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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수요일 저녁

2013.07.24.수요저녁 - 하나님의 지혜, 사람의 지혜(고린도전서 7)


고전0118to25 - 하나님의 지혜 사람의 지혜(고전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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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고린도전서 1장 18절 – 25절

바울은 온갖 철학이 왕성하게 발달하고 경제적으로는 굉장히 풍요로운 도시였던 고린도의 시장과 광장에서 거칠기 짝이 없는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십자가는 아름다운 색깔로 칠해지거나 금박이 덧입혀진 대신에 그리스도의 피가 뚝뚝 떨어지는 원래의 모습 그대로 고린도의 광장에 세워졌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고린도에서 그 도시 사람들의 취향과 스타일에 맞게 멋진 말로 포장된 복음을 전하지 않은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 때까지 수많은 도시들을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를 믿게하려는 심정으로 때로는 그 도시 사람들이 듣기 좋게 복음을 요리해서 전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런 도시들 중의 대표적인 도시가 바로 아덴, 그러니까 아테네였습니다. 최고로 고상한 사람들이 사는 도시였기 때문에 바울은 거기서 최고로 세련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바울의 생각과 정반대로 나타났습니다. 물론 그 좋지 않은 결과가 전부 바울의 잘못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그 도시에서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바울이 절실하게 깨닫게 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복음은 아무리 거칠고 거부감이 들더라도 복음 그대로 전해져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디서건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다른 것은 아얘 생각조차 하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깨달음과 결단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피묻은 복음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이것은 듣는 사람들을 고려한다면 아주 지혜롭지 못한 선택이었습니다. 그 복음을 듣는 것이 유대인들이건 헬라인들이건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라는 것은 힘으로 로마를 정복하고 다윗 시대의 영광을 회복해 줄 그런 구원자였습니다. 게다가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 들었을 때, 그들이 십자가를 쉽게 받아들일래야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너희가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직접적으로 자신들의 죄를 지적하는 메세지까지 듣게되니 십자가는 더더욱 받아들이기 힘든 것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반면에 헬라인들이 바라는 것은 자신들의 사고방식에 맞는 신이었습니다. 일단 헬라인들은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으로는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며 죽은, 몸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 그렇게 죽어버린 신은 받아들이기가 굉장히 힘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그래도 교양있는 헬라인들에게 십자가는 너무도 역겨운 것이어서 대화중에도 십자가라는 단어 자체를 입에 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온갖 철학에 빠져서 스스로를 굉장히 고상하고 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고린도의 헬라인들에게 십자가는 정말 받아들일래야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해서 그런 고린도에 그렇게 거친 십자가의 복음이 있는 그대로 선포되게 하셨을까요?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려고 하셨다면 더 쉽고 편안한 모습으로 복음을 전해야 했을텐데 말입니다. 


우리가 이 질문의 답을 얻으려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주신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잘 압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서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감사하지 않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겠지요. 그러나, 그 십자가가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지 그 과정과 방법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지 못합니다. 또한 그 십자가 자체가 우리가 ‘죄’라고 부르는 것을 꺾어버리는 능력이 된다는 것도 잘 생각하지 못합니다. 사실 십자가가 우리의 구원이 되는 이유는 그 십자가가 우리 안에 있는 죄, 그러니까 하나님을 거스르는 교만함을 꺾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십자가 안에 이런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십자가를 의지해도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교만함이 우리 안에 여전히 자리잡고 있는 한 하나님은 우리를 가까이 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죄를 짓게 된 동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것을 따 먹으면 ‘하나님처럼 지혜롭게 되어 스스로 선악을 결정하게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자신의 기준이 되고 또 왕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죄라고 부르는 것의 진짜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저지르는 크고 작은 죄는 모두가 다 이 ‘죄’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합니다. 나에게 무엇이 유익하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내가 결정하려고 하고 또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하게 되니까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선과 악의 기준을 저버리게 되고 그것이 우리가 이런 저런 죄라고 부르는 것들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우리가 죄를 이겨야 한다고 할 때, 눈에 보이는 그런 죄를 이겨야 한다는 뜻이 되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이 죄를 이겨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십자가가 끝장내기로 되어 있었던 그 죄가 바로 이 죄였습니다. 십자가는 인간 속에 깊게 뿌리박고 있는 이 죄, 자기가 결정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어하는 이 죄를 끝장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해결책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십자가가 누군가의 취향과 스타일에 꼭 맞는 모양으로 주어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복음이 아주 말랑말랑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주어진다면 사람들 속에 있는 그 죄를 박살낼 수 있을까요? 그런 복음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안에 있는 그런 죄를 떠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할 수 있을까요? 만약 하나님께서 복음을 그 어떤 사람에게라도 아무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모습으로 주셨다면 그 복음은 결코 그 사람 안에 있는 죄를 끝장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복음은 결코 사람을 구원얻게 만들지 못합니다. 


바울은 복음이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그런 식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사실을 몰라서 그렇게 전한 것이 아닙니다. 거리끼는 것이 되지 않고 미련한 것이 되지 않으면 결코 복음은 복음의 능력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에 그런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복음은 사실 그 자체만 생각해 보면 정말 말도 안되는 이야기 입니다. 사람들이 쓰는 표현대로 한다면 정말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입니다. 복음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이 나와 똑같은 인간이 된다? 벌써 여기서부터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 인간의 죄짐을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죽는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그것도 인간의 죄를 뒤집어 쓰고 죽는다? 이건 더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인간이 되어 죽은 하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 죽은 인간이 살아났다고 합니다. 그것도 곱게 죽은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쏟고 가장 처참하게 죽은 인간이 말입니다. 정말 정말 말이 안되는 것은 마지막 주장입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을 믿으면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방법이라고 말합니다. 이 모든 말도 안되는 이야기들을 믿으면 그것이 구원을 가져다 준다고 말합니다. 상식적으로만 본다면 사람이 이런 사실들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복음은 있는 그대로 생각해 보면 정말 말도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결코 인간의 사고방식이나 상식으로는 받아들일 수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복음이 복음이 되는 것은 바로 그렇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는 사람의 사고방식으로는 정말 말도 안되는 것이기 때문에 복음이 복음이 되는 것이고, 바로 거기에 복음의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 말도 안되는 것을 통해서 구원을 얻으려면 기존에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것들을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라면 표적,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납득할만한 증거를 보여달라는 태도를 내려놓아야 하며, 헬라인들이라면 지혜, 그러니까 자신을 설득시킬만한 논리적인 설명을 해 보아라라는 태도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신이 기준을 정하고 그 기준에 합당한 것만을 진리로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를 내려놓아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야 십자가의 복음은 비로소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믿어지고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들었던 사람들 중에는 철학자들도 있었습니다. 율법 전문가도 있었습니다. 웅변가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헬라인들과 유대인들 중에서 ‘지혜로운 자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고린도 교회에 거의 들어오지 못했고 들어오려면 자신의 지혜를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자신의 지혜를 고집하는 사람들은 피묻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어리석은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고린도 교회 안에는 이전의 자기 지혜를 고집하는 사람들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복음으로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복음은 처음부터 그 어떤 인간적인 조건과도 전혀 상관없는 방법으로 사람을 구원하도록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복음이 처음부터 하나 밖에 없는 구원의 방편으로 삼은 것은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로 받고 의지하는 믿음 말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교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구원에서 제외되게 되어 있었습니다. 교만을 내려놓는 것이 바로 회개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그 믿는다는 말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가 무엇일까요? 한 번 따라해 볼까요? “항상, 언제나, 반드시 무엇에 있어서건 나보다는 하나님이 옳으시다.” “항상, 언제나, 반드시 무엇에 있어서건 나보다는 하나님이 지혜로우시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기본입니다. 그리고, 우리 편에서 보면 신앙이 참 쉽지 않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결국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의 원리 앞에서 우리 자신의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이나 지혜까지도 내려놓아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필요한 과정입니다. 나와 나의 방식을 고집하면서는 결코 하나님의 방법을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다 그렇게 자기 지혜와 자기 지식을 내려놓고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앞에서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아직 완전히 새롭게 되지 못한 옛 모습과 습관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깥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교회의 분열문제였습니다. 왜 분열하고 싸울까요? 이유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나만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옳으니 내가 윗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 얻기 위해서 버리고 내려놓았던 전혀 능력없는 것을 다시 주워담고 있었고 그것이 고린도 교회를 깨뜨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를 가만히 살펴보면 문제가 생기는 교회들의 성도들이 가지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몸은 교회 안에 들어와 있지만 그 마음과 생각은 아직도 세상에 머물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그러니까 ‘말’입니다. 특히 그 말 속에 포함되어 있는 단어들이 가지는 의미는 정말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말로 표현되지 않는 생각과 마음은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큰 복을 주시기를 원합니다.”라고 말씀드렸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아멘!”이라고 하시겠죠? 복은 좋은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 모두가 다 같은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아멘!’을 외치시지는 않습니다. 제가 사용한 복이라는 단어를 부자가 되고 하는 일마다 잘 되는 것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은 그런 생각을 하시면서 아멘 하실 것입니다. 또 복이라는 말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복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그런 복을 떠올리며 아멘 하실 것입니다. 성경도, 그리고 그 성경을 가르치는 가르침이나 설교도 결국 인간의 말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을 함께 사용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말이 우리의 신앙을 표현하고 또 결정하는 틀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그렇게 사용하는 말들 중에서 신앙 안에서 다시 가르쳐지고 배우지 않은, 신앙적인 가치를 담고 있는 중요한 말들이 있을 때, 그런 말들이 신앙에 대해서 오해를 하게 만들고 그래서 신앙과 교회에 여러가지 문제를 만들어 내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도 그런 말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단어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능력’이라는 단어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몸은 교회 안에 들어와 있었지만 여전히 이 ‘능력’이라는 말을 전쟁이나 정치판에서 사용하던 그대로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능력’이라는 말을 듣고 말할 때면 경쟁해서 이기고 군림하는 그런 능력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능력에 대한 생각이 이렇게 비뚤어져 있으니 이찌보면 그들이 서로 부딛히고 분열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의 이런 잘못된 생각을 바꿔주려고 이렇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사도 바울은 남들에게 주장하고 자신을 증명해 보이고 그리고 남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능력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능력에 대한 그렇게 비뚤어진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도라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하나님의 최고의 능력으로 붙들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많이 익숙하지 않은 말을 사용합니다. 18절을 다시 한 번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가만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누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말합니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 그렇다고 말합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십자가의 도는 ‘구원을 얻고 있는 우리들’에게만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말합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만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구원을 얻고 있다’는 말은 상당히 익숙하지 않은 말입니다. 이미 구원얻은 자들도 아니고 구원얻을 자들도 아니고 구원을 받고 있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굳이 이런 익숙하지 않은 표현을 사용한 것은 우리들처럼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도 ‘구원을 얻었다’고만 생각했지 구원의 다른 측면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구원에는 세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그것을 이렇게 설명드리면 이해하기 쉬울 것 같습니다. 우리가 배를 타고 가다가 배가 깨져서 바다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 구조선이 도착했고 우리를 건져 올렸습니다. 우리가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까, 받지 않았습니까? 이미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구원이 이미 완결된 것입니까? 아니죠. 우리가 그 배에 타고 가고 있는 동안은 우리 구원은 여전히 진행 중에 있습니다. 바울의 표현대로 구원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완결되는 것은 우리가 항구에 안전하게 도착했을 때입니다. 우리는 그 때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이렇게 세 가지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경험 속에서는 처음이 있고 끝이 있는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우리를 건져냈고 그래서 우리가 올라타게된 그 고마운 구조선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님이 아들이 못 박혀 피흘리며 돌아가신 그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그 십자가에 올라탈 때 우리는 이미 우리 힘으로 살아보겠다는 노력을 다 포기했었고, 또 내 자존심과 자신을 향한 신뢰를 다 내려놓았습니다. 그렇게 한 후에 십자가만 붙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구원을 받게 되었고, 또 구원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까지 이 십자가에 타고 있어야 할까요? 언제까지 십자가를 우리의 생명과 구원을 위한 능력으로 여기고 의지해야 할까요? 항구에 도착할 때까지, 하늘 아버지 앞에 설 때까지 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그들이 이미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구원이 다 끝난 일이라고 생각했지 자신들이 구원을 받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붙들고 있었던 손을 놓아버리고 그 십자가에서 내려오려고 했습니다. 적어도 그들은 자신들의 삶이 끝날 때까지는 십자가가 여전히 자신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그래서 그 능력에 의지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손은 이미 십자가에 올라탈 때 포기했던 자기 자랑과 지혜를 붙들게 되었고, 그것이 고린도 교회를 어지럽게 했고 그들의 신앙을 다시 표류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십자가라는 구조선에 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그 순간이 올 때 까지 우리는 여전히 구원을 받고 있는 상태로 남아있고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피묻은 십자가를 의지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구조선에 올라탄 사람이 계속 구조선에 의지해서 살아가듯이 말입니다. 십자가는 그렇게 구원의 원리로 뿐 아니라 삶의 원리로 삼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의지해서 살아간다는 것은 첫째, 소극적으로 보면 나의 지혜와 능력을 의지하며 그것을 주장하면서 살아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폐기해 버리셨습니다. 아얘 쓸모 없게 만들어 버리셨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다가 십자가라는 구조선을 발견하고 그 구조선에 몸을 맡겼을 때, 우리는 이미 그런 것이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구원의 항구에 도착할 때까지는 이런 태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도 십자가 위에 올라타서 구원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의지해서 살아간다는 것은 둘째로, 적극적인 의미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방식대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정말 능력이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지혜 또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분이셨구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능력과 지혜를 자신을 드러내고 주장하며 다른 이들 위에 군림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사람들을 구원하고 섬기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의 지혜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도구가 되었고, 그 분의 능력은 약한 자들을 세워주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분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우리의 힘과 지혜를 예수님을 흉내내며 예수님처럼 사용해야 합니다. 자신을 주장하고 남들위에 군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유익하게 하기 위한 섬김의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혜와 능력을 그렇게 사용할 때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 앞에서 그만큼 더 영광스러워 질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지혜와 능력을 그렇게 사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다시 영적으로 표류하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거기 올라타고 하늘을 향해 가는 사람들입니다. 처음 구원을 받았을 때 뿐만 아니라 지금도 똑같은 십자가에 올라타고서 구원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십자가가 아무리 어리석어 보여도, 십자가를 흉내내며 사는 삶이 아무리 바보같아 보여도 십자가는 세상의 지혜로는 이해조차 할 수 없는 하나님의 가장 큰 지혜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 십자가가 어리석게 보이고 십자가를 흉내내며 사는 것이 바보같아 보이는 것은 사람의 지혜로는 파악조차 하지 못할만큼 엄청나고 깊은 하나님의 지혜가 십자가에 고스란히 녹아들어가 있기 때문이지, 그것이 진짜로 어리석고 바보같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어리석음이 세상 모든 사람의 모든 지혜를 합한 것보다 지혜롭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약하신 것이 사람의 모든 힘과 능력을 합한 것보다 더 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그것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가장 어리석어 보이고 무기력해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온 세상의 믿는 자들을 구원할 구원의 지혜와 능력을 담아 놓으셨고, 그것으로 세상의 능력과 지혜를 완전히 무용지물로 만드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이고 또 영광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세상을 만드시고 또 움직여 가시는 하나님의 모든 능력과 모든 지혜가 집중된 곳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가장 지혜롭고 완전한 구원의 능력이 되어줄 뿐 아니라 우리 삶을 위한 지혜와 능력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흉내내며 살아갈 때, 이 지혜와 능력이 우리의 편을 들어줄 것입니다. 더 많이 섬기며 더 많이 나누며 살아가는 것은 그래서 결코 손해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야 말로 십자가를 흉내내는 삶이며, 그래서 십자가의 모든 지혜와 능력이 내 편이 되게 하는 비결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최고의 지혜와 능력임을 믿는다면 이것 또한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바로 이 믿음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십자가를 믿는 믿음을 더욱 더 견고하게 세워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더 단단히 붙잡고 십자가를 더 많이 흉내내며 어리석고 약하게, 그러나 가장 지혜롭고 강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항상 십자가를 생각하며 십자가를 붙드는 믿음으로 살아서 계속해서 더 영광스러운 구원을 향해 가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우리 편을 들어주는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내가 자꾸 나의 행위와 의로움에 의지하고 자랑하지 않게 해 달라고. 
  2. 나의 지혜가 십자가 앞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달라고.
  3. 내가 십자가를 흉내내며 살아서 그 십자가의 능력과 지혜를 사용할 수 있는 복을 알게 해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