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0425to26 - 다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24).pdf
본 문 : 창세기 4장 25-26절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은 정말 충격적이고 절망적인 사건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먼저 형이 아우를 죽인 사건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최초의 살인사건이 다른 관계도 아닌 아담이 처음 낳은 두 아들 사이에서 벌어졌다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우리가 구속사라고 부르는 입장에서 볼 때 더더욱 심각한 사건이 됩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임으로써 완전히 악인의 혈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의인을 죽여 더 이상 의인의 혈통이 이어지지 못하게 만든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의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실 사람이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성경은 그렇게 의인의 혈통이 끊어진 세상이 어떻게 악해져만 가게 되었는가를 가인의 후손들의 이야기를 통해 들려주었습니다. 그 절정은 어제 살펴본 대로 라멕이라는 사람이었죠. 이제 인류의 역사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벨이 죽은 후, 하나님의 역사는 허무로 돌아간 것 같아 보입니다.
사실 이것이 사탄이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해 왔던 일입니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시려는 의인의 역사와 구속사를 계속 방해합니다. 의롭게 살려고하는 사람들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악한 사람들의 성공은 모두가 다 그런 일들이 성공한 예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목격하거나 혹은 당하게 될 때, 우리는 굉장히 좌절하고 힘들어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의롭게 사는 일을 포기하고 싶은 충동마저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세상에 왜 여전히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거의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악한 일들 조차도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범위 안에서만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르시는 악한 일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쩌실 수 없는 악한 일들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보이는 것들을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악한 일에 대해서 무감각해서도 안됩니다. 내가 악한 일의 주인공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어쨋든 악한 일은 악한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망가뜨리는 일이니까요.
오늘 본문은 어두운 첫번 인류의 역사 속에 하나님께서 비춰주신 한 줄기 빛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가인의 계보는 우리에게 어두운 마음만 갖게 만듭니다.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만 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래서 점점 악해져만 가는 사람들... 이런 모습은 마치 하나님은 계시지 않고 사탄이 승리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희미한 빛이 비춰지기 시작합니다.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첫째 아들이 둘째 아들을 죽였지만 아담은 또 다시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또 아들을 주셨던 것입니다. 아담이 좋지 않은 기억 때문에 자녀를 낳기를 포기했다면 세번째 아들은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것이고 그러면,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언젠가는 또 빛이 비춰졌을 수도 있겠지만 어두운 세월, 더 어두워져만 가는 세월이 한참 동안 계속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해 가시지만 실제로 우리 눈에 보이는 모습은 굉장히 어두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렇더라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힘들더라도 상처가 있더라도 맡은 바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 힘을 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땅에 번성하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비록 죄를 짓기는 했지만 아담은 그 명령에 순종해서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첫째로 얻은 아들이 둘째 아들을, 그것도 훨씬 더 의로운 아들을 죽였습니다. 그 아픔과 상처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래도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고 그래서 셋은 이 세상에서 의인의 계보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로부터 다시 하나님의 역사를 이어가셨습니다. 셋을 하나님이 열어가실 새 시대를 위한 기초로 두셨던 것입니다.
셋은 아들을 낳아 에노스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성경은 에노스 시대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이야기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또 온전히 의지하기 시작했고 또 예배했다는 뜻입니다. 셋은 기초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에노스는 사람이라는 뜻도 되지만 연약함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담은 셋을 낳으면서 그를 가인의 계보와는 또다른 가문의 시작이요 기초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셋은 아들을 낳고 연약한 사람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참된 예배자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인류, 새로운 의인의 계보를 이어갈 기초로 태어난 셋은 살고 자라면서 인간의 연약함을 철저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연약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 이르러 사람들은 드디어 하나님을 진실로 예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셋의 계보는 강함을 표어로 삼은 가인 계보에 속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계보였습니다. 그들의 표어는 인간은 연약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셋의 계보 보다는 가인의 계보가 더 훌륭해 보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을 부인하고 자꾸 강해져만 가려고 할 때,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가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아야 비로소 제대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예배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기꺼이 여호와 하나님을 피난처요 구원자로 부를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예배자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런데, 셋의 아들 때에 이르러 셋과 비슷한 사람들은 인간의 연약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이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많은 능력을 가지고 많은 업적을 남기는 강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사람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셋의 계열에서 나중에 노아가 나왔고, 그를 통해서 이어진 의인의 계보, 그러니까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또 예배하며 살아갔던 사람들의 계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담은 실패자였습니다. 역사상 가장 비참한 실패자였습니다. 자신과 자신의 모든 후손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우여곡절 끝에 낳은 첫째 아들이 둘째 아들을 죽이는 비극을 경험했으니까요.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비록 죄인의 몸이었지만 계속해서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애썼고, 그래서 가인의 아버지가 되기도 했지만 셋의 아버지가 되었고, 그래서 이 세상에 또 다시 의인의 계보를 잇는 조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의 자리가 어떻든지 간에 거기서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우리는 아담의 자손이며 셋의 자손입니다. 또 에노스의 자손입니다. 죄인이며 또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에 최선을 다해 순종하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고 살면 됩니다.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살면 됩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연약하고 작은 우리들이지만, 또 우리는 우리의 그런 작은 몸부림들이 어떻게 쓰일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들을 모아서 오늘날에도 이 땅 위에 의인의 계보가 이어지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가인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의 셋과 에노스가 되게 해 주셔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약하지만 귀한 사람들로 쓰임받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