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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3.11.10. 주일오전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마가복음 51)



막1046to52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마가5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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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마가복음 10장 46-52절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여리고에 들르셨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이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일은 예수님에게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모든 목적을 완전히 이루시기 위한 여행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이번에 여리고에 들르신 일은 다른 때, 여리고에 들르신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닐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정작 여리고에 들어가서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으며, 그런 예수님에게 여리고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들려주지 않습니다. 짐작해 보면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들어 가셨다가 나오실 때까지 여리고에서는 별다르게 기록할만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신앙이란 항상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다가오시지만 우리 편에서 제대로 반응하지 않으면 그 은혜는 우리를 위해서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합니다. 말을 물가에 데리고 갈 수는 있어도 억지로 물을 먹게 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께서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 그 길 가에 앉아있던 한 사람, 성경이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라고 알려주는 그 사람이,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웅성웅성 떠드는 소리 속에 섞여서 들려오는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을 듣고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은 바디매오의 이런 행동을 굉장히 귀찮게 여기면서 하지 못하게 방해했습니다. 그렇지만 바디매오는 아랑곳하지 않고서 오히려 더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 소리는 저만치 앞서가시던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멈춰서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바디매오를 데리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바디매오는 겉옷까지 내던져 버리고 거의 알몸으로 펄쩍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묻습니다.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바디매오는 말합니다. “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즉시 대답하셨습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바디매오를 고쳐 주시면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제야 말로 제대로 한 번 살아보라고 그의 삶의 자리로 돌려 보내시려고 말입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그 길로 그냥 예수님을 따라 갑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바디매오에게 “네 믿음이 네 눈을 낫게 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바디매오의 믿음은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생각에는 눈을 뜨게 하는 믿음이 더 큰 믿음이라고 여겨지십니까,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이 더 큰 믿음이라고 여겨지십니까? 우리가 느끼기에는 기적이 일어나게 하고 치유가 일어나게 하는 믿음이 정말 커다란 믿음이고 또 더 좋은 믿음처럼 여겨지지만 실제로 성경이 최고의 믿음, 그리고 우리에게 꼭 있어야 할 믿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입니다. 그 이유는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 안에는 우리를 치유하고 기적이 일어나게 하는 믿음도 포함되어 있지만, 치유와 기적이 일어나게 한다고 해서 그 믿음이 곧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바디매오에게 치유도 가져다 주고 그것보다 더 큰 은혜인 구원도 가져다 준 그의 믿음은 과연 어떤 믿음이었을까요? 오늘은 본문을 통해서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가져다 준 바디매오의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무엇보다도 바디매오의 믿음은 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들음에서 나온 믿음이었습니다. 바디매오는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듣는 것을 통해서 세상의 모든 정보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항상 길거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에 대한 소문을 자동적으로 듣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예수님께서는 워낙 모든 사람들의 초미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렇다면 그가 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 중에서 가장 강하게 그의 관심을 끈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병자들을 고쳤다는 이야기들이었을 것이고 그 중에서도 특히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치셨다는 소식은 그를 흥분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다른 맹인들을 고쳤다면, 자신도 고침을 받을 수 있을 것이 분명하니까요. 그는 이제 예수님이라면 분명히 자신의 눈을 고쳐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귀에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이 들려오자 마자 앞뒤 볼 것도 없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냅다 소리를 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부를 때 사용한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은 사실 아주 굉장하고 특별한 의미를 지닌 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은 절대로 아무에게나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호칭입니다. 이 호칭이 처음 나오는 곳은 시편 17편 27절인데요. 거기서 이 호칭은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야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다윗의 자손’은 곧 약속된 메시야를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호칭이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앞을 보지 못하는 바디매오에게서, 그것도 굉장한 확신을 가지고 외친 외침을 통해 들려지고 있다는 것은 굉장히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고, 또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단 한번도 지켜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렇다면 바디매오는 어떻게 해서 예수님께서 약속된 메시야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을까요? 그의 확신의 근거가 된 것은 성경 말씀이었습니다. 그도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성경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이면 회당에서 읽혀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들었을 테니까요. 그가 들은 말씀 중에 이사야서 말씀이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사야서는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자주 자주 읽혀질 수 밖에 없었던 소망을 주는 말씀이었으니까요.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우리 성경으로 이사야서 35장 5절 말씀인데요. 바디매오는 분명히 그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었으니까요. 게다가 이 말씀은 단순히 질병의 치료해 주시는 은혜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그 앞 구절인 35장 4절을 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때가 되면 일어날 일들, 그러니까 메시야가 오시면 행할 일들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잘 알고 있었던 바디매오에게 맹인을 고치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게다가 그 사람이 맹인 뿐만 아니라 이사야서 말씀대로 듣지 못하는 사람도 고쳤다는 소식까지 들려옵니다. 바디매오는 자신이 잘 알고 또 믿고 있었던 이사야 말씀과 자신의 귀에 들려오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메시야가 할 것으로 예언되어 있는 일들을 글자 그대로 행하시는 예수님은 오시기로 한 메시야일 수 밖에 없습니다. 바디매오는 이 결론을 아무런 편견없이 받아들였고 그래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확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라면 당연히 자신의 눈을 고쳐주실 것이기 때문에 그가 예수님에 대해서 가지게 된 믿음은 흔들릴래야 흔들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에게 꼭 필요한 기능을 가진 어떤 기계 하나를 선물 받았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그 기계의 조작방법이 조금 복잡해서 꼭 설명서를 보아야만 하는데, 그 설명서는 전부 프랑스어로 되어 있고, 애석하게도 여러분이 전혀 프랑스어를 하지 못한다면, 그렇게 꼭 필요한 기계가 여러분의 손에 있어도 여러분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프랑스어로 된 설명서라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 설명서를 해석하게 해 주는 프랑스어와도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의 삶과 그 삶 속에서 만나는 이런 저런 경험들은 그 자체로는 좀처럼 진짜 의미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하나 하나의 경험들 자체는 그것이 우리 삶 전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우리의 경험이 가지는 진짜 의미와 역할을 제대로 보게해 주는 것은 바로 성경,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만약 바디매오가 이사야서의 말씀을 알지 못했다면 그는 예수님을 결코 다윗의 자손으로 믿고 고백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자신의 눈을 고쳐주실 것이라는 확신도 그만큼 약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일이 우리 삶 속에서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고 그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가 삶 속에서 경험하는 일들은 그저 무의미한 행과 불행의 연속으로 여겨질 수 밖에 없습니다. 바디매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고 또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일에 열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지금 당장 써 먹을 수 없어도, 그렇게 해 놓은 것이 어떤 순간 꼭 필요할 때, 여러분에게 없어서는 안될 도구가 될 것이고, 능력이 되어줄 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바디매오에게 이사야서 말씀처럼 여러분의 인생을 바꾸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바디매오의 믿음이 가지는 두 번째 특징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장벽을 넘어서는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디매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며 예수님을 향해 소리쳤을 때, 사람들은 바디매오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음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의 삶에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음을 예상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우리가 믿음을 드러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믿어도 적당히 세련되게 믿으라고 하고, 미치려면 곱게 미치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믿음을 따라 사는 삶 자체는 그것 자체로 현실의 저항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도 무시하고, 또 주일을 지키는 일도 무시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다수이니까요. 그래서 신앙의 원리대로, 신앙을 따라 지킬 것은 지키면서 살아가는 삶은 굳이 남들의 반대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로 장벽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나의 신앙을 드러내고 또 신앙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 앞을 막아서는 이런 저런 장벽들은 우리를 포기하게 만들고 주저 앉게 만드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서 참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그런 것들을 우리 삶에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이런 장벽들을 넘지 못해서 참된 신앙으로 나아가기도 전에 좌절하며 그런 신앙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진짜 복, 하늘의 복을 그냥 놓쳐버리는 모릅니다. 


사람들은 방해했지만 바디매오는 거기 굴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방해하자 바디매오는 더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이해해주지 않아도, 현실이 내 앞을 막아서도, 그리고 때로는 당장 눈 앞의 손해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주님을 향해 외치는 소리는 더 높아지고 더 커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가진 믿음의 진정성을 주님 앞에서 증명해 보이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살다보면 사실 힘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힘드는 것을 줄여보려고 현실을 따라가게 되죠. 그러면 당장은 그 힘드는 것이 줄어듭니다. 손해가 줄어듭니다. 그러나, 그렇게 반응하는 삶에는 하나님께서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다 자기가 알아서 이렇게 저렇게 하니까요. 그래서 그런 삶에는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적이 없습니다. 틈이 없는 삶에는 하나님이 해 주실 일이 없으니까요. 성도 여러분, 당장은 힘들고 손해가 되더라도 꾹 참고 인내하면서 믿음으로 살다가 틈이 생기면 바로 그 틈이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편을 들어주시는 통로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꼭 똑같은 것은 아닐지라도 더 좋은 것,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게 됩니다. 저는 우리 하나님이 이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바디매오가 더 큰 소리로 외쳤을 때, 예수님은 그 자리에 멈춰 서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예수님 곁으로 오게 했고 그를 고쳐 주셨습니다. 바디매오가 사람들의 방해가 무서워서 외치기를 그만두었다면 이런 은혜는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방해하고 또 막아서는 사람들이나 현실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더 큰 소리로 주님을 찾을 때, 사람들은 더 싫어하고 더 무시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때 주님은 우리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 멈춰 서십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하고 말입니다. 우리의 외침을 듣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시는 순간이 오면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몰라주어도, 또 장벽이 내 앞을 가로 막고 있어도 우리의 인내가 우리에게 이런 순간이 오도록 만드는 이유가 될 때, 우리는 우리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얻고 또 삶이 회복되는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진실한 믿음은 장벽 앞에서 포기하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 우리의 삶에 구원을 가져다 주고 꼭 필요한 기적 같은 은혜를 가져다 주는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끝까지 신실하게 외치는 그런 믿음입니다. 혹시 믿음으로 살다가 현실적인 장벽을 만나시거든 주님을 더 크게 부르시기 바랍니다. 그 주님을 놓치지 말고 더 굳게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은 멈춰 서실 것입니다. 우리를 그 분 가까이로 불러 “네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실 것이고, 성경의 약속대로 우리가 그 분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대로 들어 주실 것입니다. 


세 번째로 바디매오의 믿음은 예수님의 초청에 즉각적으로, 그리고 최선을 다하여 응답하는 그런 믿음이었습니다. 더 크게 외치는 바디매오의 목소리를 듣고 멈춰 서신 예수님께서는 바디매오를 데리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디매오에게 예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이것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바디매오의 반응이었습니다. 겉옷 좀 내던지고 예수님께 온 것이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하실지도 모르지만 당시 겉옷은 때로는 평생 한 벌 밖에 가지지 못하는 아주 귀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인이 되면 낙타털 같이 모직으로 된 겉옷을 한 벌씩 선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가난한 사람들인 경우에는 한 벌씩 밖에 소유할 수 없었고, 외출할 때는 겉옷이지만, 밤에는 덮고 자는 이불도 되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는 겉옷은 저당 잡지 말고, 저당 잡더라도 해가 지기 전에 되돌려 주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가난한 사람들은 차가운 밤에 이부자리 조차 없이 잠을 자야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걸인인 바디매오에게 있어서 겉옷은 그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그런 겉옷을 그냥 내던지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그것도 펄쩍 뛰어올라서 말입니다. 그것을 누가 주워가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다고 말했는데, 그렇게 본다면 바디매오야 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던지고 예수님께로 나아간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 나온 부자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모습입니다. 부자는 영생을 얻기 위한 해답을 얻었지만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정말 예수님 말씀대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기회는 항상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기회가 왔을 때,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그것을 붙들어야 합니다. 때로 그렇게 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이 있을지라도 그 기회를 꼭 붙들어야 합니다. 신앙에 대해서 조금 깊은 관심이 생길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기쁨이 회복되기 시작할 때, 이제 좀 더 제대로 신앙생활을 해야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 좀 더 기도해야 하겠다는 마음이 들 때, 그럴 때 우리는 그런 생각과 마음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바로 나를 하나님의 은혜를 향해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비슷한 기회는 또다시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 기회 자체는 또 다시 반복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때 받아야만 할 은혜, 그 때 주시려고 했던 은혜는 놓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계속해서 무시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습관이 됩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아무리 어마어마한 은혜의 기회가 주어져도 또 그냥 넘겨 버리고 맙니다. 주어도 받지 않는 사람, 주어도 그냥 넘겨 버리는 사람은 하나님도 어쩌실 수가 없습니다. 무슨 모양으로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나님 가까이로 부르실 때는 적극적으로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바디매오처럼 그 무엇보다도 그 부르심을 중요하게 여기시고 그 부르심을 향해 뛰어나가십시오. 마음을 다해 반응하십시오.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바디매오의 겉옷이려니 생각하시고 그것을 잠시 내려놓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눈을 뜨게 되는 것과도 같은 놀라운 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압니까? 나중에 눈 뜬 후에 보면 그 옷이 얼마나 더럽고 낡은 옷이었는지 알게 되고 그러면 별로 귀하게 여겨지지 않게 될지 말입니다. 저는 분명히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근거로 한 들음에서 난 믿음, 심한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한 진정성 있는 믿음, 그리고 즉각적이고 적극적으로 부르심에 응답한 믿음. 이것이 바디매오의 믿음이 가지는 모습이었고, 이런 믿음은 예수님도 충분히 인정해 주실만한 그런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바디매오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님 보시기에 바디매오의 믿음은 그를 구원하기에 충분한 믿음이었고, 그의 보지 못하는 눈을 보게 하기에 충분한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한 것도, 또 그에게 구원을 가져다 준 것도 엄밀하게 따져보면 그의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 모든 일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은혜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의 구원과 치료의 이유를 바디매오의 믿음에 돌리십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은혜로운 분이신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인정해 주시고 칭찬해 주시는 것을 너무 너무 좋아하십니다. 구원은 은혜입니다. 치료 또한 은혜입니다. 물론 우리의 믿음은 그 은혜를 받는 손의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그 구원과 치료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실 때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고, 너를 낫게 하였다”고 말입니다. 은혜로 된 일을 마치 우리가 잘 해서 얻은 것처럼 그렇게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평생 죄인으로 살았던 상처와 열등감 투성이인 바디매오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은 얼마나 큰 위로와 은혜가 되었고, 또 그의 마음까지 치료하는 능력이 되었을까요? 그 날 그는 단지 눈만 치료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중병에 걸릴 정도로 큰 죄를 지은 죄인에서 그 누구보다도 온전한 믿음을 가진 의인으로 인정받기도 했던 것입니다. 


때로 우리가 믿음으로 어떤 일을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상상 외의 좋은 것으로 그 믿음에 응답해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대체로 우리는 우리가 기대하지 못했던 좋은 열매를 맛보며 놀라고 즐거워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응답이 더욱 더 유익한 것은 그 응답 자체가 우리의 믿음을 향한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응답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죠. “그래, 바로 그 믿음이야. 그 믿음이 나를 기쁘게 한거야. 바로 그 믿음이 지금 네가 맛보는 그 열매가 맺히게 한 거야.”하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사는 성도가 이 세상에서 맛 볼 수 있는 기쁨 중에서 이보다 더 크고 달콤하고 든든하기까지 한 기쁨이 또 있을까요? 저는 제 마음 속에 그러한 하나님의 인정해 주심이 느껴질 때마다 정말 온 세상을 다 얻은 것같은 기쁨을 얻고, 그 동안 믿음 붙들고 살아가느라고 힘들었던 영혼이 가장 편안한 안식을 누리는 것을 경험하곤 합니다. 


바디매오의 믿음은 참된 믿음이었습니다. 말씀을 듣고서 생겨난 믿음이었고, 장벽을 넘어설 만큼 진정성 있는 믿음이었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미루지 않고서 즉각적으로 응답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믿음은 그에게 가장 필요한 치유의 은혜와 구원을 가져다 주었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하나님의 기쁨 가득한 인정과 칭찬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믿음도 바디매오의 믿음과 같아지기를 소원합니다. 말씀을 듣고서 그 위에 세워진 믿음, 장벽 앞에서 주저앉지 않고 그 장벽을 넘어서는 신실하고 진실한 믿음, 그리고 주님이 은혜의 자리로 부르실 때, 그것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며 즉각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믿음 말입니다. 바로 이 믿음이 우리에게 구원과 기적같은 은혜를 가져오는 믿음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또 우리를 칭찬받게 하는 능력있는 믿음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항상 이런 믿음을 향한 결단과 성장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하나님의 모든 은혜들을 가져오는 넓게 열린 통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