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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5.01. 새벽예배 -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창세기 136)



창4137to45 -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창136).pdf


20140501D (#1).mp3.zip





본   문 : 창세기 41장 37-45절



먼저 어제 다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나 하고 오늘 본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저는 어제 새벽기도회 말씀을 준비하면서 요셉이 바로에게 했던 이야기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가 꿈에 대한 해석을 들려 준 후에 바로에게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알려 주는 그 말이 저의 생각을 사로 잡았는데, 저는 그 속에서 요셉이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품으로 빚어져 가고 있다는 또 하나의 증거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이 제시한 흉년을 위한 대처방법은 사족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가 궁금해 하던 것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팔려온 근본도 알 수 없는 노예입니다. 비록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신분은 팔려온 노예입니다. 그런 노예가 바로 앞에서 아주 중요한 국정에 대해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라고 말한다는 것은 정말 주제 넘는 일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했습니다. 사실 누군가에게 주제 넘게 들릴 수 있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특히 자기 보다 힘있고 자신에게 커다란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 앞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더욱 더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경우에도 그렇게 할 수 있을 때가 있습니다. 주제 넘는다는 것을 알고 또 자신에게 좋지 않은 영향이 미칠 것을 알고 있을 때도 그렇게 할 수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는 그것이 정말 그 사람에게 전해 주어야 할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있을 때, 그리고 둘째는 그 사람을 진실로 위하는 마음이 있을 때입니다. 그럴 때는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흔히 성경의 사랑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 전서 13장을 보면 그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참된 사랑이 힘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진실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거짓을 말하거나 행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유익 보다는 상대방의 유익을 더 크고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실 이것은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너무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에 항상 진리만을 말씀하셨습니다. 거짓된 것을 통해서는 결코 사랑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예수님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사람이 되시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 귀한 생명을 내어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바로 앞에서의 요셉의 행동은 참된 사랑에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그는 용기를 내어서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흉년을 대비하는 방법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바로께서는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 애굽 땅을 다스리게 하시고…” 이 말 속에 사심이란 없습니다. 그저 애굽을 구하고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마음 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종으로 부렸고, 감옥에 쳐넣었던 애굽이고 애굽 사람들인데 말입니다. 


제가 살면서 느끼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심은 통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은 좀 걸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진심은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다리는 시간 동안 자기가 변하지 않으면 사람은 그 진심을 알아주게 되어 있습니다. 37절은 “바로와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라고 말합니다. 바로도 좋게 여겼습니다. 신하들도 전부 다 요셉의 이야기를 좋게 여겼습니다. 이것이 단순히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는 일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비록 그것이 우리 삶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는 되는 대로 엉망진창으로 사는데 내가 다른 사람들의 사랑과 인정을 받는 사람들로 만들어 주는 능력이 아닙니다. 거기 모여 있던 사람들 모두는 요셉이 바로와 대화를 나누는 모든 과정을 지켜 보면서 아마도 요셉의 됨됨이를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요셉의 주제 넘는 이야기가 단순히 주제 넘는 이야기가 아니며 진심으로 애굽과 애굽 사람들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나온 진실한 이야기라는 것, 그러면서도 현실적으로도 충분히 흉년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있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바로는 대신들에게 요셉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그리고 나서 요셉에게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그리고 나서 바로는 요셉을 애굽의 제 2인자인 총리대신의 자리에 앉힙니다. 그의 손에는 자신의 인장반지를 끼워 주어 그 권위를 분명히 해 주고,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요셉의 아내로 주었습니다. 그렇게 지위와 권위 그리고 배경까지 만들어 주었습니다. 요셉은 바로가 보기에도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 분명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명철하고 지혜로운 자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요셉의 능력에 대한 평가가 아닙니다. 바로는 요셉에게서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습니다. 그게 정확하게 하나님의 임재라는 것은 몰랐다고 하더라도 요셉의 됨됨이와 지혜, 그리고 그의 태도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는 성령님을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로 하여금 바로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게 만들었고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는 일로 연결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요셉의 모습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목표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 주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떤 성도들이 되어야 할까요? 어떤 속 사람을 지닌 성도들이 되어야 할까요?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더라도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서 자신들에게는 없는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게 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그렇게 만들 수는 없겠지만,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서 “저들이 믿는 하나님은 있다.”고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런 역할을 해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뿐만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성품까지도 보여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비유한다면 오늘날 기독교는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요셉의 속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총리가 된 요셉의 모습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드러내는 존재를 지닌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기독교는 그 두 가지 모두를 다 놓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드러내고 보여줄 수 있는 속 사람을 지니는 일에 관심이 없으니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니 다시 우리를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총명도 있어야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속 사람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지혜와 총명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그것과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이 될 수 밖에 없고, 그러면 세상은 오히려 우리를 인정해 주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와 말을 좋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항상 겉으로 보여지는 것들 보다는 성도로서 가져야 할 속 사람의 모습에 신경쓰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삶과 성품을 통해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드러내면서 귀히 여김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조금씩 조금씩 이 일에 있어서 진보를 보임으로써 사람과 하나님 앞에서 공히 사랑받는 존재들이 되어져 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