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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3.07.19.금요기도회 -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나니(사도행전 22)



행0401to12 -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나니(사도행전2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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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설교는 꼭 한 번 귀한 시간을 내셔서 들어주십시오. 잘 한 설교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저 들려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본문 : 사도행전 4장 1-12절



제자들이 나면서부터 40년 동안 일어서 본 적도 없는 사람을 고치고, 복음을 전파하자 사람들은 그야 말로 열광했습니다. 몇 시간 동안 복음을 전한 일로 예수님을 믿게된 사람들이 남자만 5천명이 넘었습니다. 이것은 오순절날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였습니다.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은 이미 오순절 사건으로 인해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넓게 퍼졌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직접 그 걸인이 그렇게 일어나서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모두가 다 보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인이 일어났고, 그렇다면 나사렛 예수가 부활하였으며,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시라는 베드로와 요한의 말은 절대로 거짓말일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인 죄를 용서받을 수 있고 또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니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전한 복음에 열광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최소 8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회심했습니다. 또 예수님의 이름으로,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증명해 줄 엄청난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상상해 본다면 어떤 그림이 나올까요? 아마 이런 그림이 될 것입니다. 이제 복음은 파죽지세로 전해집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과 성도들은 승승장구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예루살렘이라는 도시 전체가 복음화 됩니다. 이미 벌어진 일들을 생각해 보면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는 진리의 빛이 비춰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냥 생각할 때는 진리는 누구나 다 좋아하고 누구나 다 반길 것 같습니다. 진리니까요. 그러나, 막상 진리가 밝히 드러나게 되면 그와는 반대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 진리를 거부하고 또 할 수 있으면 그 진리를 말하는 입을 막으려는 사람들이 꼭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진리를 믿고 또 그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살아가려고 할 때, 장미빛 꿈을 꾸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바른 길을 가는 것처럼 그렇지 않은 길을 가는 사람들도 있게 마련이고 그런 사람들은 언제든지 나의 길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병자를 고치고 부활의 복음을 전하자 그것을 몹시 싫어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들과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원래 이들은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들을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었고 사두개인들은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부활 이야기만 나오면 이들은 항상 날카롭게 대립하며 논쟁을 벌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날은 이들이 한통속이 됩니다. 사두개인들이야 원래 자기 입장을 고수하느라고 예수님의 부활이 선포되는 것을 싫어한 것이지만,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들은 그렇게 부활했다고 선포되고 있는 사람이 자신들이 작당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한통속이 되어서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들였습니다. 이들은 다음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더 모여든 후에 회의를 소집하고 그 가운데 베드로와 요한을 세웠습니다. 이 모임은 산헤드린 공회라고 불리는 모임인데요, 요즘으로 하면 국회가 소집된 것이고, 모든 종교지도자들도 함께 모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베드로와 요한을 대상으로 청문회가 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들이 이만큼 신경써야 할만큼 커다란 위협이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공회의 누군가가 으름장을 놓으며 이렇게 묻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것은 공회의 심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조폭의 협박같습니다. “너 누구 맘대로 내 구역에 와서 설치냐?”라는 말처럼 진실을 밝히기 보다는 이들을 겁주고 협박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질문에 대해서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대답은 정말 여러가지 면에서 기가 막히는 대답이었습니다. 우선 베드로는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라고 운을 뗍니다. 공회는 똑같은 일로 두 사람을 죄인취급하며 협박하려 들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것은 결코 심문받을 일도, 협박받을만한 잘못도 아닌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건 누가 보아도 그렇습니다. 평생 일어나 보지도 못하는 사람을 뛰어다니게 만들었다면 그것은 전정말 칭찬받을 일입니다.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이라는 말은 자신들이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는 말인 동시에 오히려 공회의 부당함을 고발하는 말이었습니다. 그 말을 통해 공회가 지금 착한 일로 자신들을 재판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것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지만 그 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을 향한 당당한 복음선포이기도 했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공회가 자신들을 고발하기위해 사용하려고 했던 그 걸인을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며 또 구원자되신다는 것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로 제시하면서 복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당당하게 거기 모인 사람들이 회개해야할 죄까지 지적하면서 말입니다. 


베드로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갑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써 집 모퉁이 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음이라” 베드로의 말은 회의장 안에 던져진 폭탄과 같은 말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미 고침받은 걸인은 예수님께서 메시야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확고한 증거로 제시되었기 때문에 그 파괴력은 더 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말한 것은 시편 118편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한 것인데요. 이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유대의 집 짓는 습관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집을 지을 때, 기둥 네 개를 한 꺼번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우선 네 귀퉁이 중에서 하나를 택하고 거기 주춧돌을 놓고 거기서 부터 옆으로 퍼져가면서 부터 집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그 주춧돌을 모퉁이 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집 한 채에는 모퉁이 돌이라고 불리는 것이 하나 밖에 없습니다. 


건축자들이 쓸모없다고 여겨서 돌 하나를 멀리 던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 버려진 돌이 성전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것과 똑같은 일이 예수님과 유대의 지도자들 사이에 일어났다고 설명합니다. 베드로는 너희들이 예수님을 쓸모없는 돌처럼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예수를 하늘나라의 모퉁이 돌이 되게하셨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집이 한 채라면 모퉁이돌도 하나 밖에 없습니다. 하늘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나라가 하나 밖에 없다면 그 나라의 모퉁이 돌 또한 하나 밖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라고 담대하고 확실하게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나 밖에 없는 하늘나라의 모퉁이돌이시니까요. 


우리가 운전을 해서 가다가 앞에 있는 경찰을 보면, 안전띠도 잘 매고 있고, 규정속도도 잘 지키고, 신호까지 잘 지키고 있어도 괜히 뜨끔하면서 심장이 뛰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상하게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그건 어쩌면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복종해야 할 힘 앞에서는 주눅이 들게 마련이니까요. 그 날 베드로와 요한은 이스라엘의 모든 권력이 모인 곳의 한 가운데, 그것도 모두가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사람들만 있는 그 곳에 서 있었습니다. 그 사실만으로도 기가 죽고 비굴해 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일을 했으니 더더욱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너무도 당당하고 자유로웠습니다. 마치 지금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거리낄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저는 베드로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과연 우리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세상에 대해서, 그리고 사람들에 대해서 기가 죽고 주눅이 드는 것이 합당한 모습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사실 살아가면서 우리를 주눅들게 하고 눈치보게 하는 수많은 것들을 만나게 됩니다. 많이 가진 사람들, 힘있는 사람들, 잘 생긴 사람들, 능력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적인 가치관과 사고방식 등.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우리는 자꾸 그런 것들의 눈치를 보게 되고 그 앞에서 기가 죽습니다. 또 굳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저 스스로 부족함과 연약함을 생각하면서 괜히 힘들어 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을 어쩔 수 없는 것, 그리고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과연 예수믿는 우리가 기죽고 눈치보면서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를 묻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우리가 사람들 틈에서, 그리고 그들의 사고방식 속에서 그렇게 사는 것이 어쩔 수 없는 것인지를 묻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 믿는 우리가 세속적인 이유 때문에 기가 죽고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틀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서 눈치보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그저 예수를 믿기 전과 하나도 달라지는 것이 하나도 없고, 또 새롭게 얻게 되는 것이 없다면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면 우리에게는 그 이전에는 없었던 아주 새로운 것들이 생겨납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우리가 세상을 향해서 담대할 수 있는 이유가 되어줍니다. 당당함이 되어주고,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부요함이 되어 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것들을 제대로 붙들 때, 우리는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반대를 만나고 심지어는 손해를 입더라도 그것 때문에 용기를 잃고 힘들어 하면서 살아갈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우리가 신앙 안에서 새롭게 얻을 수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두 가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공회원의 질문을 받고 대답하기 시작할 때의 베드로의 상태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충만하여...” 이것이 베드로가 이전의 베드로가 아닐 수 있었던 첫번째 이유이고 원인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자신에게 속한 사람도, 그리고 이 세상에 속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미 성령님으로 가득 채워진 성령의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성령충만한 사람들은 변죽을 울리지 않습니다. 본질적이지 않은 것을 붙들고 목숨걸지 않습니다. 곧바로 본질로 나아가고 핵심으로 나아갑니다. 베드로의 이야기는 무척 지혜로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재간에 의존해 있지 않습니다. 어떤 분들을 만나 이야기를 해 보면 머리는 참 좋은 것 같은데, 지혜롭다고는 여겨지지 않습니다. 말은 잘 하는데, 통찰력이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지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지혜에서 나오는 말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지혜에서 나오는 말은 항상 통찰력이 있는 말이 됩니다. 본질을 꿰뚫는 말이 됩니다. 그것은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꿰뚫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말이 그렇게 지혜로웠던 이유는 그가 자신의 머리나 말재주가 아니라 성령님께 의지하여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지혜가 성령님으로부터 나왔다면 그의 담대함과 당당함은 그가 가지고 있는 확신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도 보았고, 부활하신 예수님께 40일 동안이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약속대로 성령충만함을 덧입었고, 복음을 전해 하루 저녁에 3천명을 회개하게 했고, 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40년 동안 단 한 번도 일어선 적이 없었던 사람을 일으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시라는 누구도 흔들 수 없는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무척 배타적으로 들립니다. 너무 외곬수입니다. 이 세상에 믿고서 구원을 얻을만한 이름이 예수라는 이름 밖에 없다니 너무 고집스럽고 답답합니다. 그렇지만 복음은 그렇기 때문에 복음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단 하나 밖에 없어서 다른 어떤 것으로도 할 수 없는 그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예수의 이름 밖에도 구원이 있다면, 우리가 굳이 왜 예수를 믿어야만 합니까? 그리고 그런 예수를 믿을 때,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확신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는게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유일하지 않다는 것은 그런 것이 얼마든지 더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심지어는 아무 것도 믿지 않는 것도 구원의 길이 된다고 주장한다고 해도 그것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어차피 이것 저것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구원을 얻는 것과 구원을 얻지 않는 것은 같아져 버리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 밖에도 구원이 있다면 믿음은 아무런 소용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늘나라의 하나 밖에 없는 모퉁이 돌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예수님만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단 하나 밖에 없는 구원자를 붙드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성도의 담대함은 자신의 능력이나 지혜나 혹은 소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내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단 하나의 구원의 길이신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확신이 있을 때, 비로소 세상이 알 수 없는 담대함을 가지게 됩니다.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제 나는 세상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세상의 눈치 보면서 살아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제 나는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눈치만 보면 된다는 뜻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려움을 두려워하면서 피하려고는 하지만, 신앙 때문에 만나는 어려움들과 싸워 이기는 데는 별로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 우리에게 큰 힘과 능력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믿는 자로서 우리가 두려워 해야 할 것은 신앙때문에 만나게 되는 어려움과 장애물 자체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런 어려움과 장애물을 넘어갈 수 있는 지혜와 담대함도 없이 그런 일들을 맞닥뜨리는 상황이 되는 것, 바로 그것을 두려워 해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병자를 고치고 복음을 전하다가 공회에 붙들려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그들은 당황하거나 주눅들지 않고 성령님의 지혜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주는 담대함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먼저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성령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충만할 때, 성령님은 우리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그 상황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주시고 곧바로 문제의 중심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주십니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단단히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온 세상의 유일한 주인이시고 구원자이심을 믿고, 나는 이제 이전처럼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단단히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이 두 가지가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건 분명하고 담대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꼭 성령충만한 은혜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은혜 가운데서 한 분 밖에 없는 구원자, 모든 것의 주인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단단히 붙드시기 바랍니다. 내가 한늘나라의 하나 밖에 없는 모퉁이돌을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항상 성령님의 지혜와 믿음이 주는 담대함으로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능력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