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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4.04.04. 금요기도회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사도행전 56)



행1034to48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사도행전5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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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10장 34-48절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이것이 유대인 어부이며 사도였던 베드로가 로마군 장교인 고넬료를 만나고 나서 입을 열어 처음으로 했던 고백입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얻은 하나님에 대한 참으로 귀한 깨달음이지만 사실 복음이 우리들에게도 복음될 수 있었던 이유 또한 하나님의 그러한 성품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해서 복음을 믿을 수 있었을까요? 저 멀리 유대 땅에서 성취되었던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우리를 위한 구원의 소식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외모, 그러니까 겉으로 보여지는 조건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에게는 그게 국적이든, 집안이든, 신분이든, 재산이든, 학벌이든, 건강이든, 심지어는 그 사람의 됨됨이든 그 어떤 ‘외모’라고 하더라도 전혀 신경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저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택할 자를 택하시고 그에게 믿음을 주시며 구원하십니다. 35절을 보면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그저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신다”고 말했는데, 따지고 보면 우리는 이런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하’자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죠. 그러니, 우리가 얻은 은혜는 고넬료가 받은 은혜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크고 놀랍습니다. 우리들이야 말로 정말 아무 조건 없는 은혜로 하나님을 알게 되고 또 구원을 얻은 그런 사람들이니까요.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향해서 “너희가 어디서 구원을 받았는지 기억하라”고 권면했는데, 우리들 또한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는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이 기억이 사라질 때 우리가 가진 구원의 감사와 감격 또한 희미해져 갈 것이니까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는 눈이라면 우리들 또한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나의 재산, 건강, 학벌 등등… 그 어떤 외모도 신경쓰지 않는다면 우리들도 그래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이 바르고 정확한 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듭나지 못한 세상의 기준으로, 그리고 우리 자신의 욕심을 기준으로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 우리들은 참된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고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이방인인 고넬료를 받아들이셨음을 선언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입을 열어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받으신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미 하나님께서 받으신 사람도 다시 복음을 들어야 한다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는 일입니다. 원래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처음부터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은 그 나라 자체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들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전부 자동적으로 구원을 얻은 것은 아닙니다. 그 중에서도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따로 있었고 그들만이 참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언약 안에 들어왔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언약 백성이 된 것이 곧 구원을 얻은 백성이 되었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고넬료는 그 당시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었음을 인정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 완전한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가 된 것은 아니었죠. 요즘으로 치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다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교회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은 어마 어마한 특권이 있는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돌보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당황스러우실지 몰라도 그렇다고 해서 다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을 듣고 그 복음 위에 자신의 믿음을 세우는 일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는 굉장히 많은 수의 성도들이 복음을 듣기 이전의 고넬료와 같은 영적인 상태로 계속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신앙이 복음을 듣고 거기에 대한 순종으로 시작된 복음적인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런 말로 교회에 나오기 시작합니다. “교회 나가면 좋아. 행복해. 복 받아. 함께 교회 나가자.” 그래서 교회에 다니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아주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고 신앙생활을 해도 정면으로 복음을 만나고 복음 앞에서 복음이 요구하는 믿음의 결단을 요구받지 못합니다. 또 자신도 그 복음 요구에 철저히 순종하려는 결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저 종교적이고 문화적으로 교회를 다닙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나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복음이 소개하는 그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지 못하고 또 백성과 종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 속에 온전히 거하지 않습니다. 과연 이런 상태로 남아 있어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양보해도 확실히 그렇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을 얻으려면 교회 다니고 그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꼭 한 번은 성경대로의 복음을 만나야 합니다. 그 복음 앞에 자신을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 위에서 믿음을 시작하고 그 복음 위에 자신의 믿음을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기 입으로 하나님께서 고넬료를 받았다고 말해 놓고서 다시 그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복음이 전해지자 마자 바로 그 자리에 성령님께서 임하셨고 거기서 복음을 들은 사람들을 사로 잡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은 굉장히 중요하고도 놀라운 사건입니다. 우리는 고넬료가 로마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로마인에게 복음이 전해졌고 또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임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이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당시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는 로마가 땅끝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비록 아직 지역적으로는 땅끝까지 복음이 가지 않았지만, 사람을 기준으로 보면 드디어 공식적으로 땅끝에도 복음이 전해 지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또한 그 자리에 성령님께서 임하신 것은 복음이 강하게 역사하며 구원의 사건을 일으키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구원의 보증이시고 또한 자녀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고넬료 집안에 임하신 성령님은 이제 유대에서처럼 땅끝에서도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나팔소리 였던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시자 고넬료, 그리고 그와 함께 모여 있던 사람들은 방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입에 하나님의 말씀이 담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입으로 하나님을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깨달음을 완전하게 증명하는 증거였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와 동행했던 제자들 또한 성령의 임재하심을 경험하였을 때 똑같은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그들에게 세례를 주어 완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해 주는 일에 주저할 필요가 없었고, 곧 바로 세례를 주게 됩니다. 정말로 아무런 편견 없는 하나님께서 차별없이 주신 복음이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능력이 된다는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조금 부수적인 것이지만 이 본문에서 우리는 성령충만에 대한 균형잡힌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들로서 누구든지 성령님의 충만한 임재를 경험해야 하고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만큼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성령충만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성령충만이 복음을 들은 결과로 주어지는 선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성령님은 자녀의 영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된 증거로 주시는 선물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듣기 전에, 복음과 상관없이 부어지는 성령충만이 있다면 그것은 다시 한 번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실로 성령충만하고 또 안전하게 성령충만 하려면 우리는 먼저 복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통해 거듭나고 새로워져서 성령님께서 거하실 만한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성령충만하면 하나님을 높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영이십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한 사람들은 항상 왕이신 하나님을 높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 자체가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이 됩니다. 말도 삶도, 태도도 하나님을 높이는 쪽으로 변화되어져 갑니다. 그래서 성령충만을 능력을 행할 도구로 생각하거나 자기의 능력을 높이 도구로 생각한다면, 그리고 성령충만했다고 하면서 자기를 높이는 방향으로 변해간다면 그 사람은 진실로 성령충만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는 오히려 영적으로 그릇되고 위험한 길을 가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모든 성도들이 다 성령충만한 그런 교회가 되기를 진실로 소원합니다. 그렇지만, 절대로 잘못된 방향으로 그렇게 되기를 원치는 않습니다. 우리가 참 복음을 믿고 자녀된 선물로 성령충만하며, 그 성령충만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삶을 살아가는, 그렇게 제대로 바르게 성령충만한 성도들의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성도 여러분도 항상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복음이 전해지자 마자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임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복음이 전해지는 일과 성령님은 이렇게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오늘 말씀은 그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일까요? 이 이유를 발견하려면 복음에 대해서 살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36절부터 43절까지가 베드로가 전한 복음의 내용인데요 복음 전체를 설명한 것 치고는 굉장히 짧은 내용이지만 그 안에는 복음의 핵심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다음 금요일에 살펴보기로 하구요. 오늘은 베드로가 전한 복음의 한 가운데, 그 중심에 무엇이 있었는지만 살펴 보고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36절은 복음을 일컬어서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전해진 화평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38절에서는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다”고 말하며 또 그 분이 두루 다니며 선한 일을 행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39절은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의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달아 죽였지만 40절은 하나님께서는 그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고 말합니다. 자신들은 그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이 세우신 모든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증거하고 있으며,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런 예수님에 대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 이름,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구원을 얻는다고 예언하였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것이 36부터 43절까지에 기록되어 있는 복음의 내용인데요. 이 복음을 가만히 들여 보십시오. 이 복음의 중심에는 누가 계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복음의 중심에는 그 어떤 것도 그 누구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복음이란 결국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모든 일들과 그 일을 통해서 이루신 완전한 구원에 대한 기쁜 소식을 말하는 것이니까요. 복음은 그저 구원과 복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복음은 그 복과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졌고 또 주어졌다고 외치는 예수님에 대한 소식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유의 주인이요 온 우주를 온전하게 다스리시는 왕이신 분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셨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분이시며 모든 산 자와 죽은 자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지을 재판장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죄 용서의 은총을 주시는 구원자로 예언되어져 온 분이라고 선포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바로 이러한 사실들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믿음의 기초에서 이런 모든 것들 중에서 단 하나도 빠지면 안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온 세상이, 죄 용서의 은혜가, 그리고 우리의 구원과 인생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중심 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을 믿고 그 위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날 고넬료와 그의 지인들 위에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임하시도록 만든 통로가 된 것은 바로 이 복음이었고, 또 이 복음 위에 세워지기 시작한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였는데,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우주의 왕이요 구원자로 선포되고 받아들여 지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마음 놓고 충만하게 임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성령충만을 진심으로 소망하십니까? 그 풍성한 생명과 평강 가운데 구원의 확신을 누리며 사시기를 바라십니까? 근심과 걱정을 이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그런 삶을 사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꼭 여러분의 믿음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두시기 바랍니다. 다른 어떤 것도 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다른 것이 있다면 그 무엇이라도 몰아내 버리십시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온전히 우리의 마음과 삶 가운데 임하시고 우리의 삶을 그 능력으로 다스려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의 삶과 믿음의 중심에 복음이신 예수님을 모심으로써 주님 약속하신 성령충만을 선물로 받고 그 안에 거하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