국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환경에 묶여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령충만하면 예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점점 더 예수님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자신에게서 놓여납니다. 이기심과 욕심, 그리고 교만함을 벗어버리게 됩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무능함이나 열등감까지도 넘어서게 됩니다. 그렇게 나에게서 놓여나서 예수님께 묶이게 됩니다. 그래서 내 안에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유대인들이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죽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 이제 유대인들은 베드로가 전하는 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와 그가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킨 사람이 그들의 눈 앞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다보면, 그 영화의 마지막에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그 이후에 이 이야기는 이렇게 저렇게 되었습니다”라는 자막이 올라갈 때까 있습니다. 그러면 극장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옵니다. “아, 그랬구나!”하고 말입니다. 실화라는 단어 하나가 떴을 뿐이지만 감동은 몇 배가 되고, 괜해 나오지 않던 눈물이 갑자기 흐르기도 합니다. 실화는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때로는 간증이 한 편의 설교보다 더 큰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눈 앞에 확실한 증거가 있을 때 사람들의 마음은 더 쉽게, 그리고 더 확실하게 움직이게 됩니다. 말씀의 능력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만, 거기에 실제적인 증거가 더해지면 그 영향력은 정말 엄청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한 베드로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하게 낫게 하였느니라” 우리는 이 구절 속에서 그 걸인이 베드로의 손을 잡았을 때, 그 사람에게는 이미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믿음은 언제 생긴 것일까요? 그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놀랍게도 그 사람이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보고 있는 것과 같이 완전히 고침을 받는 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가지는 능력이고 또 신비입니다. 때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들려지는 예수라는 이름 한 마디만으로도 예수님은 그 사람 안에 믿음을 만들어 낼 수 있고, 또 그 사람에게 그 믿음으로 인한 놀라운 변화와 회복이 일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회복된 사람, 예수를 믿고 변화된 사람. 세상에 이것보다 더 명확한 복음에 대한 증거는 없을 것입니다. 특히 그저 듣는 것만으로는 움직이지 않을만큼 마음이 굳어진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능력있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고침을 받고 그들 앞에 서 있는 그 사람보다 예수가 구원자이시며, 그래서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더 강력한 메세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결국 4장 4절을 보면 이 날 베드로의 이야기를 듣고 예수를 믿게된 사람들이 5천 명이나 되었다고 말합니다. 오순절날 예수믿는 사람들보다 2천명이나 많습니다. 이것은 성령충만함 가운데 철저히 예수님 중심이 된 두 사람의 사도와 그들이 전해준 예수를 믿고서 치료불가능한 병을 완전하게 치료받은 한 사람을 통해 이루어진 위대한 일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 했습니다. 변화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증인들입니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 복음이 자리잡고 있지만 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또한 그 메세지를 담는 그릇으로써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복음을 통한 변화를 일구어 내는 증인들이 될 수 있을까요? 성령충만함을 입어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 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 되어서 자기 자신을 넘어서기 시작한 사람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온전하게 변화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주변의 환경이나 조건이 아닙니다. 바로 나 자신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그 믿음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변화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새로워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중심의 사람이 되시고, 예수님 때문에 회복된 인생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내 삶이 증거가 될 것입니다. 나의 회복과 변화가 예수님의 증거하여 예수믿는 자들이 더해지게 하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변화시키시고 치유하셔서 주님을 위한 좋은 증인이 되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