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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3.07.12.금요기도회 - 너희는 언탹 자손이라(사도행전 21)


행0317to26 - 너희는 언약의 자손이라(사도행전2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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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3장 11-16절


예수님의 비유 중에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맡기고 멀리 떠난 포도원 주인의 비유가 있습니다. 그는 먼저 포도원을 포도농사를 지을 수 있는 최적의 상태로 만들어 놓고, 먼 나라에 가면서 소작농들에게 그 포도원을 맡기고 갔습니다. 이제 추수 때가 되어서 거둬들인 것의 전부도 아니고 일부를 받기 위해서 종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농부들은 그 종을 때리고 그냥 보냈습니다. 주인은 다른 종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그 종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이번에는 종들 여럿을 보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종들 중에서 몇명은 죽이고 나머지 몇명은 심하게 때려서 되돌려 보냈습니다. 주인은 다시 생각했습니다. ‘종이라서 무시한건가? 그렇다면 이번에는 아들을 보내자. 아들을 보내면 존중하겠지.’ 그래서 주인은 아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이 이번에는 ‘저 사람은 주인의 상속자니 저 아들만 죽이면 포도원이 우리 것이 될 것이다’라고 서로 모의를 하고 그 아들을 죽여서 포도원 밖에 내던져 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지적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죄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비유처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시기 위해 보내신 수많은 선지자들을 학대하거나 죽였고,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마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뒷 부분에서 그렇게 했던 포도원 농부들의 운명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리라” 이 비유대로라면 유대인들은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하나님의 손에 멸망당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곧바로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도 다시 한 번 유대인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을 예루살렘에 머물게 하시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거기 모인 유대인들을 향해서 ‘너희가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라고 말했던 것은 ‘그래서 너희들은 이제 다 망했다. 끝장났다’고 이야기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은 나면서 부터 일어서 보지 못한 사람을 예수님이 메시야시라는 증거로 제시한 베드로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아마도 유대인들을 향해서 이 이야기를 하는 베드로는 자신의 과거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은 예수님의 제자로 3년이 넘는 세월을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것도 가장 사랑받는 제자로 말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했습니다. 저주까지 하면서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인 줄 몰랐기 때문에 저지른 잘못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그런 죄를 용서받고 다시 제자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처럼 이적을 행하며 예수님이 전하셨던 복음을 능력있게 전하는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이런 베드로에게 동족인 유대인들의 죄는 다른 사람들의 죄처럼 여기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향해 ‘형제들아, 내가 다 안다. 너희는 모르고 그랬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르고 그랬어도 죄는 죄입니다. 잘못은 잘못입니다. 모르고 그랬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장본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이어서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몰라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몰라서 저지른 일이었지만 그랬다고 해서 그들이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잘못이나 책임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수없이 예언해 오신 것이고, 그것이 그 때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약속하신 일이었고, 결국 그것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저지른 악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언약과 계획을 이루는 도구가 되었으니 그것은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그 안에서의 인간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일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진행해 나가시는 역사 속에서 알든 모르든 무언가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선한 역할이나 악한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사람들의 선한 선택은 선하게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악한 선택들은 그런 악한 선택들이 남긴 상처나 나쁜 결과와는 별개로 그 악한 행동들을 선용하십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인류가 하나님께 저지른 죄들 중에서도 최악의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선에 대한 악의 완전한 승리처럼 보이는, 선한 사람들에게는 절망스러운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선한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하시며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절대로 인간의 악한 선택 때문에 그 계획이 좌절되거나 실패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스스로 한 선택은 선악간에 스스로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 선택은 강요된 선택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를 사용해서 행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생각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살면서 정말 많은 선택을 합니다. 선악간의 선택을 합니다. 선을 선택하는 것도 나의 의지이고, 악을 선택하는 것도 나의 의지입니다. 그 누구의 책임이라고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의 마지막 열매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되어 있다면, 그리고 그 역할의 열매를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면, 우리는 어떤 역할을 하면서 살아가야 할까요? 항상 하나님 편에 서서 선한 선택을 하려고 애쓰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책망이 아니라 칭찬을 열매로 거두어 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일은 예수님이 메시야 였던 그렇지 않든 간에 무척 악한 일이었습니다. 적어도 그것은 죄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서 죽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분명히 죄는 지었지만 정상이 참작되었고, 그들은 다시 한 번 자신들의 죄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까지 가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죄를 지었으면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무자비한 사고방식이지 긍휼이 넘치는 하나님의 사고방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죄를 용서받고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사실 그런 은혜가 아니었다면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이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다가와서 “너 회개해야 돼.”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의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굉장히 불쾌하고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회개라하는 말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라는 말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라는 말은 사실 굉장히 좋은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누군가에게 엄청난 잘못을 했는데, 꼭 용서를 받아야만 할 처지에 있다면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그 사람에게서 가장 듣고 싶어하는 말은 무엇이겠습니까? “너, 나한테 사과해.”라는 말 아니겠습니까? 사과를 하라고 말한다는 것은 이미 잘못만 인정한다면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여줄 준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회개하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너, 잘못을 인정하고 나한테 사과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용서해 주실 준비를 다 해 놓으시고 우리가 하나님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할 것을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회개하라는 말씀의 뒤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돌이켜 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원래 죄인이 하나님께 기대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형벌과 멸망 밖에 없습니다. 죄란 하나님의 영광에 우리 힘으로 갚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손해를 입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다가오셨고, 다시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로 되돌아갈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너, 나한테 사과해. 그러면 다 용서해 줄께.”라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러면 벌을 내리는 대신에 새롭게 만들어 줄께.”라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러니 회개하라는 요청은 얼마나 복된 요청입니까? 절대로 기분나빠하거나 부담스러워할 일이 아니죠. 만약 우리가, 그리고 사람들이 회개하라는 말씀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제대로 헤아린다면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마다 기뻐하면서 하나님 앞으로 가고, 거기서 잘못을 낱낱이 고할 것입니다. 감격과 감사에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서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주신 말씀 속에서 회개와 새롭게 되는 것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의 회개는 우리가 새롭게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한 조건이 되는 셈입니다. 죄란 결국 우리를 부패하게 하고 망가뜨리는 것인데, 우리가 그것을 떠나고 버릴 것이라는 확실한 의사를 표시하기 전까지는 하나님도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가만히 있는데, 우리를 억지로 새롭게 해 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 예수를 믿을 때도 그렇지만, 예수를 믿은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한 번에 삶과 영혼의 구석구석까지 한꺼번에 새롭게 되지는 않습니다. 처음 회개는 큰 틀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은 후에도 크고 작은 회개를 계속해 가야 합니다. 자기 속에 있는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들을 헤아리고 그런 것들로부터 돌이키려고 애써야 하는 동시에 하나님 앞에 고백하며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를 해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시는 은혜를 주신다는 것은 거꾸로 생각해 보면 우리가 어떤 면에서 새로워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내가 아직은 그 부분에서 온전히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떠나라고 애쓰며, 하나님께 진실로 용서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을 회복시키시고, 자유롭게 하시며, 구석 구석 새로워져서 정말 예수믿는 자만이 누리는 새로운 사람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정말로 새로워지기를 원하는 그 부분에서 아직도 회개하지 않은 부분, 꼭 붙들고 내려놓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꼭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복된 요청을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사탄은 분명히 이런 저런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으로 여러분의 회개를 방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에 대한 부담감이나 부정적인 감정이나 생각들은 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이 여러분에게 던지는 시험입니다. 거기 속으시면 안됩니다. 한 번 따라해 보겠습니다. “회개는 좋은 것이다.” “회개는 기쁜 것이다.” 잊지 마십시오. 회개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불쾌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가장 좋은 것이고 또 가장 기쁜 것입니다. 우리의 새로워짐과 회복은 회개하는 자에게 허락되는 특별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회개하게 될 때 얻을 수 있는 또 한 가지 복에 대해서 이야기해 줍니다.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이것이 회개하라는 메세지를 주면서 베드로가 덧붙인 또 하나의 약속입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회개하면 우리가 나중에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주님을 영광 중에 만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이루어지는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들의 나라일까요?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하늘나라는 새롭게 된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회개하고서 새롭게 되는 날을 맞이한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그것은 하늘나라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루어진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루어진 나라이니까 새롭게 된 사람들만이 그 나라에 거할 수 있으니까요. 회개하지 않으면 회개하고 새롭게 된 피조물이 되지 않으면 새 하늘과 새 땅의 영광스러운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하늘나라는 이 땅에서 회개한 부분이 많아서 그만큼 더 많이 새로워진 사람들, 이 땅에서 그 새로움을 더 많이 누린 사람들이 그 나라에서 더 큰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을 향해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진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였느니라” 왜 베드로가 거기 모인 유대인들에게 회개를 요청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선지자의 자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언약의 자손이었기 때문입니다. 참 선지자의 자손이라면 참된 언약의 자손이라면 회개의 요청을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회개의 요청을 받고 그 요청에 순종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참된 언약의 백성, 참된 이스라엘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회개를 요구하시고 또 작은 회개를 요구하시겠습니까?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언약백성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지 않고 회개의 자리로 나아와서 새롭게 됨을 경험하며, 또 하늘나라의 영광을 받을 준비를 할 것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회개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치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회개하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악함을 버리고 떠나기 전에는 우리에게 하늘의 복, 진짜 복을 주실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에게 회개의 요청을 해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죄를 인정하고 또 회개하는 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누구에게나 일그러진 자존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요청은 하나님이 우리를 복되게 하시기 위해서, 하늘의 복을 부어주시기 위해서, 또 새롭게 되어지는 복을 누리게 해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요청을 생각하기 전에 회개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생각과 마음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회개의 장애물을 치워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에 회개가 많아질수록 우리의 삶은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속 사람은 그만큼 새로워질 것이며, 그만큼 자유로워질 것이며, 또 그만큼 더 커다란 하늘의 영광을 소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항상 크고 작은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셔서 새롭게 하시는 좋은 날로 가득 찬 인생, 하늘의 소망으로 충만한 인생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