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0201to05 -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9).pdf
본문 : 고린도전서 2장 01절 – 05절
옛날 왕이 다스리던 시대의 유럽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를 보면, 왕이 지방의 도시에 중요한 메세지를 전달할 때면, 왕의 깃발을 세운 전령을 보내서 그 도시의 사람들을 모으게 하고, 왕의 명령을 그대로 읽게 해서 그 곳 사람들에게 전달하게 하는 그런 장면이 종종 나옵니다. 이 때 이 전령이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은 말을 잘 타는 일도, 사람들 앞에서 위엄있고 멋지게 보이는 일도, 심지어는 왕의 명령이 잘 받아들여지게 만드는 일도 아닙니다. 이 전령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왕의 메세지를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만약 전령이 자신의 명예와 체면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서 지나치게 허세를 부린다거나, 자신의 이미지를 위해서 지나친 친절을 베푼다면 그 사람은 전령으로서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또 왕의 메세지가 잘 받아들여지게 해야 한다는 충성심으로 왕의 메세지에서 불편하고 걸리적 거리는 부분을 수정한다거나 혹은 왕의 메시지를 전달한 다음 ‘왕이 이렇게 말씀하셨으니까 제발 그대로 받아들여 주십시오.’ 라고 간청한다면, 이것은 왕의 메세지를 망치는 일이고 또 오히려 백성들이 왕을 무시하게 만드는 일이 됩니다. 전령은 자신이 전하는 메세지를 통해 단순히 왕과 백성들 사이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좋은 전령은 어떻게 하면 왕의 메세지를 가장 명확하고 분명하게 전할 수 있을까만 고민하면 되고, 그렇게 본다면 그저 왕의 친서에 쓰여있는 그대로 읽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목사에게는 목회와 관련된 여러가지 일들이 맡겨져 있지만, 그 중에서도 설교를 하는 일은 그 모든 일들의 중심에 있는 일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는 아무래도 ‘말씀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종’이라고 하니까 뭐 대단히 거창한 것 같지만, 이것은 목사는 왕이신 하나님의 메세지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전령이라는 뜻입니다. 그 메세지의 원본이 바로 이 성경이고 그래서 특히 설교자로서의 목회자는 성경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제대로 전달해야 하는 책임을 맡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결코 읽어주기만 하면 되는 책이 아니라는데 설교자들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성경이 그냥 읽기만 해도 그 풍성하고 온전한 뜻을 다 알 수 있는 책이라면 좋겠는데, 그렇지가 않아서 반드시 설교자나 가르치는 사람의 해석을 통과한 후에 가르쳐져야 합니다. 이것을 설교라고 부르고 때로는 성경공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아무리 이렇게 밖에 가르쳐 질 수 없다고 하더라도 목사는 하나님의 전령입니다. 그래서 목사가 가장 크게 신경써야 할 부분은 설교를 통해서 성도들이 은혜를 받게 하는 일도 아니고, 자신이 멋있게 보이는 일도 아니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말씀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도록 노력하는 일도 아닙니다. 설교자인 목사가 가장 신경써야 할 것은 형식과 모습이 어떻든지 간에 그 속에 가장 온전한 모습의 왕의 메세지, 그러니까 원래 모습대로의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지도록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흔히 설교를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왜 설교를 이렇게 표현하는 줄 아십니다. 그것은 설교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할 때, 설교는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달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선포’는 전령이 왕의 메세지를 백성들 앞에서 있는 그대로 큰 소리로 읽어주는 행동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씀드려서 선포를 하는 것은 목사이지만 선포되는 것은 목사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 분의 백성들에게 전달하고 싶어하는 메세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의 목적은 은혜를 끼치는 것도, 그리고 무언가를 배우게 하기 위한 것도, 또 깨달음을 얻게 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의 메세지가 제대로 전달되면 그런 열매들도 맺히겠지만 그것을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는 자신의 설교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원래 그대로의 메세지를 담게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하고, 성도들은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거기 담겨있는 하나님의 메세지를 들으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래야 목사는 전령으로서 하나님의 메세지를 제대로 선포할 수 있고, 성도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 왕의 메세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항상 듣기 좋은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 우리 모두의 어려움입니다. 왕은 백성들에게 상을 내리겠다는 메세지도 전하지만, 때로는 세금을 올리겠다느니 이런 저런 법을 어길 시에는 엄하게 처벌을 하겠다느니 하는 메세지도 전합니다.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도 마찬가지 입니다. 때로는 눈물이 날만큼 은혜롭고 위로가 되는 메세지도 주시지만 때로는 우리의 가장 약하고 또 악한 곳을 직접 건드리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의 전령인 설교자는 이 모든 메세지들을 전해야 하며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은 이 모든 것들을 들어야 하고 또 소화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저와 여러분에게 조금이라도 부정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당장 들을 때만 그렇습니다. 일단 듣고 순종하면 불편한 메세지들은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복된 소식들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하나님의 말씀들은 다 지극히 선하신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들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다 너무나 선한 씨앗들이고 그래서 결국에는 선한 열매들도 맺혀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왕이신 하나님의 전령이었던 사도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이러한 영적인 원리를 잘 이해하고 또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메세지를 선포하는 전령이며, 그래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메세지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메세지가 제대로 전해지기만 하면 가장 좋은 열매들이 맺혀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또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장벽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너무 똑똑하고 너무 능력이 탁월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원래도 굉장히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정말 최고의 교육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이었지만 이방 땅에서 태어났던 바울은 가말리엘이라는 스승을 만나서 오랫동안 그에게 교육을 받았는데, 가말리엘은 당시 최고의 석학으로써 유대의 율법과 철학, 그리고 말하는 것에 대한 학문인 수사학의 대가였습니다. 바울이 처음 기독교가 세상에 퍼지기 시작했을 때, 청년이었던 그가 예루살렘 교회의 승인을 받아서 예수믿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처벌하는 권한을 얻었던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탁월한 랍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에게 가장 큰 갈등을 일으켰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충분히 십자가에서 내려오셔서 예수님을 그렇게 대접한 사람들을 모조리 쓸어버리실 수 있으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기 위해서 고통과 조롱을 참아야 했던 일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철학과 율법, 그리고 수사학의 대가였던 사도 바울은 복음을 어떻게 전하면 사람들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지, 그리고 자신도 거절당하지 않고 일단은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오게 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또 그런 방법을 사용할 수 있는 충분한 머리와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런 방법과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처음 복음을 선포하고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가장 탁월한 전공분야였던 웅변술과 철학의 옷을 입은 말을 일절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복음을 전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단지 효과를 위해서 당장은 듣기 좋아도 금새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그런 말들을 사용해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이 일은 참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2절을 보면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전할 때, 왜 자신에게 있는 능력과 재능을 사용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바울에게 있는 그대로의 가감되거나 꾸며지지 않는 피묻은 십자가의 복음만을 전하는 일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고 그래서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쉬운 일이라면, 자연스러운 일이라면 굳이 결단이 필요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하면 되죠. 세상에 숨 쉬기 위해서 결심을 하는 사람이나, 물을 마시기 위해서 결단을 내리는 사람이 없는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다. 바울처럼 의지가 강한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전령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메세지를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 일은 그에게도 특별한 의지와 결단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어느 정도의 강한 결심이 필요했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말고는 아얘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했다고 표현할만큼 엄격하고 강한 결심이 필요했습니다. 이렇게 극단적인 결심을 하지 않으면 자꾸 자기 능력과 자기 재능, 자기 지식에 의지하려고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는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 그리고 성도는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냥 말하고 들을 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또 이것과 반대가 되는 이야기를 하는 설교자도 없고 성도도 없지만 막상 이것이 현실이 되어질 때는 굉장히 만만치 않은 일이 되고 맙니다. 목회자는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사용해서 성도들이 잘 듣는 메세지를 만들어 내고 싶은 유혹을 떨쳐 버려야 하며, 또 성도들은 자신이 듣고 싶은 설교를 들으려는 욕구를 내려 놓아야 합니다. 나중에 뿐만이 아니라 처음 복음을 전하고 들을 때부터 그렇게 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자신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죄인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그래서 회개해야 하며 이제부터는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이 복음이 말하는 내용을 받아들여야 하며, 이 복음이 말하는 대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바울이 복음에 대해서 전했던 두 가지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는 것과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린도라는 도시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로마시민이라는 굉장히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 자부심의 중심에는 로마 황제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있어서 주님과 왕은 로마 황제 한 사람 밖에 없었으며 만약 이것이 흔들리면 그들의 자부심도 흔들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많이 배우고 고상한 사람들일수록 십자가에 대한 혐오감을 더 강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주님이요 왕이시라는 것과, 또 그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바울에게도 굉장히 힘든 일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거부당할 줄 알면서도, 빈축을 사고 무시당할 수 밖에 없는 내용인 줄 알면서도 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그렇다면, 이런 복음을 듣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어떨까요? 듣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심한 거부감과 선입견을 이겨내지 못하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메세지였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전령이 전해야 했고, 백성들이 들어야 했던 왕되신 하나님의 메세지였습니다. 그러니 바울은 그렇게 밖에 전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칠 때, 약하고 두려워 하며 심히 떨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그랬던 것은 고린도의 성도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항상 자신을 약하게 만들었으며, 무언가를 두려워 했습니다. 그러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자신을 약하게 만들었고 또 무엇을 두려워 했을까요? 제가 만약 풍경화나 정물화를 그린다고 한다면, 저는 두 가지를 정해야 합니다. 첫번째는 그림의 중심주제가 되게 해야할 것을 정해야 하며, 두번째는 그림의 배경이 되는 것을 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림을 그리다가 중심주제가 되는 것을 작고 어두운 색으로 그리고 배경을 크고 화려하게 그린다면 그림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림은 엉망이 될 것이고, 그림을 보는 사람은 그 그림 속에서 무엇을 보아야 할지 혼동하게 될 것입니다. 원래 바울은 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면에서 엄청나게 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약해졌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자신의 원래 기질과 능력과 재능을 모두 내려놓고 약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복음이 가장 잘 드러나게 해 줄 배경이 되기로 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두려워 했던 것은 자신이 그 반대역할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복음을 이용해서 스타가 되고 복음은 자신의 배경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두려워 했던 것입니다. 이 두려움은 바울을 떨게할 정도였습니다.
바울이 강한 자신을 약하게 하고, 또 그러면서도 자신이 앞에 나갈까봐 두려움에 떨었던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령님께서 온전하고 능력있게 일하시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지식과 재능을 이용해서 충분히 복음을 거부감 없는 모양으로 만들어서 고린도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더 많은 사람들이 그 복음을 들을 것이고, 그러면 적어도 교회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늘어날 수 있겠죠. 그렇지만 이렇게 되면 절대로 나타나지 않고 또 경험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님의 나타남과 능력”입니다. “성령님의 나타남과 능력”이라는 말은 말만 보면 무언가 굉장한 이적이 일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오해하기도 하구요. 그렇지만 본문이 말하는 것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그런 의미에서의 성령님의 나타남과 능력을 원했다면, 그는 결코 약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두려워서 떨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거꾸로 갔을 것입니다. 미국 텔레비젼에 자주 등장하는 어떤 전도자들처럼 사람들 사이를 떨치고 돌아다니며 당당하게 귀신을 내쫓고 병고침을 선포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가 전면에 나서서 사역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성령님의 나타남과 능력은 속사람이 변화되는 것을 뜻합니다. 믿지 않던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는 변화, 그래서 세상에 속하고 육신에 속했던 사람이 하나님과 성령님께 속한 사람이 되는 변화를 의미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의 취향에 맞게 이리저리 변형되고 바뀐 복음을 듣고 교회 안으로 들어온다면 그는 결코 속 사람의 변화, 그 속에서 참된 믿음이 생겨나고 또 그가 성령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이런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변화는 있는 그대로 들려지는 복음을 통해 성령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듣기 좋은 말씀으로는 사람이 변화되지 않느냐고 물으실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메세지들도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그렇지만 그런 변화는 예를 들자면 좋은 책을 읽거나 다른 일을 통해 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변화와 같은 종류의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변화는 결코 사람의 마음 속에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받아들이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만들어 낼 수 없으며,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겉으로 보여지는 삶의 모습은 변하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변화가 영혼 깊숙한 곳까지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속 사람이 변화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사람에게 믿음이 생기게 하고 또 온전하게 변화되게 하는 능력을 발휘하시려면 그 말씀은 있는 그대로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것을 통해서 일하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을 통해서 일하시겠습니까? 성령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복음을 통해 믿음을 주시고 또 속사람을 변화시키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이 전령들에게 맡기신 그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통해서는 일하시지 않습니다. 아니 일하실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이미 살펴본 대로 십자가의 복음은 그것이 아무리 투박하고 거칠어도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최고의 지혜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하는데 가장 지혜로운 도구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 어떤 이유에서건 하나님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복음, 그리고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복음 이외의 다른 복음, 이것이 들어가지 않은 복음을 통해 일하실 리가 없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맡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라도 바울은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니면 자기의 소명도 실패하고 성령님도 능력있게 일하실 수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바울은 스스로 강함을 내려놓고 약해지는 것을 감수했고, 그러면서도 두려워하면서 떨었습니다. 조금이라도 그 복음보다 자신이 앞서게 될까 해서 말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자신의 입장에서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것을 우리 모두를 위해서 적용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우리 교회가 사람을 변화시키고 온전하게 회복하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나도 그런 사람들 중에 속하기를 원하십니까? 가끔씩 보면 이런 은혜를 두려워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참 안타깝습니다. 이런 은혜는 받아야만 합니다. 꼭 받아야만 합니다. 세상이 이런 은혜보다 더 좋은 것은 없으니까요. 제가 한 번은 양식당에 가서 스테이크를 시켰는데 주문이 잘못되어서 고기가 거의 익히지 않은 상태로 나왔습니다. 아시죠? 이렇게 썰면 피가 흐르는 그런거 말입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런 것을 먹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걸 먹는다는 것이 굉장히 꺼려졌습니다. 그렇지만 까짓거 한 번 먹어보자 하고 한 점 썰어서 입에 넣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다음부터는 스테이크를 먹을 일이 있으면 항상 그 상태로 시키게 되었습니다. 알고보니 그게 고기의 참 맛이었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왜 사람들이 스테이크를 그렇게 먹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변화되는 것을 바라면서도 두려워 하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아직 가 보지 않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려운 것입니다. 마치 덜 익힌 스테이크를 눈 앞에 놓고 있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 되는 것이죠. 그렇지만 피가 배어나오는 맛을 알 때, 스테이크를 먹는 참 맛을 알게 되는 것처럼, 예수를 믿고 변화되어질 때, 우리는 예수를 믿는 참 맛을 알게 됩니다. 그 맛을 알면 예수를 믿는 일의 진짜 능력과 진짜 즐거움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변화는 두려워할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겨야 할 대상입니다. 예수 안에서 변화된 사람들 중에서 두려워하면서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거꾸로 예수믿고 변화되지 않은 사람치고 진짜 행복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변화는 참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변화는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성령님께서 능력있게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을 소원해야 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또 듣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쉽지 않은 일입니다. 처음 바울과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래서 전하는 자도 또 듣는 자도 함께 결심을 하고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전하고 또 그렇게 듣기로 말입니다. 그 길을 함께 가기로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령님은 강하고 능력있게 일하지 못하십니다. 우리의 속 사람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주시고, 또 우리를 영광스럽게 변화시키시지 못하십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어서 진리가 선포되고 또 진리에 귀를 기울이는 곳에서만 능력있게 일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전하는 사람의 지혜이건, 혹은 듣는 사람의 지혜이건 인간적인 것 때문에 우리 믿음이 방해를 받아서도 안되고, 우리의 믿음이 그 위에 서 있게 해서도 안됩니다. 거기는 성령님의 역사도 없고, 우리의 참된 변화도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정직한 말씀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정직하게 말씀을 전하고 또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교회, 그래서 말씀이 일하고 그 말씀을 통해서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역사하시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바른 설교를 하는 목사가 되고, 바른 설교에 귀를 기울이는 성도들의 교회가 될 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런 우리 교회에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주실 것이고, 우리의 믿음을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세워지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 말씀을 통해서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져 가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 은혜의 날을 기대하고 소망하면서 항상 말씀 앞에서 자신을 약하게 하고 두려워 떨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