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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3.08.24. 주일오전 -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마가복음 40)



막0901to13 -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마가40).pdf


20130825SM (#0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9장 01-13절



자기 생각만 하는 베드로를 크게 꾸짖으신 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불러 모으시고 그들에게 예수님을 따르고 또 구원을 얻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 이 두 가지였습니다. 요약하면 예수님을 흉내내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더불어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이런 모습의 삶을 싫어하고 또 부끄럽게 여긴다면 그것은 결국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나중에 예수님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에 예수님께서도 그 사람을 부끄러워 할 수 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당시의 제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굉장히 불편한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 누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자기 생명을 다른 이들을 위해서 내어주는 삶을 살라는 말씀을 좋아라하며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 길을 콧노래를 부르면서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심부름을 참 잘합니다. 그래서 굉장히 착한 아이인 줄 알죠. 그렇지만 조금 나이가 들고 꾀가 생기면 심부름하기를 굉장히 싫어합니다. 그럴 때 이런 아이들을 움직이려면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칭찬이든 아니면 금전적인 보상이든 그 싫어하는 것을 극복하고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만큼의 동기를 주어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주님을 흉내내며 살아가는 삶은 우리가 자연스럽게 좋아할 수 있는 모양의 삶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삶을 선택하려면 우리에게는 주님을 닮은 삶이 우리에게 주는 부담감을 넘어갈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강력한 동기가 필요합니다. 주님도 그것을 잘 알고 계시고 그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기에 충분한 동기를 제공해 주십니다. 


주님은 지난 주일 본문에서 그 첫번째 동기가 무엇인지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주님은 비록 힘들고 불편해도 우리가 열심히 예수님을 흉내내며 살아가는 일에는 그렇게 해야하고 그렇게 해도 될만큼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온 세상을 가지는 것보다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얻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한데, 예수님을 흉내내면서 살아갈 때 그것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선뜻 주님을 흉내내며 살아가는 삶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예수님께서 생각하는 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실 정도로 우리의 구원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지만 정작 그래서 구원을 얻게된 우리들은 우리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그만큼의 가치를 두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만약 여러분에게 10만원을 내어드리면서 ‘10달러만 주세요. 그러면 이걸 드릴께요.’라고 말씀드린다면 여러분은 그 거래에 응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당연히 응하시겠죠. 10달러는 기껏해야 2만원도 안되는 가치이니까요. 그렇지만 제 손에 들린 10만원짜리의 가치를 모른다면 그 사람은 절대로 자기 손에 있는 10달러를 내어놓지 못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려고 애쓰며 사는 것, 자신의 삶을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서 나눠주며 살아가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만약 우리가 주님처럼 우리 구원의 가치를 제대로 볼 수 있다면 우리는 힘들어도 그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예수님을 흉내내는 삶을 살려고 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구원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부인하려고 할 것이고 또 십자가를 지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꾸짖으시고 구원얻는 삶에 대해서 말씀하신 후, 6일이 지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이 세 사람만 데리고서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것은 이들에게 예수님의 영광스럽게 변화되신 모습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합니다. 예수님은 왜 이 중요한 광경을 이 세사람에게만 보여주셨을까요? 이 세사람만을 특별히 편애하시고 다른 제자들은 차별하신 것일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처럼 치사하게 은혜를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시는 분은 아니니까요. 저는 그 이유에 대해서 조금 더 연구하고 묵상해 보았습니다. 저는 먼저 이 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이지만 바로 앞에 나오는 본문에서 보면 자기 생각을 예수님께 강요하다가 호되게 꾸중을 받은 사람이고, 나중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야고보와 요한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10장에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실 때에도 서로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제일 높은 자리에 앉겠다고 청탁을 넣은 사람들입니다. 세 사람은 분명히 예수님이 제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훌륭한 사람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모든 제자들 중에서 가장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며 또 현실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이 세 사람을 특별히 선택하셨고, 이들과 함께 산으로 올라가셨고, 거기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를 돌이켜 보면, 그 때는 반마다 나머지 공부를 하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따로 남아서 나머지 공부를 했던 것은 그들이 공부를 더 좋아했다거나 잘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반대로 공부를 잘 따라오지 못해서 더 많은 공부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 제자만을 따로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신 것은 말하자면 나머지 공부를 시키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세 제자는 다른 제자들보다 훨씬 더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고, 그것을 씻어내기 위해서는 강도높은 공부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얼핏 보면 예수님께서 이 세 사람에게 특권을 베푸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였습니다. 이것은 특별대우라기 보다는 오히려 열등생들을 위한 특별레슨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산 위로 올라가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갑자기 변형되셨습니다. 성경이 변화라는 말이 아니라 변형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서 굉장히 색다른 것이었음에 분명합니다. C. S. 루이스라는 분은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덧입게 될 모습을 빛으로 둘러싸여 있는, 그래서 몸이 있는지 없는지 잘 구분이 되지 않지만 그 무엇보다도 찬란하게 빛나는 모습으로 그린 적이 있는데,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도 그런 모습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은 그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빨래와 흰 옷’하면 꼭 생각나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흰 옷은 더욱 희게 색깔 옷은 선명하게 하는 ‘옥시으인’입니다. 예수님께서 입고 계셨던 옷은 빨래의 달인이 옥시으인으로 천 번을 빨아도 그렇게 희어질 수 없을 정도로 하얗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입고 계셨던 것은 옷이라기 보다는 광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찬란하게 빛나는 순백의 광채를 온 몸에 휘감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그 때 보았던 것은 예수님의 옷이 아니라 예수님을 둘러싼 하늘의 영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산 위로 데리고 가셔서 하늘영광을 잠시 엿보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희게 빛나는 예수님 옆에 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제자들은 그들이 엘리야와 모세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엘리야와 모세, 이 두 사람은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하는 사람들이기도 했지만, 그것과 더불어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인물들이었습니다. 말라기 4장 4절부터 6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와 관련해서 두 가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번째는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반드시 엘리야를 보내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날이 왔다는 것을 알리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이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이 말라기의 말씀을 성취한 분임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라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게 해 준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산 위에서 제자들은 잠시동안이지만 하늘영광을 덧입으시고 원래의 영광을 되찾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고, 그 예수님이 바로 자기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 일과 관련해서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서’ 변형되셨고, 또 이 두 사람이 ‘그들에게’ 나타났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 변화산 사건이 이 세 제자들을 위한 특별교육과정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사람에게는 왜 이러한 특별교육과정이 필요했을까요? 그것은 제자들에게서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 그러니까 현실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씻어내고 예수님을 흉내내는 제자다운 제자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약은 예수님이 구원을 주시는 구원자라는 확신과 하늘의 영광을 맛보아 알게 되는 것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서 굉장히 많은 분들이 신앙을 현실적인 복을 얻기 위한 방법 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현실적인 복도 주십니다. 병도 고쳐주시고 또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기도 하시며, 인간관계의 문제를 풀어주기도 하십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은 현실적인 복을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신앙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결국 신앙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을 때만 사용하는 알라딘의 요술램프 같은 것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이런 신앙의 가장 큰 문제는 결코 현실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믿는 이유가 눈에 보이는 현실에 있으니 현실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그 뿐이고, 바라던 복이 주어지면 그 뿐입니다. 반대로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면 신앙도 시들해 집니다. 그렇게 현실에 울고 현실에 웃습니다. 그렇게 돌고 도는 인생을 살아가게 합니다. 


제가 20대 때, 제가 잠시 사랑의 교회에 출석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는 사랑의 교회가 지금처럼 시끄러운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대형교회이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교회이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때는 지금은 고인이 되신 옥한흠 목사님께서 목회를 하고 계셨는데, 어느 주일날 로마서의 어떤 본문을 가지고 하늘의 영광에 대해서 설교를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한가지 있었습니다. 그 분은 하늘의 영광에 대한 감격과 흥분을 가지고 열심히 설교하시는데, 거기 모였던 대부분의 회중들이 하늘의 영광이 무엇인지 감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를 포함한 회중들이 너무 무덤덤하니까 설교를 하다가 갑자기 멈추시더니 아주 안타까워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진짜 이게 뭔지 모르시겠습니까? 이 하늘의 영광이 여러분에게는 전혀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다른 분들은 몰라도 그 순간 저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번개같은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저에게 옥한흠 목사님이 가지고 계셨던 하늘영광에 대한 소망과 감격이 그대로 전해지면서 그게 무엇인지 경험되고 깨달아진 것입니다. 그 때 이후로 저는 그 은혜 때문에 꽤 오랫동안을 자다가도 웃고 그래서 깨서 또 웃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 흥분이 가라앉고 나서부터 하늘영광은 저의 소망과 삶의 이유가 되었고, 또 영적인 침체를 이기게 하고 삶의 어려움을 인내하게 해 주는 능력이 되어 주었습니다. 사실 제가 목회를 하는 큰 이유들 중의 하나도 바로 이것입니다. 제가 그 은혜를 알고 보니 많은 성도들이 하늘영광에 대한 확신과 감격이 없이, 그 능력을 모르는 채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면서 부터는 제 마음 속에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옥한흠 목사님께서 저에게 그런 역할을 해 주셨던 것처럼 성도들에게 이것을 알게 해주는 통로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생겨났습니다. 


제가 그 때부터 굉장히 좋아하게 된, 그 이전에는 전혀 좋아하지 않았던 찬송이 있어서 함께 불러보려고 합니다. 445장입니다. 가사를 깊이 묵상하시면서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반주 좀 부탁합니다. 


(함께 부른다)


저는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영혼의 힘이 다시 회복됩니다. 그래서 현실적인 실망과 어려움을 이겨낼 힘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에게도 이 찬송이 그런 능력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 찬송을 지으신 분이 힘든 현실과 어려움 속에서도 굳건하고 기쁘고 기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는 후렴에 모두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늘의 영광 하늘의 영광 내 마음 속에 차고도 넘쳐 할렐루야를 힘차게 불러 영원히 주를 찬양하리” 이것이 그 비결이고 이유였습니다. 찬송을 지으신 분의 마음 속에는 하늘의 영광이 차고 넘쳤습니다. 그래서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더라도, 캄캄한 밤에 다닐지라도 할렐루야를 힘차게 불러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찬송을 지으신 분과 똑같은 하늘영광 속에서 똑같은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제자들은 현실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현실 때문에 예수님을 꾸짖고 비난할 정도로, 또 그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할 정도로, 그리고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도 서로 높은 자리에 앉겠다고 예수님께 청탁을 넣을 정도로 현실에만 매달려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난 본문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답을 주십니다. 현실적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거기 묶여 있지 않고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충분한 이유가 되는 답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첫번째 답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구원을 소중하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구원이 가장 소중한 것이 되면 나머지는 덜 소중해 지고, 그러면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을 흉내내면서 살아가는 것도 충분히 시도해 볼만한 일로 여겨지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하나의 확신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라는 확신입니다. 주님은 이 확신을 가지라고 하시고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주신 두번째 답입니다. 아무리 우리 구원이 소중하다고 해도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유일한 분이시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면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아야 구원을 얻는다는 말도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 말씀은 우리에게 구원을 줄 수 있을지도 확실치 않은 사람의 이야기로 들려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 답, 그리고 굉장히 근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답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구원을 이 세상 전체보다도 소중하게 여겨야 할까요? 왜 우리는 꼭 구원을 얻어야만 할까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이라는 말을 그저 죄를 용서받고 하늘나라에 가는 일로 생각합니다. 틀린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가 빠져 있습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왜 하늘나라에 가야 하느냐고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거기는 슬픔도 없고 아픔도 없고 근심도 없기 때문에, 죽음도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하늘나라에 대해서 이렇게만 이해하면 이 땅의 삶이 충분히 편안해지고 또 행복해 지면 하늘나라도 더 이상은 매력적인 나라가 되지 못합니다. 저는 오늘날의 성도들에게 천국이 그 매력과 능력을 잃어버린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천국을 그저 그렇게 땅에서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좀 더 많은 곳으로, 그저 불행이 없는 곳으로 생각하니까 하늘나라가 여기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유와 능력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하늘나라가 하늘나라인 이유와 우리가 꼭 그 나라 백성이 되어야만 하는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늘나라가 하늘나라인 이유는 단지 그 나라가 나쁜 것은 하나도 없고 좋은 것만 있는 곳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늘나라가 하늘나라인 진짜 이유는 그곳이 완전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찬 곳이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그런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될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입장에서 본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세번째입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더라도 거기서 하늘의 영광을 누리지 못한다면 하늘나라도 우리에게는 별로 바람직한 나라가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영광스러운 나라에서 영광없이 영원히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그다지 행복하지도 만족스럽지도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구원을 얻는다는 것. 그것은 곧 하늘의 영광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이 땅에서는 그 맛을 조금만 볼 수 있을 뿐이지만, 결국 언젠가는 그 무한한 영광을 완전하게 누리며, 그 영광 속에서 영원히 살아가게 되는 것. 이것이 구원을 얻는다는 말의 최종적이고 가장 중요한 의미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진 것이고 우리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꼭 얻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땅에 있으면 우리는 결코 땅을 내려놓고 땅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결국 하늘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챙기면, 하늘의 영광을 챙기기 위해서 힘쓰면 그 믿음과 소망은 우리에게 하늘의 영광을 가져다 줍니다. 그리고 우리를 땅에서 풀어놓아 자유케 하고 행복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 증거가 바로 본문에 나오는 세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어 평생을 예수님을 섬기고 결국 남은 생명마저 믿음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내려놓았습니다. 서로 높은 자리에 앉겠다고 싸웠던 두 사람 중에서 야고보는 가장 먼저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순교자가 되었고, 요한은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제자가 되어 평생 주님을 섬기며 요한복음과 요한 1,2,3서 그리고 하늘영광으로 가득 찬 요한 계시록을 남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현실적이었기 때문에, 그 어떤 현실적인 손해도 보지 않으려고 애썼던 세 사람이 현실을 넘어서서 가장 영광스럽게 주님을 섬긴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절대로 현실적인 이유로는 일어나지 못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셨듯이 세상을 얻어도 목숨을 잃으면 소용이 없으니까요. 이런 값진 변화는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 하늘의 영광을 소망하는 사람들에게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세 사람의 가슴 속에는 영광스럽게 변화되신 찬란하게 빛나는 주님의 모습이 항상 살아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는 주님처럼 산 사람들이 주님처럼 영광스러워질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장 소중한 자신의 인생과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힘겨운 희생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그들 자신에게도 최고의 행복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것을 발견했고 그것을 위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하늘나라의 영광을 맛보았으며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장 값진 하늘나라의 영광을 샀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구원의 약속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한 분 밖에 없는 주님을 믿는 믿음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이 직접 보여주시고 약속하신 하늘의 영광이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가 져야 할 이런 저런 십자가를 바라보며 힘들어 하고 낙심하기 보다는 그 십자가 뒤의 찬란한 하늘영광을 보며 이 땅에서 주님을 닮은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 앞에 찬란하게 빛나는 흰 옷을 입고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서계십니다. 이제 져야 할 십자가만 바라보지 마시고 영광스런 주님께 눈길을 고정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보다 앞서 우리가 덧입게 될 그 영광을 덧입으셨던 그 분께 촛점을 맞추시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그 십자가도 훨씬 수월하게 지고 갈 수 있을 것이고, 그 일의 상급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참된 구원의 확신을 주시고, 하늘영광을 확실하게 보여주시는 은혜를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서 들려주시고 보여주신 이 확실한 증거들과 약속을 붙들고 이 땅 위에서 당당하고 능력있게 주님을 섬기는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