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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07.26.새벽예배 - 살고 죽었더라(창세기 25)


창0501to20 - 살고 죽었더라(창25).pdf


20130726D (#01).mp3.zip




  문 : 창세기 5장 1-20절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이 특별한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원하는 것들과 능력을 얻기 위해서 이런 저런 노력을 기울이며 살아갑니다. 그런 노력이 성공하면 자신이 원하는 것과 원하는 능력을 얻기도 하지만 실제로 살아보면 자신의 인생이 그리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처음 이런 현실을 발견하게 되면 굉장히 당황스럽고 허전해 집니다. 사실 오늘날은 그 누구의 인생이나 특별해 질 수 있다는 말을 여기 저기서 쏟아내고 있지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소유와 능력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가 특별해 져야만 특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데, 세상은 결코 사람 자체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특별하다는 것 자체가 허상일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저 특별한 것만을 좋다고 여기지만 왜 특별해야 하는지 정말 특별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심지어는 왜 특별한 것이 좋은지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특별해지려고만 노력합니다. 


특별한 것들만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소유하며,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 이런 것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 특별함은 그저 많지 않다는 것 뿐이지 그 이상의 큰 의미는 없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움직여 가고 또 유지되게 하는 것은 이름도 성도 알려지지 않은, 그러나 세상의 기초와 허리를 받치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5장은 아담의 계보를 적고 있습니다. 아담부터 시작해서 노아까지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적은 후에 6장에서는 다시 노아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5장은 아담에서 노아로 넘어가는 다리의 역할을 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저 이름만 나열되어 있는 듯한 이 족보에도 중요한 메세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우선 우리는 아담의 계보에 가인의 계보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담은 백 삼십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원래는 이 자리에 가인이 들어가 있어야 하지만 가인은 아담의 첫 자녀이자 장남이면서도 족보에 나오질 않습니다. 그것은 가인 쪽의 계보는 하나님께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다 하나님께 의미가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께 특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물론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점에서는 동등하지만 하나님께 특별한 사람들은 따로 있습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인간적인 조건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신실하게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이면 됩니다. 이것은 능력이나 소유와는 전혀 상관 없습니다. 거꾸로 가인과 그의 후손들처럼 가진 것 많고 능력이 탁월해도 하나님께 신실하지 않고 자신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름은 하나님께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특별하려면 하나님 앞에서 특별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생각에, 그리고 사람들의 평가를 기준으로 특별한 것은 사실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자기 만족이고 죽은 다음이라면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기억한다고 한 들 그 사람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가인처럼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마다 마음이 불편해지고 또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가 생전에 아무리 멋진 삶을 살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 이름을 부른다고 한 들, 차라리 그렇게 되지 않는 것만 못하게 됩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서의 특별함이란 오히려 평범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평범함이 모이고 모여서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니까요. 오늘 아담의 족보를 보면 그저 누가 누구를 낳고 그 후에 몇 년을 살고 죽었다는 기록만 주욱 이어지고 있습니다. 누구를 낳았다는 게, 그리고 그 이후에 오래 살았다는 게 그렇게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그건 누구나 하는 것이니까요. 9백년을 산들 뭐가 대수겠습니까? 천년이 하루 같으신 하나님을 기준으로 본다면 그들이 살았던 세월 또한 하루를 다 채우지 못한 세월인데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길게 살았던 세월 또한 땀을 흘려야 살아갈 수 있고,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현실과 싸우고 또 싸워야만 했던 그런 세월이었을텐데 말입니다. 이런 세월과 인생이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그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입니다. 오늘 아담의 계보 속에 나오는 모든 오고 갔던 이름들은 어찌보면 이 세상에 오고 갔던 다른 모든 사람들과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이름이 특별한 이유는 이들의 오고 감, 그리고 삶과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어져 갔다는 것입니다. 의인의 계보가 이어져 갔다는 것입니다. 


평범한 삶 속에서 변함 없이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는 아주 특별한 것이며, 그래서 영원히 그리고 참으로 특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이어져 가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성도들 마저도 인생에 대한 이해가 굉장히 잘못되어 있습니다. 세속적인 가치기준으로 자기 삶을 평가합니다. 그 기준으로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를 평가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가진 것을 가지면 안심합니다. 세상이 가진 것이 없으면 의기소침해 하고 굉장히 불안해 하고 허전해 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을 받아들이고, 그 기준을 맞추어 가는 일에 자신의 자존심과 가치를 겁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저울 위에 올라가 있습니다. 우리가 올라가 있는 저울은 이 세상에 있는 것 전부를 올려놓아도 눈금 하나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 저울의 눈금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성도의 신실함과 믿음입니다. 평범함을 참아내고 그 평범함을 하나님 앞에서의 특별함으로 바꿔낸 변함없는 인내입니다. 


화려한 가인의 계보에 속하기 보다는 평범한 셋의 계보에 속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무게가 나갑니다. 그래야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의미를 지닌 영원히 특별한 인생, 영광스러운 인생이 됩니다. 절대로 여러분의 삶을 이 세상의 눈으로 보지 마시고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게 맞는 것입니다. 그게 정확한 것입니다. 세상은 셋이 아니라 가인을 훌륭하다고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셋이 되고 에노스를 낳았으며 또 그의 후손들처럼 평범하지만 묵묵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편에 남아있었다면 그것으로 우리 인생은 충분합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께 충분히 특별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삶을 살아서 영원히 가치있고 영원히 특별한 인생을 만들어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