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0724to30 - 이 말을 하였으니(마가34).pdf
설교본문 : 마가복음 7장 24-30절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원래 계시던 곳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두로지역으로 여행하셨을 때에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건은 예수님께서 두로 지역에 가셔서 행하신 유일한 이적이고 또 유일하게 베푸신 은혜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보면 본문의 주인공이 되는 수로보니게 여인은 아주 특별하고 귀한 은혜를 얻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은혜는 물론 하나님께서 공짜로 주시는 것이지만, 성경을 보면 정말 귀한 은혜일수록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를 원하시는 믿음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두로지역에서 유일하게 예수님의 정말 놀라운 은혜, 그리고 꼭 필요한 은혜를 받게 된 이 여인은 우리 믿음을 위한 중요한 모범이 되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오늘 본문을 통해 말씀의 은혜를 나누면서, 말씀의 거울에 우리 자신의 믿음을 비춰보며 우리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의 모습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특별한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게네사렛을 떠나 두로지방으로 가셨습니다. 아마도 중요하지도 않은 문제로 자꾸 피곤하게 하는 유대인들을 떠나 잠시 몸을 피하기 위해서 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 유대땅 주변에는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이 여럿 있었습니다. 두로도 그런 지역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두로는 그런 지역들 중에서도 가장 흉악하고 더러운 곳으로 악명이 높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정말 절대로 가려고 하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일부러 그 곳으로 가셨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몸을 피해서 조금 쉬고 싶으셨기 때문이지만 실은 아주 중요한 일 한 가지를 하시고 또 아주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두로지방으로 가신 예수님은 아무도 모르게 그 지역의 알려지지 않은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 사실을 숨길래야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마가복음 3장 8절에 나오는 것처럼 이미 예수님은 두로 지방에도 널리 알려진 유명인사가 된 지가 오래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곳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기 지방으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리 저리 묻고 또 물어서 결국 예수님을 찾아냈던 것입니다. 요전에 우리나라의 주요 기간의 홈페이지가 해킹당한 문제로 나라가 시끄러웠는데요. 너무 쉽게 뚫렸고, 또 아무런 방비도 없이 당한 것이 문제이지만, 전문가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사실 이론적으로 하면 아무리 막으려고 해도 뚫으려고 하면 뚫리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창이 방패보다 항상 강하다고 합니다. 마찬가지의 현상이 영적인 세계에서도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숨으려고 해도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예수님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예수님은 숨으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드러나게 되어 있으며, 또 예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진실로 원하는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예수님을 열심히 찾지 못하기 때문이고, 또 그 분을 원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찾아낸 사람들 중에 본문말씀이 헬라인이고 또 수로보니게 출신이라고 소개하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몰라도 이 여인만큼은 호기심이나 혹은 막연한 기대로 예수님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꼭 만나야 했고 만나서 해결받아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에게는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딸이 있었고, 이 여인은 예수님만이 자기 딸을 고쳐줄 수 있다고 믿었고, 또 그렇게 해 주실 것이라고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찾아낸 여인은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 모든 일들을 온전히 맡긴 채로 그저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유대인들도 이방인들을 미워했지만,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을 무시하고 멸시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들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 국민들인 주제에 지배자인 헬라인들을 멸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헬라인인 그 여인이 유대인인 예수님 앞에 이렇게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고개도 들지 않고서 그저 딸을 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일은 그 일 자체가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그렇게 했습니다. 단지 딸에게서 악령을 쫓아내는 일이 급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이 여인은 겸손하게 예수님을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 안에서 그 여인은 이미 콧대높은 헬라인이 아니었고, 예수님은 식민지의 유대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낮은 자리에서 믿음을 고백하는 불쌍한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러분, 여러분은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아시죠? 아마 그래도 교회에 다닌지 조금 되었다고 하시는 분들은 이 말씀 속에 나오는 자녀가 누군지, 개가 누군지, 그리고 떡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래서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대개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이 말만 놓고 보면 이것은 도저히 무슨 뜻인지를 알아차릴 수 없는, 굉장히 뜬금없는 말씀입니다. 게다가 유대교의 선민의식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는 여인에게 이 말씀은 결코 알아들을 수 없는 수수께끼같은 말씀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생전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고 또 예수님의 말씀을 접해본 적도 없는 여인은 이 이야기를 너무도 명확하게 알아듣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여인이 제대로 알아들으면 정말 큰 일나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을 통해서 그 여인을 비롯한 이방인들 전체를 그야 말로 ‘개취급’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지금까지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던지고 묻고 또 물어서 거기까지 찾아왔습니다. 와서 무릎까지 꿇고 엎드려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런데, 되돌아 온 것은 개취급이고 냉정하고 거만한 거절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이 여인이었다면 어떻게 하셨을 것같으십니까? 만약 저라면 아마 당장 일어서서 예수님 멱살이라도 잡았을 것입니다. 아니면 예수님을 욕하면서 통곡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여인의 반응은 너무나 차분하고 정확했고 또 논리정연하기 까지 했습니다. 완전히 예수님을 꼼짝 못하게 하는 그런 반응이었습니다. 여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이야기는 애완견을 키워보신 분이라면 굉장히 공감하실 수 있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저희 집에서 강아지 한 마리를 키웁니다. 이름은 만두인데요. 다른 건 다 좋은데, 먹는 것을 얼마나 밝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식사를 하거나 식탁에 둘러앉아 간식을 먹을 때면 언제나 그 밑에 와서 착 앉습니다. 그리고는 먹을 것을 갈망하는 눈초리로, 때로는 나도 먹고싶다는 열망에 몸을 부들부들 떨기까지 하면서 저희들을 올려다 봅니다. 그 눈초리가 너무 간절해서 뭐 하나라도 던져주지 않고는 마음이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뭐 하나라도, 정말 부스러기라도 떨어지면 곧바로 주워 먹습니다. 평상시에는 멍청하기만한 놈이 먹는 것 앞에서는 어떻게 그렇게 빠른지 단 하나라도 놓치는 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녀가 먼저 배불리 먹은 후에야 상아래 개들이 식사를 할 수 있다. 아직 자녀들인 유대인들이 배불리 먹지 못했다. 아직 이방인들에게 은혜가 주어질 때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안된다.” 그랬더니 여인은 이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맞습니다. 물론 유대인들, 하나님의 자녀들이 먼저 배불리 먹어야죠. 개인 우리들은 아무리 빨라도 그 다음이구요. 그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주님, 주님 말씀에 조금 틀린 부분이 있습니다. 반드시 자녀들이 배부르게 먹은 다음에 개들이 무엇을 먹는 것은 아닙니다. 식사가 끝나기 전이라도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개들의 차지입니다. 저는 그 부스러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부스러기로라도 충분합니다.” 정말 지혜로운 대답이었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겸손과 믿음에서 나온 대답이었습니다. 여인은 우선 자신이 자녀가 아니라 개라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은혜에 대한 우선순위가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도 인정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예수님의 매몰찬 거절에 좌절하거나 화를 내지 않고서 예수님의 말씀을 오히려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했습니다. 자기는 자녀들이 먹고 있는 밥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배불리 먹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저 식사 중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원하고, 자신은 그것으로 충분하니 그것만 주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걸 달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저희 집 만두가 저희들에게 보이는 것과 똑같은 모습입니다.
본문은 그 다음 이야기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여인은 정말 정말 원하는 것을 얻었습니다. 그 누구도 줄 수 없었던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 여인은 그렇게 가장 크고 만족스런 은혜를 배불리 받아먹은 주인공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까? 이 여인은 주님의 표현대로 하면 자녀였습니까? 개였습니까? 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자녀입니까, 개입니까? 자녀입니다. 그 어떤 자녀보다도 좋은 음식, 그것도 자신이 원하는 음식을 가장 배부르게 먹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첫번째 말씀으로 다시 한 번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러분, 이 말은 승락인가요? 아니면 아주 기분 나쁜 거절인가요? 아주 기분 나쁜 거절입니다. 아마 이 말씀의 정확한 의미를 모른다고 해도 상황적으로 볼 때, 예수님의 말씀이 매몰찬 거절이라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정말로 그럴까요? 예수님은 정말로 이 여인을 개취급한 것이며 또 이 여인의 간청을 냉정하게 거절하신 것일까요?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볼 때, 유대인은 자녀이고 이방인은 그 유대인들이 보기에 개라는 선입견을 가지고서 보면 당연히 그렇게 밖에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잘 보면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녀가 누구인지, 개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저 자녀가 먼저 배불리 먹은 후에 개가 먹을 수 있다고 하신 것 뿐입니다.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을 비롯한 이방인들에게 너희들은 개라고 말씀하신 적도 없고, 그래서 자녀인 유대인들이 배불리 먹을 때까지 너희는 기다려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도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유대인들이 만들어낸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그런 악한 구분을 받아들이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구분과 차별을 허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죽은 자도 만지시고, 나병환자도 만지셨습니다. 사마리아에도 서슴지 않고 가셨고, 거라사 지방에도 가셨으며, 지금은 그 흉악한 두로지방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 분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그런 말씀을 하실리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그 사람이 전혀 할 것같지 않은 말을 한다면, 우리는 그 말이 그 사람의 진심을 담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른 아주 중요한, 어쩌면 정반대의 뜻을 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찾아내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그 사람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이방인들을 향한 은혜의 문을 꽁꽁 걸어 잠그시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말씀을 통해 은혜의 문을 닫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혜의 문을 여셨습니다. 아니 은혜의 문은 항상, 그리고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는 자녀도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개도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누구나 자녀가 될 수 있고, 또 반대로 누구나 자신을 개가 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잠시 여러분에게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개’라는 말이 별로 어감이 좋지 않아서조금은 점잖은 다른 표현을 찾아 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개’라는 말 대신에 ‘견공’이라는 말이나 ‘강아지’라는 말을 넣어보았지만 더 이상하고 너무 어색해서 그냥 성경에 나와있는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개라는 말이 귀에 조금 거슬리시더라도 그냥 성경에 나온 비유적인 단어라고 생각하시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까요? 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의 식탁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배를 불리는 최고의 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 해답을 여인의 반응과 대답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가지씩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여인은 예수님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좌절하고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 여인이 이미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예수님의 성품을 알고 또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내가 하나님을 믿는데도 하나님께서 나를 거절하시고 나의 기도와 소망을 거절하신 것같은 순간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인에게 주신 예수님의 대답처럼 매몰차고 냉정한 거절로 여겨지는 그런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마 지금도 그렇게 느끼시는 분들도 있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매몰차고 냉정한 거절처럼 보여지고 들려지는 일들은 실은 거절이 아닙니다. 그것 자체가 더 중요한 은혜를 담고 있는 답입니다. 이 여인처럼 하나님의 거절아닌 거절 속에서 은혜를 향해서 활짝 열린 문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좋은 것을 응답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현실이 여러분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하나님의 대답의 전부라고 여기지 마십시오. 그것은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들려졌던 예수님의 말씀처럼 실은 하나님의 은혜를 향해 열린 가장 넓은 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듣고 돌아서시기 전에 꼭 믿음을 사용해서 듣고 또 보시기 바랍니다. 그 모든 어두워 보이는 일들을 여러분의 알고 또 믿는 예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려고 애써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것은 전혀 다른 색깔로 보일 것입니다. 보이지 않던 밝고 찬란한 빛들이 그 안에서 스며나올 것입니다. 그 어두운 일들이 밝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활짝 열린 문이 될 것입니다.
두번째로 여인은 자신이 자녀가 아니라 개라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영적인 원리 한 가지가 숨어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아무리 바르고 정직하게 살아도,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해도 그것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탁월하고 훌륭해도 자기 능력과 조건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은혜로 나아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발걸음은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음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여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 가지는 역설이고 또 가장 은혜로운 부분입니다. 신앙은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망하고 포기하는 자리에 머물러 있게 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내가 아무런 자격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풍성하심과 선하심을 바라보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어떠함을 깨달은 성도들은 그렇기 때문에 더 간절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그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이 선하시고 인자하시며 또 신실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렇게 낮은 자리에서 간절히 은혜를 구하면서도 결코 불안해 하거나 의심하지 않습니다.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렇게 담담하고 차분한 대답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여인의 간구가 예수님의 선하심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개와 주인의 자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아버지의 식탁에서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을 사람과 그 식탁 밑에서 주인들이 식사를 마치기를 기다리면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나 얻어먹어야 하는 개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예전에는 그런 줄 알았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는 사람은 정해져 있고 나같이 평범한 사람은 그런 은혜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선배들이 남긴 삶의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그게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하고 놀라운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 정말 믿음만으로 세상을 넉넉히 이기며, 언제나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 속에서 살아갔던 사람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을 향한 수로보니게 여인을 닮은 간절함과 겸손함이 있었던 사람들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걸 알게된 후, 저는 겁없이, 그리고 거리낌 없이 그들이 받았던 특별한 은혜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주셨는데, 왜 나에게는 안 주시냐고 따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도가 계속될수록 조금씩 조금씩 영혼을 채우는 은혜의 수위가 높아지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예수님은 너무 기뻤습니다. 그것은 여인의 대답이 예수님이 기다리시던 바로 그 대답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대답을 듣고 곧바로 여인이 바라는 그 은혜를 주셨습니다. 여인의 대답은 온갖 장애물과 예수님의 거절까지 넘어선 여인의 온전한 믿음에서 나온 대답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거절당하는 것같은 상황에 있습니까? 여러분을 힘들게 하며, 또 여러분의 믿음을 방해하는 어떤 일들, 어떤 조건들이 여러분 앞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어떤 장애물이 여러분 앞에 놓여있습니까?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 있든, 그리고 어떤 장애물을 앞에 놓고 있든 우리는 이제 그것 때문에 주저앉아 있지 말고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그 대답을 드려야 합니다. 그 대답은 실망이나 절망, 분노에서 나온 대답이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익숙해져 있는 습관이나 기대없는 마음에서 나온 대답이 되어서도 안될 것입니다. 그 대답은 겸손함에서 나온 대답이어야 하며,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과 은혜의 능력을 믿는 믿음에서 나오는 간절한 대답이며 간구여야 합니다. 그런 대답이 우리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서 듣고 싶어하시는, 들으시고 은혜와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그런 대답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주님을 간절히 찾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율법학자들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꽁꽁 숨어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진짜 모습과 진짜 능력을 보여주시지 않고 그 은혜로 우리 영혼을 배부르게 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믿음과 기대를 가지고 간절하게 주님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자신을 숨기실 수 없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드러내시고,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은혜와 긍휼이 풍성한 분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두로지방 사람들처럼, 그리고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그렇게 예수님을 간절히 찾아보기시기 바랍니다. 꼭 찾아서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찾으시거든 그 발 아래 엎드려 겸손하게 그러나 확신있고 간절하게 은혜를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거절하시는 것 같아도, 그 어떤 장애물이 있더라도 은혜를 주실 때까지 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에게서 주님이 원하시는 그 대답을 들으실 때, 우리는 자녀들만이 누릴 수 있는 풍성하고 특별한 은혜 가운데 회복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인을 닮은 간절함을 주시고, 겸손함과 믿음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도 악한 영에 사로잡혔던 딸을 온전케 하셨던 것같은 자녀에게만 주시는 풍성하고 특별한 은혜가 넘치게 해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은혜에 대한 간절함을 주시고, 겸손함을 주시고, 또 믿음을 주소서.
- 현실이 들려주는 목소리만 듣지 말게 하시고, 항상 하나님께 믿음의 대답을 드릴 수 있게 해 주소서.
- 악한 영에 사로잡힌 딸같은 우리 삶과 영혼의 문제들이 있다면, 그것이 풀려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