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문 : 창세기 4장 10절
무고한 희생자, 의로운 희생자. 이것이 우리가 아벨을 생각할 때 저절로 떠올리게 되는 말들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수많은 아벨들을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우리 자신이 아벨이 될 때도 있구요. 우리가 이런 일의 목격자가 되고 또 당사자가 될 때마다 우리는 굉장히 힘들어 합니다. ‘왜 저 사람은 정직하려고 노력했는데 저런 일을 당해야 하나?’, ‘왜 나는 바르게 하려고 했는데 이런 피해를 입어야 하나?’하고 말입니다. 이런 질문들이 떠오를 때마다 바르게 살아가려고 하고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고, 그런 생각이 깊어지면 허무함에 빠지게 되고, 분노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아벨이라는 이름 자체가 허무라는 뜻입니다. 그 이름 그대로 아벨은 너무도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려고 했고, 그래서 그의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고, 또 하나님께 받아들여졌지만, 그 결과는 형에게 살해를 당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결과가 이렇게 허무하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거친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겠으며, 또 정직하고 의롭게 살아가겠습니까? 실제로 많은 성도들이 이런 생각 때문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향해서 선뜻 발을 내딛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흔히들 ‘그래봤자 세상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나만 손해다’라고 말하는데, 바로 그런 허무한 생각이 성도들로 하여금 이 땅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올바른 길을 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우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의인의 고난은 결코 의미가 없거나 허무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벨의 죽음은 결코 허무한 죽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허무하고 무가치하게만 보여지는 아벨의 죽음이 우리에게 그것을 가장 강하고 분명하게 항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아벨의 죽음을 통해서 의인의 고난이 가지는 가치와 의미를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물론 그것을 이해한다고 우리가 저절로 그런 삶을 향해 가까이 가게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으로 가인의 삶보다 아벨의 삶이 하나님 앞에 영원히 가치있고 의미있다는 것을 받아들을 때 오늘 말씀을 통해서 묵상할 내용은 우리에게 능력이 되고 소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치미를 떼는 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였느니라” 피가 땅에서 소리를 지른다는 말을 굉장히 무시무시한 표현인 것 같이 들립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이 짧은 한 마디 안에는 이런 저런 이유와 모양으로 아벨이 되고 또 아벨과 같은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해답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땅과 인간은 따로 동떨어진 상태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한 쪽이 망가지면 다른 한 쪽도 같이 망가지게 되고, 그래서 그 고통에 신음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항시 먼저 망가지는 쪽은 인간입니다. 땅은 스스로 망가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저 인간이 망가진 결과로 도매금으로 같이 망가지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땅은 항상 피해자가 되는 셈입니다. 물론 그렇게 피해를 입고 망가진 땅은 그 아픔을 그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인간에게 되돌려 줄 수 밖에 없지만, 그것은 엄밀하게 땅의 복수라기 보다는 땅의 아픔이 우리에게 전해져 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땅과 인간의 이런 관계 때문에 인간의 죄는 항상 땅을 신음하게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신음 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하나님께 땅이 내는 신음은 사람들과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하나님께서 바로 잡으셔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인이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소리를 듣고 움직이시며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 위에 바르게 세워가십니다. 땅이 낸 신음 때문에 가인이 형벌을 받게 된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의인의 고통은 아무도 모르게 당하는 허무한 아픔이 아닙니다. 의로운 손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무가치한 손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픔과 손해를 해아리고 계십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서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정하시고 또 그 뜻을 행하십니다. 온 세상이 죄악과 악인들 때문에 완전히 망할 것 같지만, 지금까지 이어져 온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악인들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손해를 입은 사람들의 어려움을 헤아리셨으며, 그들과 함께 신음했던 땅의 외침을 듣고서 그 모든 것들을 바로잡아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선인이 아니라 악인을 땅에서 내쫓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땅을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 땅은 나중에 하나님 나라에 포함되어져야 하기 때문에 그 때까지는 보존하시기 때문입니다.
의인의 고난속에는 또 하나의 더 깊고 풍성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아벨은 그저 하나님 잘 섬기려고 하다가 형의 질투를 받아 가치없게 생을 마감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 4절은 아벨의 이러한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여기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지금도 말하느니라’라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께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은 의인의 삶입니다. 믿음을 지키며 살았던 사람, 비록 비극적인 삶을 살았어도 그 사람만이 죽어도 말할 수 있습니다. 영원히 가치있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해 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그리고 아무리 화려하게 살아도 악인의 삶에는 아무런 의미와 가치도 없으며 그는 죽어서 말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의인은 살아서도 말하고 죽어서도 말합니다. 실제로 살아서 말하는 것보다 죽어서 말하는 것이 더 많습니다. 그리고 그 죽어서 말하는 것이 계속해서 그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교훈과 용기가 됩니다. 계속해서 자신을 닮은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사실 아벨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과 그 예수님의 죽음을 닮은 많은 순교자들의 죽음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이들의 죽음의 이유는 단 한가지 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믿음입니다. 그는 그 믿음을 지키느라고 죽었고, 또 그 믿음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믿음 때문에 죽었기 때문에 그 죽음이 또 하나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씨앗으로 뿌려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는 모두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하나님의 백성들로 채우며, 이 세상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으로 만들어가는 방법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라면 이런 희생과 죽음은 그 자신에게는 아무 가치도 없을 것입니다. 말 그대로 손해만 보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하늘나라가 있기 때문에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믿음을 지키려고 하다가, 믿음 때문에 치른 희생과 죽음은 그 자신을 위해서 영광스러운 영생이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정직하게 살려고 하다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하다가, 믿음을 지키려고 하다가 힘들고 손해보는 일이 생기고 고통을 당하실 때마다 아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벨의 이름은 허무함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벨은 믿음으로 살다가 죽는 의인은 결코 하나님 앞에 허무하지 않음을 알려주는 지금도 살아있는 교훈입니다. 아벨인 인생, 허무한 인생이 그 허무함을 극복하는 방법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살아서 사나 죽으나 하나님께 영원한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것 밖에 없습니다. 믿음 때문에 힘드는 일이 있어도, 그리고 손해를 보는 일이 있어도 그 믿음을 지켜나가는 것 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평가에 귀 기울여 살지 마시고, 하나님의 눈 앞에서 믿음을 지키며 의롭게 살아가셔서 이 시대의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아벨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