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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3.08.18. 주일오전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가복음 39)



막0827to38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가39).pdf


20130818SM (#0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8장 27-38절



예수님은 여행을 계속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 가이사랴로 가셨습니다. 이 곳은 헤롯 대왕의 아들인 헤롯 빌립이 로마를 숭배하기 위해서 신전을 건축한 후에 로마의 황제를 영화롭게 하고 또 로마에 아부하기 위해 가이사랴라는 이름을 붙인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은 황제 숭배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곳에서 제자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첫번째 질문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이었고, 두번째 질문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들은 실제로 그 어떤 질문보다도 중요한 질문이었습니다. 결국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사람들과 제자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를 드러내는 것이었고,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내용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살펴보는 시간 동안 과연 나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는가? 또 어떤 분으로 믿고 있는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것은 마치 배의 키와도 같습니다. 아무리 배가 다른 기능이 제대로 되어 있고, 그 안에 있는 선원들이 바로 일한다고 하더라도 키가 삐뚤어져 있으면 배의 방향 자체가 틀어지듯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시는 이 질문은 우리 신앙의 방향을 좌우하는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빌립보 가이사랴는 데가볼리 지역에 있는 도시입니다. 데가볼리가 어디죠? 기억나십니까?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쳐주셨던 곳입니다. 이 곳은 이미 예수님께서 오래전에 다녀가신 곳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께서는 일부러 제자들을 데리고 그 곳으로 되돌아 가셨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그 곳으로 가셨던 특별한 이유가 있으셨던 것이죠.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 새 길에서...” 그러니까 성경은 이 대화가 빌립보 가이사랴로 향하는 어떤 길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황제숭배의 도시를 향해 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리로 가는 길 위에서 제자들을 향해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황제를 숭배한다는 말은 힘을 숭배한다는 뜻이고, 또 힘을 주는 것들을 우상으로 숭배한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빌립보 가이사랴는 헐몬산의 중턱, 가장 아름답고 풍요로운 곳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도시는 화려함과 부유함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힘, 화려함, 부유함... 이것은 모든 인간이 갈망하고 숭배하는 대상입니다. 그리고 빌립보 가이사랴는 이 모든 것이 모여있고 그 모든 것들을 상징하는 도시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과 함께 그리로 향하는 가는 길 위에서 그 중요한 질문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이 질문을 우리에게 하실 때,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곳에서 묻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모든 사람이 힘과 화려함과 부를 얻으려고 달려가는 그 길 위에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신으로 삼아 섬기려고 달려가는 그 길 위에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갈등과 고민을 만들어 내며, 또 유혹과 시험이 있는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우리의 대답만이 가장 정확하고 참된 대답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의 똑같은 질문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 질문에 답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을 무시하는 사람들 틈에 있을 때, 하늘나라를 모르기 때문에 땅만 쳐다보면서 땅에 어울리는 방법으로만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걷고 있을 때, 주님은 “너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고 물으시고,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서 항상 그 질문의 대답을 들으십니다. 사실 말로 드리는 우리의 대답은 주님께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는지도 모릅니다. 빌립보 가이사랴의 길이라는 현실 속에서 우리의 삶을 통해, 몸짓으로 드리는 대답이 우리가 진짜로 주님을 누구로 생각하는지를 제대로 드러내는 것이니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대답했습니다. “세례 요한이라고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이것이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이었습니다. 일부는 죽은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메시야보다 앞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저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당시의 대중은 예수님은 누구신가하는 문제의 정답에는 근처에도 가지 못했습니다. 


제가 얼마전에 ‘완전한 복음’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은 미국의 한 목사님이 쓰신 책인데, 그 분이 이 책을 쓰시게 된 동기는 이랬습니다.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의 학생 한 명과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는 중에 놀랍게도 그 학생이 십년이 훨씬 넘게 교회에 다녔지만 단 한 번도 복음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냥 넘기려고 했는데, 그 생각이 떠나질 않습니다. 그래서, 그 학생만 그런가 아니면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더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교인들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성도들 중 굉장히 많은 숫자가 복음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복음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제대로 소개를 받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결국 예수님이 누구신지, 왜 나에게 예수님이 꼭 필요한지도 모르는 상태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그 책을 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성도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저는 ‘과연 우리가 사는 이 시대, 한국교회의 상황은 다를까?’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선뜻 우리나라 교회는 다르다고 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평신도였고, 또 부교역자로 교회를 오랫동안 섬겼지만 그 모든 교회 안에서 복음이 제대로 선포되고 가르쳐지는 것을 많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유대 땅에는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따라다니는 사람들도 참 많았구요. 그렇지만 막상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제대로 알고 또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이럴 수 있습니다. 명목상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그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로 남아있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 번째로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너희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희의 생각은 사람들의 생각과 어떻게 다르냐는 질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당당하게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이니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야이십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다른 사람들의 대답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대답은 정답이었습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대답을 들으시고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다른데 가서 이야기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정답이 나왔으니 정답에 대한 보충설명을 해 주신 것일까요? 그렇기도 하지만, 실은 정반대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답이지만 속으로 들어가 보면 전혀 정답이 아니었던 베드로의 대답을 바로잡아 주시기 위해서 말씀해 주신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말씀이었습니다. 진짜 그리스도는 극심한 고난과 죽음을 통과해서 부활과 영광에 이르시는, 그 일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는 말을 떠올릴 때마다 이 모든 것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부분에선가는 베드로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실 때,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습니다. 우리 말로는 항변이지만 원래는 꾸짖고 비난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왜 베드로는 예수님이 메시야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는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을 비난했을까요? 그것은 베드로가 사용했던 ‘그리스도’라는 말, ‘메시야’라는 말은 완전히 비뚤어지고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당시의 유대인들과 똑같은 메시야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름지기 메시야라면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건져주어야만 하고 또 다윗 시대의 영광을 회복시켜 주어야만 한다는 생각, 그 정도는 되어야 우리 메시야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말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메시야라고 믿었던 사람의 입에서 그것과는 정반대의 이야기가 흘러나오니 자신이 메시야라고 고백했던 그 사람을 붙들고 비난하며 대들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베드로를 향해서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혹독한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생각했고, 그것을 하나님의 일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신앙 안에서는 겉으로 보기에 정답같다고 해서 다 정답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인간의 일을 생각하며, 그것을 하나님의 일보다 더 크고 중요하게 생각하면 우리가 내놓은 정답은 실제로는 가장 정답에서 먼 오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성경에서 말하는 대로의 예수님으로 믿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답이라고 내놓은 것이 오답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내가 내놓은 답을 고집하느라고 진짜 답을 거부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항상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중심이 되게 만듭니다. 우리의 유익, 우리의 바램, 우리의 생각 등... 우리를 먼저 생각하게 만들고, 우리를 앞세우게 만듭니다. 물론 신앙은 우리를 가장 유익하게 하며,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을 이루어 줍니다. 우리의 생각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모두 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생각이라는 틀 안에서만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자기 생각만 내세웠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를 가장 사랑하셨지만 ‘사탄아!’라고 꾸짖으셨던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에 있어서 자기 중심적인 태도는 예수님의 가장 사랑하는 사람까지도 사탄의 마음과 생각을 지닌 사람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으니까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의 머리와 마음 속에는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한 자리 차지하고 떵떵거리며 살고 싶은 욕망이 꿈틀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생각하는 그런 왕이 되실 생각이 전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과 자신들이 가야할 길을 빌립보 가이사랴로 들어가는 화려하고 편안하기만한 길로 오해하고 있는 제자들과 무리들을 부르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참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따르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 요구하신 것이며, 실은 이런 방법이 아니라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불가능할 수 밖에 없습니다. 험한 산에 오르는 사람을 따라가면서 꽉 끼는 정장을 입고 높은 구두를 신고 따라갈 수는 없으니까요. 자기 부인 그리고 자기 십자가... 사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예수님께 맡겨진 길을 가면서 항상 입고 다니셨던 옷 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른다고 할 때, 꼭 입어야 할 옷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한 순간에 통째로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선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삶 속에서 제자들처럼 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내 생각이 있고 내 바람이 있어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고 그것을 따르는 것을 뜻합니다.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주님께 불평하고 주님을 비난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기억합니다. 그 때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치워주소서. 하지만 나의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주님께서 손수 보여주신 자기 부인의 모범입니다.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립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앞세우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자기부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그렇다고 해서 내 생각과 내 바램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앞세우는 것이 우리에게 고통이요 손해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신 하나님은 온 세상의 모든 것을 움직여 가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지극히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이런 하나님의 뜻은 선할까요? 선하지 않을까요? 선합니다. 그런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결국에는 나에게 손해가 될까요? 유익이 될까요? 당연히 유익이 됩니다. 그것도 가장 큰 유익이 됩니다.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려고 할 때, 당장은 불편할 수 있습니다. 손해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에 그렇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주님처럼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면 결국에는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나의 삶을 가장 선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믿고 살아가야 할 진리입니다. 따라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손해가 되는 일은 절대로 시키지 않으신다.” 믿습니까? 꼭 믿고서 멀리 보시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이것은 주님의 약속이기도 하지만 또한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 지는 방법에 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 방법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셨던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영광을 얻으신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 방법보다 더 지혜로운 방법이 있을까요? 이 방법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가 지혜롭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칼같이 챙기고 절대로 손해보지 않으려고 하고, give and take가 너무 철저하고.... 이런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이런 쪽으로 가까이 가려는 것이야 말로 가장 어리석은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증명해 보이신 가장 지혜로운 삶의 방법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너무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온 세상을 얻는다고 해도 자기 생명과 영혼을 잃어버리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빨리 이 계산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적어도 성도라면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저울 한 쪽에 온 세상을 올려놓고 다른 한 쪽에 나의 영혼을 올려놓을 때, 저울은 항상 내 영혼과 생명 쪽으로만 기울어진다는 것을 빨리 알아차려야 합니다. 세상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영혼을 풍성하게 하는 쪽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우리는 자기 목숨을 내어주어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는 죽음으로써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란 남을 위해서 나의 생명을 내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살아가는 동안 계속해서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생명을 남을 위해서 내어주는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뜻이 됩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그렇게 사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어떤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 결정을 내릴 때 이렇게 묻습니다. “꼭 이럴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꼭 그럴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면 그 일을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고 판단되면 대개가 그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방식으로 사는 삶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기 생명을 지키려고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워낙 꼭 필요한 선한 일도 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라서 그렇게 느껴지지 않지만 말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내어주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방법도 똑같은 질문에서 나옵니다. 선하다고 생각되는 일이 있으면 “꼭 이렇게 할 필요가 있는가?”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 아니다 대답이 나오겠죠? 그렇다고 생각되실 때는 무조건 그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아니라는 대답이 나오면, 그래도 그 일을 하십시오. 그렇게 하려고 애를 쓰십시오. 그래야 우리의 목숨을 남을 위해 내어주면서 살 수 있고, 결국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꼭 십자가를 지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싶어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렇게 쓸데 없는 일을 하셨을까요? 그것이 자신의 생명을 다른 이들을 위해서 내어주실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었고, 그래서 부활과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효과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에 대해서 성경이 계속해서 이야기 해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가끔씩 우리 권사님들께서 저에게 과자도 가져다 주시고 과일도 가져다 주십니다. 집에 가져가서 가족들과 함께 나누어 먹을 때면 권사님들의 정이 느껴져서 얼마나 마음이 푸근해 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러분. 권사님들께서 저에게 꼭 그렇게 해 주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권사님들께서 필요이상으로 베풀어 주신 친절과 사랑입니다. 그것이 바로 저와 저희 가족들에게 작은 행복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지는 일들만 하고 산다면 그 삶이 얼마나 매마르고 궁핍해 질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만약 내가 무언가를 내놓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 그만큼의 풍성함과 그만큼의 행복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나는 과연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래서 굳이 하늘나라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목숨을 지키는 방식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어주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삶은 참 지혜롭고 풍요로운 삶의 방식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너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삶의 방식이야 말로 하나님의 최고의 지혜인 십자가를 닮은 삶의 방식이니까 말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정말 무시 무시한 말씀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부끄러워 하시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캄캄한데 내어쫓겨 이를 갊이 있으리라”라는 구절이 그 사람을 위한 예언이 되겠지요. 그런데, 주님은 마지막 날 어떤 사람을 부끄러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한 사람”입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대개 이 말씀을 전도와 연관지어 생각하는데,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나와 내 말”은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살고 죽으셨던 방식과 제자들에게 해 주셨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목숨을 내어주는 방식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삶의 방법을 부끄러워 하면, 그래서 예수님을 흉내내며 살아가는 삶을 부끄러워 하며 기피하면 마지막 날 주님께서도 그렇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비극적인 인생의 결말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실로 어떤 분으로 믿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모습을 결정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왕으로 군림하시거나 힘을 휘두르지 않으셨습니다. 온 우주의 왕이셨지만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삶을 헌신하시고 또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가장 영광스러운 온 우주의 심판주가 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말의 의미,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말의 진짜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두번째 아담으로 오셨습니다. 자기가 왕 되려고 하다가 오히려 이 땅에 죽음을 가지고 들어왔고 자기 자손들을 저주 가운데로 몰아넣었던 실패한 첫번 아담 대신에, 우리에게 참된 삶의 길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두번째 아담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살아가셨던 삶의 방법은 우리들에게는 모범답안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수님의 삶을 닮은 답을 드릴 때, 우리도 예수님처럼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 하지 마시고, 최선을 다해서 그 분을 흉내내시고 최선을 다해서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열어주신 믿음의 눈으로는 십자가를 바라보시고, 주님께서 열어주신 귀는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라는 말씀을 향해 활짝 열어놓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십자가를 닮은 삶을 살아가라고 하시는 것, 다른 이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주시는 방식으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을 빼앗으려는 것이나 고귀하고 가치있는 희생을 강요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주님의 부활과 영광을 우리들에게도 나눠주고 싶으신데, 그러려면 그 방법 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씨앗에서는 같은 열매가 맺히지 않으니까요. 


주님은 오늘도 빌립보 가이사랴의 길을 걷는 우리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대답을 우리의 삶으로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자꾸 생명을 움켜쥐려고만 하지 마십시오. 내 삶을 내 손에 쥐고 끙끙거리며 살아가지 마십시오. 그러면 내 인생과 생명은 내 손 안에서 쭈그러들게 됩니다. 그 대신 살아가시면서 조금씩 조금씩 여러분의 생명을 다른 이들을 위해서 내어주며 살아가는 우리 주님을 닮은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하게 얻어 마지막 날 주님 품에서 주님의 영광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