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128 - 이와 같이 복을 얻으리라(2013년 추수감사절).pdf
본문 : 시편 128편
성도 여러분, 복 좋아하시죠? 저도 복을 좋아합니다. 받는 복이든 먹는 복이든 다 좋아합니다. 아마 성도 여러분도 그러실 줄로 생각합니다. 물질적으로도 남들만큼 풍족했으면 좋겠고, 평생 큰 병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고 싶고, 자식들도 잘 키워놓고 싶고… 아마 이 세상에 이런 것들을 마다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 누가 이런 복을 보장해 준다고 한다면 모두들 당장이라도 그리로 달려갈 것이 분명합니다. 특별히 우리 민족은 언제나 복을 참 좋아해 왔습니다. 오복이다 칠복이다 하면서 사람이 살면서 누릴 수 있고 또 누리고 싶어하는 복들을 헤아리기를 좋아했고, 새해가 되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를 서로 주고 받으면서 복에 대한 소망들을 나누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니 서로 이 인사를 나눈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해를 거의 마감하는 자리에 있으니 세월이 정말 빠르기는 한 것 같습니다.
복을 좋아하는 것은 사람의 본능이고, 그것이 꼭 나쁜 것도 아니어서 그것 자체를 나무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복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하거나, 복에 대한 개념이 올바르지 않을 때는 그렇게 복을 얻고 누리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오히려 참으로 복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삶을 있어야 할 제 자리에서 이탈 시킬 수 있습니다. 첫째로, 적어도 예수 믿는 우리는 복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해지면 안됩니다. 그러면 신앙 자체의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게 됩니다. 우리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신앙의 목적은 복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것은 이 땅에서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해 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복은 그러는 중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며, 동시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위한 도구들 중의 하나입니다. 만약 신앙에 있어서 복 받는 부분이 너무 커져 버리면 그 크기만큼 신앙에서의 하나님의 크기는 줄어들게 마련이고, 하나님은 결국 나에게 복주시기 위해서만 존재하시는 분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마치 알라딘의 마술램프처럼 되어 버려서 내가 무엇을 달라고 하면 주는 분, 주어야 하는 분으로 오해받게 됩니다. 기도는 내가 맡겨 놓은 것을 찾기 위해 제출하는 청구서로 전락해 버리고 말죠. 저는 실제로 자신이 하나님께 어떤 것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그 원하는 것을 주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께 화를 내면서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하시는 분을 본 적이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우리의 신앙이 항상 100퍼센트 이상적인 신앙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리, 신앙의 목적의 자리에 앉아 계셔야 합니다. 사실 이것이 기독교 신앙과 다른 신앙을 구분 짓는 가장 중요한 점입니다. 다른 신앙은 자기가 중심입니다. 신을 위해서 무엇을 하더라도 자기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앙은 하나님이 중심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는 것이 그것을 통해 내가 다른 무엇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복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하면 이게 뒤바뀌어 버립니다.
둘째로 참된 복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참으로 복된 삶을 살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나는 A를 진짜 복이라고 생각하며 기대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진짜 복은 B라고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미 복을 주셨는데, 나는 그 복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내 인생은 계속해서 박복한 인생이 되고, 하나님은 유독 나에게만 인색한 분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또 반대로 참된 복을 받기도 전에 그렇지 않은 저급한 것을 붙들고 진짜 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만 얻으면…’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향해 달려가지만 실제로 거기 도착해 보면 허무함만을 느끼게 되는 이유가 바로 복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의 개념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참으로 복된 삶을 살기도 어렵고 복을 위해서 열심히 살면 살수록 더 열심히 허상을 쫓게 되는 그런 삶을 살기 쉽습니다.
오늘은 가장 큰 감사의 절기입니다. 우리가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아니어서 추수감사절이 그렇게 크게 와 닿지는 않을 수 있지만, 한 해를 거의 마감하는 시점에서 내가 한 해 동안 받은 복과 또 얻은 열매들을 생각해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시간을 보내는 것은 우리 영혼이 하나님을 기억하며 다시 한 번 풍성한 자리로 되돌아 가는데 꼭 필요하고 유익합니다. 오늘 말씀을 함께 묵상하면서 참된 복에 대한 생각들을 바로 세워 보시고 그 동안 나에게 주어졌던 복과 은혜들을 헤아려 보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풍요로운 마음을 회복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오늘 본문의 첫 구절인데요. 하나님께서는 첫 절부터 복을 선언하고 계십니다. 과연 무슨 복을 주실까 참 기대가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특별히 복을 주시겠다고 하신다면 그것은 정말 엄청난 복일 것이 분명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기로 하나님은 쩨쩨하신 분이 아니라 풍성하신 분이신데, 특히 오늘 말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 그래서 그 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하시니 더더욱 기대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잔뜩 기대하고 있는 우리들을 실망시키십니다. 얼마나 실망스러운지 하나씩 살펴볼까요?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실망스럽게도 이것이 첫 번째 복입니다. 아니, 세상에 땀 흘려 열심히 일해서 먹고 사는 일이 뭐가 그리 대단한 일입니까? 그건 누구나 다 누리는, 특별할 것도 없는, 어쩌면 우리의 당연한 권리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어쩌자고 이 당연한 것을 참된 성도가 누릴 첫번째 복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도 우리의 그런 불만을 아셨는지 다행히 이렇게 덧붙여 주십니다.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드디어 우리가 좋아하는 복과 형통이 나왔습니다. 역시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쩨쩨한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뒤에 이어지는 그 복과 형통에 대한 설명은 또 다시 우리를 실망시킵니다. “네 집 안방에 있는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남자와 여자가 만나 가정을 이루고 시간이 흐르면 아내는 아이를 가지게 되고 또 출산을 합니다. 이것은 거의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정해진 코스입니다. 게다가 자녀를 낳는 것은 믿는 사람들만 누리는 특권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가정들도 아이들만 잘 낳습니다. 그 다음은 그렇게 주신 자녀들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네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아직은 어립니다. 다 자라면 스스로 인생의 열매를 맺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그래서 어린 감람나무입니다. 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만 자기 자녀들하고 둘러앉아 저녁식사를 하는 게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행복해 하며 깔깔대며 자녀들과 함께 행복한 저녁식탁을 즐깁니다. 마지막 6절을 보면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라고 한 가지 복을 더 덧붙여 주시기는 하지만 그것도 별로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 봤자 대가 끊어지지 않게 해 주시겠다는 것이니까요. 게다가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이렇게 못을 박으십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애쓰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속에 뭐 특별한 것이 있습니까? 이 속에 여러분이 진짜로 복이라고 여기는 것, 정말 받기를 원하는 복이 있습니까? 여러분을 흥분하게 하고 감격하게 할만한 큰 복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 약속 속에서 무엇을 보아야 할까요?
우리는 복이라고 하면 늘상 평범하지 않은 것들을 생각합니다. 작은 것이 아니라 큰 것을 생각하고, 누구나 다 누리는 것이 아니라 나만 특별히 누릴 수 있는 것을 생각합니다. 돈이 남들만큼 있는 것은 진짜 복이 아닙니다. 더 많아야 진짜 복입니다. 자녀를 보고 건강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지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부모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공부도 잘하고 좋은 학교에 가야 하며, 커서는 돈도 잘 벌어야 합니다. 그렇게 남과 비교해서 내세울 만한 것, 자랑할 만한 것을 가져야 비로소 복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오늘 시편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은 모두 평범하기 때문에 결코 복이 될 자격이 없는 것들입니다. 아니, 복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진심으로 큰 복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운 것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니라고 하십니다. 분명히 그런 것들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된 참된 성도들에게 특별히 주시는 복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상황이 이렇다면 우리든지 하나님이시든지 누군가 한 쪽은 다른 쪽을 따라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이 문제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오해와 갈등을 만들어 내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누가 누구에게 맞추어야 할까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복의 개념은 다분히 상대적입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복이 있느냐, 복을 받았느냐 하는 것을 항상 남과의 비교를 통해 결정하고, 자기 욕심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합니다. 남보다 크고 많아야 복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고, 내 욕심을 꽉 채워줄 만큼이 되어야 비로소 진짜 복이 됩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지금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복이 복된 줄 모르고, 아무리 큰 복을 받아도 그 때 뿐이고 만족과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나보다 더 가진 사람은 얼마든지 있고, 내 욕심을 끝을 모르는 밑 빠진 항아리 같으니까요.
오늘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복들은 사실 신자들이라고 불리는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만 약속된 복들입니다. 그런데, 저나 여러분이나 스스로를 그런 사람들이라고 말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여러분? 우리들 중의 대부분은 오늘 시편에 기록된 복들을 이미 누려왔고, 또 지금도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복은 우리에게 모자라는 복입니까? 아니면 과분한 복입니까? 분명히 과분한 복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이 일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이미 넘치는 복을 누리고 있다고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께서 나에게 과분한 복을 주셨다고 해야 하고 내가 하는 것보다 받는 것이 훨씬 더 많다고 감사의 고백을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어떤 분은 다시 아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살아가지 않느냐고 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 시편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이야기이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야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시고 복주시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렇게 대하시고 그렇게 복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시니 우리는 이것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와 믿지 않는 사람들 모두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땅에 있는 것들을 사용하면서 살아갑니다. 이 과정에서 그것이 유형이든 무형이든 소유가 생겨나게 됩니다. 자기의 소유를 가지는 것은 믿는 사람들이나 우리들이나 마찬가지이고 그 소유를 누리는 것에도 차이가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부분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대우 해주시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특별히 더 크고 더 많고 더 좋은 것을 주시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대개 이런 기대는 믿음으로 바뀌게 되는데, 그 믿음이란 것이 "잘 믿으면 복받는다"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정말 그럴까요? 예수 잘 믿으면 현실적인 복을 더 많이 더 특별하게 받을까요? 여러분이 지켜보고 경험한 현실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까? 적어도 제가 본 현실은 그 믿음에서 벗어난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원래 무슨 일이든 성공 케이스가 항상 더 크게 보이는 법입니다. 예수 믿고 복 받은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잘 믿어도 뭐 잘 되는 것 없는 사람은 간증할 기회도 없고, 자기에 대해서 특별히 이야기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경우가 만약 90퍼센트라고 해도 사람들은 관심조차 가지지 않습니다. 반면에 예수믿는 중에 누가 봐도 복 받았다고 할만큼 복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소수이고 일부이지만 크게 부각될 수 밖에 없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일단 부럽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모두들 그 사람처럼 되고 싶기 때문에 그 사례를 일반적인 경우라고 생각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한번 쯤 누려보고 싶다고 여기는 그런 복들은 특별한 것이지 일반적인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이지 않다는 말은 말 그대로 모두가 다 누릴 수는 없다는 뜻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누구에게나 다 주시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다 이유가 있으시겠지만, 우리는 그 분이 왜 어떤 사람에게는 엄청난 복을 주시고, 왜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저 세상에도 부자가 있고 가난 자가 있듯이 교회 안에도 그렇다는 것이고, 그게 믿는 사람이건, 그렇지 않은 경우이건 간에 누구에게는 특별한 복을 주시고, 누구에게는 일반적인 본만 주시는 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그 복이 우리가 보기에 일상적인 것이라고 해서 그것이 복이 아닌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실은 그 평범한 복이 하나님의 가장 특별한 복입니다. 오늘 함께 교독한 시편 127편을 보면 이런 구절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그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우리의 인생을 일반적으로 표현한다면 무언가를 세우고 그것을 지키려는 노력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우려는 것이 다 세워지는 것이 아니며, 또 세웠다고 해도 그것이 항상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완벽하다고 확신하는 상황 속에서도 항상 변수는 있고, 그 변수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성을 든든하게 세우려 해도 하나님께서 다 세워지도록 돕지 않으시면 헛일이고, 다 지어진 성을 파수꾼을 세워 지키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으시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밤낮 없이 애쓰고 땀 흘려도 아무 것도 남는 것 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의 일상이 평범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세우시고 지키시는 복, 계속해서 붙들어 주시는 복을 주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남편이 수고하여 가족을 부양하고, 아내는 성실하게 가정을 돌보고, 아이들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는 것, 자녀가 결혼하여 손자 손녀를 낳아 또 나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께서 한순간도 빠짐없이 우리 삶을 세우시고 지켜주셨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거꾸로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이렇게 신실하게 채워주시고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일상적인 은혜가 없었다고 한다면 우리가 그토록 얻기를 바라는 특별한 복들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아주 중요한 진리는 특별한 복들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일상적인 것들이지 그 특별한 것 자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눈을 열어서 그 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무 평범해서, 누구다 다 누리고 있는 것 같아서 복이라고 여기지 못했던 진짜 복들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매주일 앉아 예배드리는 그 자리를 보시고, 함께 예배드리는 성도들을 보십시오. 식탁에 놓인 밥그릇을 보시고, 항상 옆에 있는 아내와 남편을 보시고, 또 자녀들을 보십시오. 들어가면 나오고 또 들어가면 나오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나의 숨소리를 가만히 들어보십시오. 직장에 다니시는 분들은 여전히 일터가 있음을 생각해 보시고, 학생들은 내가 다니고 있는 학교를 보시고, 함께 웃고 떠들 수 있는 친구들을 보십시오. 바로 그런 것들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들입니다.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당연하지 않으면 절대로 안되는 것들, 그런 것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진짜 복들입니다.
일상이 일상적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 이 세상에 이것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은 반드시 일상적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일상이 일상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세우시고 또 무너지지 않게 지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변함없고 신실하게 우리의 숨 소리 하나까지 지켜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은혜 가운데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냥 흘려보내면 그저 흘러가는 의미 없는 하루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상 속에 감추어져 있는 우리를 향한 과분하고 세밀한 하나님의 복을 볼 수 있고,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다면, 오늘 하루에 속한 평범한 시간들은 아주 특별하고 복된 시간들로 되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상 속에 숨겨놓으신 보석과 같은 은혜와 복들을 캐내어서 매일의 삶을 가장 복되고 감사 넘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