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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3.08.09. 금요기도회 -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없더라(사도행전 25)



행0432to37 -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없더라(사도행전2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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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4장 32-37절


사도행전은 오늘 본문인 4장 후반부까지 오면서 초대교회 성도들의 경제생활에 대해서 두 번이나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번째가 2장 44절 이하에 나와 있고, 두번째가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그런데 두 번의 기록은 거의 똑같은 내용을 거의 똑같은 말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어떤 내용을 반복하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신앙에 있어서 성도들의 경제생활의 변화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똑같은 내용을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기록하신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가장 큰 경쟁자로 지적하신 것이 바로 맘몬, 그러니까 숭배의 대상이 되고 그것 자체로 목적이 되어버린 돈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돈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정적으로든 긍정적으로든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변화는 항상 경제생활의 변화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의 신앙을 바라보는 시각이고 그래서 성도의 경제생활은 굉장히 중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처음 성도들의 경제생활의 변화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정말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자, 사람들이 정말 이상해 졌습니다. 예전에는 꽁꽁 숨겨두고 있어도 없다고 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스스로 그걸 내놓고 부족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 시작합니다.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소유에 대한 개념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자기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자기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가 있었을까요?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이 말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서 한 가족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나만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듯이 옆집 개똥이 엄마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둘의 관계가 어떻게 되죠? 저절로 형제와 자매가 됩니다.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예수 안에서 한 가족’이라는 말을 그저 상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현실 속에서 진짜로 일어난 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진짜 가족으로, 가장 사랑하는 가족으로 삼았습니다. 이것이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서로 나눌 수 있었던 첫번째 이유였습니다. 


이들의 모습이 현재의 교회들의 모습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어서 오히려 이런 모습이 어리석어 보이고 거부감이 들 정도이지만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정상적인 교회,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인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실제로 그 당시 기독교가 그 득시글 거리는 우상을 모두 무너뜨리고 세상이 두려워할 정도로 파죽지세로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교회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시간이 훨씬 더 지나서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후, 4세기 중반에 로마를 다스렸던 왕 중에서 배교자 율리아누스라는 황제가 있습니다. 이 황제는 기독교 신앙을 없애고 다시 우상숭배를 중흥시키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보기에는 기독교도들은 신의 형상도 세우지 않고 예배를 드리고 있기 때문에 무신론자로 보였고 그래서 기독교도들을 무신론자로 표현하면서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무신론(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은 나그네들에 대한 친절한 봉사와 죽은 자들의 매장에 대한 관심을 통해서 현저한 발전을 이루었다. 유대인 가운데는 단 한 명의 거지도 없으며 무신론자인 갈릴리 사람들은 자기네 극빈자들을 돌볼 뿐 아니라 로마의 극빈자들까지 구조하고 있는 반면, 우리에게 속한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우리가 도와주기만을 바라고 있으니 창피스러운 일이다.” 예루살렘의 처음 성도들이 자신의 것을 내놓아 나눠준지 300년이 훨씬 더 지난 시대에도 교회는 똑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고 그것이 기독교의 능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성도가 진짜 가족이 되고, 그 가족의 사랑을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로 확장시켜 갈 때, 진짜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32절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믿는 자들”이 그렇게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믿었다는 이야기일까요? 그 내용은 33절에 나옵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이것이 그들이 믿었던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이들이 복음 전체를 들었겠지만 오늘 본문은 그 복음의 내용 중에서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이 그들을 그렇게 바꾸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이 부활을 믿는 믿음을 갖게 되자 돈에 대한 생각과 가치관이 바뀌게 되었고 그래서 그것을 움켜쥐고 쌓아놓는 대신에 내어 놓아 나누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돈에 집착한다는 것은 곧 이 땅에서의 삶에 집착한다는 뜻입니다. 이 땅이 전부라고 생각하니까 땅에서 제일 힘 센 것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복음을 듣게 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고, 그래서 자신의 부활을 소망하게 됩니다. 이제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지금까지 전부인 줄 알고 살았던 이 땅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오히려 여기는 잠시 잠깐 머물 뿐이며 진짜 삶은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돈에 대한 생각과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이제는 돈을 이 땅에서의 삶을 위해서 쓰는 것보다 하늘나라에서의 영생을 위해서 사용하게 됩니다. 자기 집 금고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영원한 창고에 들이게 됩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이 잘 하던 목회를 내려놓고 갑자기 제주도로 개척을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몇 년전부터 그런 이야기를 했었는데 더 나이 먹기 전에 해 보겠다고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듣고 그 교회 집사님 부부가 목사님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이 집사님은 대기업 중역으로 계시다가 은퇴하신 후 편안하게 살던 분이셨고, 그 아내 되시는 집사님은 그저 자기 몸 하나 꾸미는 것만 아는 분이셨는데, 이 두 분이 이 목사님이 그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동안 정말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어떻게 저렇게 사람이 변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변했답니다. 이 분들이 그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저희 가정도 목사님과 함께 가겠습니다. 저희 가정이 목사님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되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처음에는 말렸지만 너무 진지하게 이야기 하셔서 그러라고 하고는, 얼마 전에는 10일동안 그 남자 집사님과 함께 제주도 탐방을 다녀왔습니다. 탐방을 하는 도중에 그 집사님이 갑자기 자기 재산이 전부 합하면 얼마쯤 되는데, 그것을 다 처분해서 함께 하겠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도 진지하게 나중에 서로 관계가 나빠질 수도 있고, 또 마음이 달라질 수도 있으니 그러면 안된다. 그 재산은 자녀들에게 물려주라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이 분이 전혀 자녀들에게 물려줄 생각은 없고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하더랍니다. 


이런 결정은 정말 대단한 결정이고 또 헌신인 것이 분명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 두 분은 자신의 인생을 위한 최고의 투자를 결정한 셈입니다. 땅의 것을 하늘을 위해 투자하는 것이고, 가장 안전한 창고에 영원히 들여놓는 결정을 한 것이며, 순간을 넣어서 영원을 얻어내는 제일 많이 남는 장사를 시작한 것이니까요. 초대교회 성도들이 부활을 믿고서 자기 재산을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서 내어놓았던 것과 똑같이 지혜로운 결정을 한 것입니다. 진실로 부활을 믿게 되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그 때부터 하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땅은 점점 희미해 지고 하늘이 더 뚜렷해지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때가 하늘을 위해서 투자를 해야할 최적기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됩니다. 실은 뚜렷해질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무조건 묻지말고 투자해야 합니다. 이것은 연금보험 들어놓는 것 하고는, 노후를 준비하는 것 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부요함과 영광이 영원히 지속되니까요. 


부활을 소망하는 믿음이 정말 능력있는 믿음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그 믿음을 통해서 하늘나라와 영생을 볼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땅은 가벼워지게 만들고 하늘나라가 무거워지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땅이 아니라 하늘을 위해서 살 수 있습니다. 땅의 것을 하늘을 위해서 투자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부활을 믿는 믿음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줄 수 없는 자유와 능력을 우리에게 주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부활의 메세지가 선포되는 것을 듣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땅에 있는 것들을 가난한 형제들을 위해서 내놓을 수 있을만큼, 그렇게 땅이 가볍게 여겨질만큼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오늘 예수를 믿는 우리도 부활을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는 이 부활이 과연 얼마나 큰 은혜가 되고, 그래서 또 큰 능력이 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부활을 믿는 신앙의 능력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부활을 믿고 또 영생을 소망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도 큰 은혜가 되고 또 능력이 될 것입니다. 땅이 가벼워지고 그래서 땅에 속한 것을 마음껏 하늘을 위해서 투자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 한 번은 과연 하늘보다 땅이 더 무거운 사람, 하늘보다 땅이 더 중요한 사람들도 하늘나라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을까? 하늘나라는 그렇게 만만한 나라일까? 하는 질문이 떠오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그 답을 찾아보았습니다. 물론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영생을 누리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가 최소한 땅보다 하늘나라를 더 크고 무겁게 여기고 살아가야만 하늘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복음서는 그런 말씀들로 꽉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은 자신의 삶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고, 계시록은 마지막 날에 대한 묵시를 통해 그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하늘나라가 믿음으로 들어가는 나라라면 성경은 이것을 일컬어서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성도들이 집을 팔고 땅을 팔아서 함께 나눈 열매는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니...” 처음에 교회 안에는 가난한 자 투성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교회 안에 가난한 자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자신의 것을 자신의 것이라 여기지 않고 가난한 형제들을 위해서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죄가 있는 이 세상에서 살다가 보면 결국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이 생겨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유야 어쨋든 이런 불균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불균형이 나눔을 통해서 균형을 이루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도 7년마다 면제년을 지키고 50년마다 희년을 지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연구를 해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 모두가 다 자기가 가진 재산을 전부 팔아서 형제들에게 나눠주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랬다면 모든 성도들이 다 교회에 모여서 살아가야 했을 것이고, 그렇게 내놓은 사람들이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이 되었을테니까요. 몇몇은 가진 것 전부를 팔아서 교회 앞에 내놓고 자신은 복음을 전하러 외국으로 가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나바처럼 말입니다. 그렇지만 더 많은 경우 가진 사람들이 처분했던 것은 자신이 가진 것의 일부였습니다. 집이 두 채였던 사람은 한 채를 팔았고, 땅이 지나치게 넓은 사람들은 필요한 최소한만을 남기고 팔았을 것입니다. 


그게 전부이건 일부이건 간에 당시에 예수를 믿으려면 재산을 바쳐야 한다는 것은  법칙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강요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저 자발적으로, 자신의 마음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교회에 들어와 보니 끼니를 걱정하는 형제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에게는 많은 재산이 이전처럼 큰 의미가 없습니다. 심지어는 내 것으로 여겨지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할 수 있는만큼 나누었던 것이고 그것이 교회 안의 모든 성도들을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는 삶으로 인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 당시의 교회를 능력있게 만드는 복음을 담는 그릇이 되게 했던 것입니다. 


누군가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그 만큼 자신이 가진 것에서 자유롭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자신의 소유가 자신에게 그만큼 크고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가진 것을 내어놓아 없는 사람들을 도우라고 요구합니다. 움켜쥔 손을 펴서 넉넉하게 나눠주는 손을 만들라고 요구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과 소유의 얼마를 내놓을 수 있는가 하는 것과 상관없이 주님의 요구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과연 우리가 이것을 억지로 할 수 있을까요? 우리 스스로 꼭 잠궈 놓았던 우리 주머니를 열어 젖힐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꺼내기 싫은 동전 몇 푼을 꺼낼 수는 있어도 그 이상은 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씀을 다르게 바라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을만큼 진실로 성도들을 형제와 자매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며, 그렇게 할 수 있을만큼 부활과 하늘나라의 영광스러운 영원한 삶을 무겁고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돈이란 땅에 속한 것 중에서는 가장 무겁고 또 힘이 센 것이기 때문에 돈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우리의 주머니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곧 하나님께 대한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절대로 돈이 맘몬이 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돈이 맘몬이 되지 않게 하려면 우리는 이 돈을 하나님을 섬기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허락하는 대로 최선을 다해서 나누어야 하며, 점점 더 그 마음의 지경을 넓혀가야 합니다. 그래야 돈이 맘몬이 되지 않고, 오히려 우리의 영원한 영광을 위한 투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말 큰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땅의 것이 작고 가벼워질만큼 하늘이 무겁고 크게 여겨지는 은혜, 우리가 서로 서로를 참된 형제와 자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영혼의 은혜를 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땅의 것을 하늘을 위해서 투자하며, 또 형제와 자매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변화를 허락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언제나 나에게 주신 모든 것을 목적이 아닌 도구로 여기며 재물을 맘몬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늘가족을 섬기는 도구가 되게 하여, 영원한 하늘의 칭찬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