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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3.08.02.금요기도회 - 무리가 다 성령충만하여(사도행전 24)



행0426to31 - 무리가 다 성령충만하여(사도행전2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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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4장 25-31절


제가 전에 제 차를 운전해 가는데, 차에 함께 타고 있던 지인 한 사람이 차창 밖을 내다 보다가 “와, 지금 대낮인데 왜 이렇게 어두워요. 날씨가 갑자기 흐려졌나 보네요.”라고 하길래, 그저 슬쩍 창문을 내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함께 깔깔대고 웃었습니다. 저희가 왜 함께 웃었을까요? 그 사람은 자신이 착각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웃었고, 저는 저도 예전에 그런 착각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웃었습니다. 그 착각은 자동차 유리에 붙어있는 선팅때문에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제 차의 선팅이 많이 어둡게 되어 있기 때문에 차 밖의 날씨가 흐리다고 잘못 판단했던 것입니다. 내려진 차창 밖에서는 오해하지 말라는 듯이 햇빛이 쨍하니 내리쬐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모든 일들을 이런 저런 안경을 쓰고 봅니다. 그리고 그 안경을 통해 보이는 것을 그 일의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일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 내가 쓰고 있는 안경을 통해서 나에게 보여진 그 일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안경을 쓰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해 집니다. 그 안경에 따라 같은 일도 보이는 모습이 다르고, 그러면 그것에 대한 해석과 답이 달라지고 그래서 우리의 삶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회에 잡혔던 베드로와 요한은 무사히 풀려났습니다. 풀려난 두 사람은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그 동안 있었던 일들을 보고하고, 특히 공회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고 하는 금지령을 내렸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이것은 한 쪽에서 보면 기쁜 승리의 소식이었습니다. 붙들렸던 사람들이 당당하게 맞서고서도 무사히 풀려났으니까요. 그렇지만 이것은 굉장히 어두운 소식이었고 또 교회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습니다. 이제 공식적으로 교회와 복음에 대한 핍박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두 사람이 풀려난 것을 기뻐하면서도 그 일이 가지는 심각성을 잘 파악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두 사람의 보고에 대해서 교회가 보였던 반응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교회의 반응은 아주 바람직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위기를 만나는 교회와 성도들이 꼭 배워야 할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향해 도전해 오는 현실의 문제와 위기들을 뚫고 나갈 수 있는 비결이 이 속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두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교회는 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되는 집안과 안되는 집안, 되는 교회와 안되는 교회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어려움과 도전을 만났을 때, 그 집안, 그 교회가 하나가 되느냐 아니면 갈등과 책임전가로 나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어려움이 생기면 사람들이 서로 갈등하고 분열이 생기는 것은 어느 정도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대개 그런 모습을 보이게 되니까요. 그렇지만 그런 경우가 더 많다고 해서 그것이 당연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지난 번에 어떤 공직자가 해외 출장을 다녀오면서 규정 이상의 비용을 지출했다가 적발되어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었는데, 그 일보다도 더 우리를 더 실망시켰던 것은 그 사람은 그렇게 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하는 ‘관례’이고 그래서 전혀 문제가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00중의 99가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해도 바람직하지 않은 것은 여전히 바람직하지 않은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드문 일이라고 해도 그것이 바람직한 일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바람직한 것이라고 평가해야 하며, 우리도 그렇게 하려고 애써야 하비다. 되는 집안, 되는 교회, 되는 나라는 어려움이 닥쳐오면 오히려 하나가 됩니다. 한 마음이 됩니다. 서로 다투고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느라 사분오열하지 않고 오히려 더 하나가 됩니다. 100중의 99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그게 되는 집안, 되는 교회, 그리고 되는 나라의 모습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루살렘 교회는 되는 교회였습니다. 어려움 때문에 더 한마음이 되었던 아주 드물지만 그래서 그만큼 더 바람직한 교회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그렇게 하나로 묶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그 엄청난 도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한 마음이 되게 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하나로 묶는 끈이 되셨던 것입니다. 신약성경이 교회의 한마음과 하나됨을 이야기할 때, 언제나 그 기초에 놓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기에 하나가 될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삼을 때, 그런 성도들이 많아질 때, 그 교회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겪게되는 모든 일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보게 될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지금껏 거의 이런 연습이 없이 신앙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지면 그냥 개인적인 기준과 감정으로 판단합니다. 한국 교회가 분열이 심한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연습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연습은 생각보다 굉장히 간단합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면, 어떤 것을 선택하기 전에 “이 일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생각하실까? 이 일을 통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를 고민하고 그 답을 찾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그 질문을 하고 서로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되게 마음을 나눈다면, 그 교회는 외부의 도전이나 어려움 때문에 와해되고 흩어지는 대신 더 견고한 하나가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런 교회로 세워져 가기를 축원합니다. 


두번째로 이들은 상황의 어려움을 보는 대신에 그 상황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생각했고, 그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이들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대주재!’ 이것이 이들이 아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모든 것과 모든 일의 주인이시고 주관자이신 큰 왕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온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만드신 전능하신 분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자기들의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시고 자기들은 지금 그런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그런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또 찬양합니다. 우리가 어려움과 힘든 일을 만날 때,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 분이신가를 기억하고 거기에 우리의 믿음을 다시 묶어 놓는 일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크기에 따라 우리의 반응과 태도는 달라집니다. 정말 하나님을 대 주재이시고 온 세상과 모든 만물들을 만드신 전능하신 분으로 믿는다면, 아무리 크고 어려운 시험이 닥쳐와도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평안하게 흔들림 없이 거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어려움을 만났을 때 쉽게 흔들리고 낙심하는 것은 물론 그가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하나님을 너무 작은 분으로 생각하고 또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자신의 상황보다 작은 분으로 생각하니까 쉽게 상황에 흔들리고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네덜란드의 유명한 정치가이고 목회자고 또 신학자였던 아브라함 카이퍼라는 분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온 우주에 하나님의 다스림이 미치지 않는 곳은 단 한 뼘도 없다” 한 번 함께 따라해 보겠습니다. “온 우주에, 하나님의 다스림이 미치지 않는 곳은, 단 한 뼘도 없다.” 믿습니까? 하나님은 대주재이십니다. 온 우주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다스리시는 주관자이시며 왕이십니다. 그리고 온 세상과 모든 것을 그 능력으로 만드신 전능자이십니다. 온 우주에 하나님의 다스림이 미치지 않는 곳은 단 한 뼘도 없습니다. 내 인생도, 내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도, 우리 교회도, 우리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도, 이 나라와 이 나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도 하나님의 눈과 손 밖에 있는 일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 분은 절대로 단 한 뼘도 놓치지 않으십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정말로 믿는다면, 우리는 어려움과 도전을 만날 때, 그 누구와 상의하고 또 방법을 찾는 대신에 하나님께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보다 근심하고 걱정하기를 먼저하며, 인간적인 방법을 먼저 찾게 되는 것은 우리가 정작 우리가 믿는다고 말하는 그 하나님을 잘 모르고 또 제대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꾸 하나님을 나보다도 작고 무능한 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온 우주에서 단 한 뼘도 놓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여러분의 감정과 생각을 묶어놓으시기 바랍니다. 


세번째로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틀을 통해서 현실을 바라보았습니다.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이것이 그 뒤에 이어진 기도였고 그 다음에는 예수님이 핍박당하고 또 죽으신 일과 자신들을 향한 위협을 말씀드리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이 모든 내용을 합쳐보면 이런 내용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다윗을 통해서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가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종 예수를 거스를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은 인간 편에서 보면 불의한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가장 악한 일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약속하신 것이 이루어진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증명하신 일이 됩니다. 그리고, 지금 제자들과 교회가 당하는 협박과 그 뒤에 이어질 핍박은 예수님의 고난과 똑같은 종류의 어려움이 됩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당황스럽고 두려운 불청객이 아니라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었던 것, 그래서 찾아오게 되어 있었던 것이 현실로 나타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가 당할 핍박은 또 다시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일이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앞섭니까 아니면 인간의 상황이나 우리의 현실이 앞섭니까?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앞섭니다.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과 고통들은 이미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시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바라보고 해석하며 또 이겨낼 수 있는 방법들을 성경에 충분히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당장 필요없다고 생각되는 말씀에는 별로 큰 관심을 가지지 못하지만 그것은 우리 영혼을 생각한다면 꼭 버려야 할 나쁜 습관입니다. 물론 우리가 평상시에 만나는 말씀들은 그 당시에 꼭 필요한 말씀을 때도 많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적절한 말씀을 그렇게 적절한 타이밍에 만나게 하시는지 참 기가 막힐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말씀들은 미리 우리의 영적인 체질을 개선하고, 체력을 강하게 하며 또 예방주사의 역할을 하게 하시기 위해서 주시는 것들입니다. 제자들이 위에 나오는 시편 2편의 말씀을 알고 기억해 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요? 굉장히 낙심했을 것입니다. 우왕좌왕 당황했을 것입니다. 온통 두려운 감정과 혼란스러운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베드로와 요한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이미 알고 있었던 시편 2편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깨달았습니다. 자신들에게 찾아온 어려움이 이미 예견되어 있었던, 하나님이 미리 말씀해 주셨고, 예수님께서도 이미 경험하셨던 어려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예고 없이 날아오는 공은 피할 수기 힘듭니다. 그렇지만 던질 것을 예고하고서 던지는 공은 얼마든지 피할 수 있고, 또 그 공을 잡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갑작스러운 위험이 아니라 즐거운 놀이가 되기도 합니다. 말씀이 하는 역할이 이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할 때, 그 일에 적합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또 믿고 있다면 그 어려운 일은 결코 갑자기 우리를 향해 날아오는 위험한 공이 되지 못합니다. 그 말씀을 붙들면 얼마든지 그 공을 피할 수도 있고, 오히려 그 공 때문에 믿음을 구체적으로 사용하는 방법도 배우고 또 그 말씀의 능력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기도가 공회의 협박 때문에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결코 어려운 상황을 기도의 중심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기도는 본질적으로 구하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간구는 이 기도의 끝부분, 그러니까 29절에 와서야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간구라는 것도 단지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옵시고’라고 말하고 그냥 넘어갑니다. 그들은 오히려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런 위협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해 달라고, 그 복음이 능력있게 전해지도록 이적을 많이 베풀어 달라고 말입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따지고 보면 그 어려움을 더 심해지게 할 수 있는 그런 역할을 제대로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새벽에 토끼가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사실 이런 옹달샘 토끼기도가 많이 나옵니다. 


기도의 마지막 부분이 이런 모양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단 한 뼘도 남김없이 다스리시는 분이시며 전능하신 창조주이시고, 모든 것을 이미 알고 또 말씀해 주신 분이심을 “진실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앞에서 성도들이 기도드릴 때 사용한 시편 2편의 결론은 그래서 그 왕이 자기를 향하여 반역하는 자들을 징벌하고 완전히 승리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이 시편 2편으로 기도를 드리면서 생각하고 믿었던 것은 결국은 하나님께서 승리하셨다는 것이었고, 그것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이기신 하나님, 오늘날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자들을 이기실 하나님 편에 서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성도들은 이제 막 시작된 싸움에 뛰어들었지만 이미 승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성도가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또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고 있을 때, 성도는 굉장한 여유와 담대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승리를 향해 왜냐하면 그런 성도는 자신이 누구 편에 서 있으며, 그래서 자신이 가는 길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얻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기도를 너무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응답으로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의 땅을 흔들어 주셨습니다. 그런 식으로 내가 여기에 있다, 내가 다 듣고 있다고 표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들을 담대하게 해 주셨고 이전보다 더 열심히 하나님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모든 기도를 다 들어주셨습니다. 말씀에 예언된 어려움은 피할 수 없었지만, 그것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는 성령님의 권능을 선물로 받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맡겨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바른 안경을 써야 합니다. 제대로된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아야 하고 또 우리 자신의 인생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써야 할 제대로된 안경은 한 쪽 은 하나님이라는 랜즈로 되어 있고, 나머지 한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랜즈로 되어 있는 안경입니다. 특히 우리를 향해 도전해 오는 어려운 문제들은 반드시 그 안경을 쓰고서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보이고 그래서 제대로된 답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이라는 랜즈를 통해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상황의 유일한 주인이시고 또 주관자이십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은 단 한 뼘도 없습니다. 교회도 나라도, 그리고 나라는 개인의 삶 속에도 하나님의 눈길과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그 어디도, 한 조각도 없습니다. 믿으십니까? 항상 그런 믿음의 눈으로 모든 것들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랜즈를 통해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내 생각과 감정, 사람들의 이런 저런 말들이 아니라 이미 모든 것들을 알고 계시고, 그 마지막을 승리로 정해놓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성경을 통해서 모든 것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경을 많이 읽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하실 수 있으시면 암송도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필요할 때, 꼭 보아야 할 것을 보게 해주고, 깨달아야 할 것을 깨닫게 해주는 랜즈를 미리 마련해 놓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두 개의 랜즈를 가진 안경을 통해 모든 것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 우리는 상황과 사건들에 묶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담대하고 자유로울 수 있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여유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안경을 쓰고 기도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 주시고 우리의 입술을 통해서 복음이 더 능력있게 전파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기도드리는 우리가 되어서 담대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며, 하나님께 큰 영광돌리는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