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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5.09. 새벽예배 - 핏 값을 치르게 되었도다(창세기 140)



창4218to25 - 핏 값을 치르게 되었도다(창140).pdf


20140509D (#1).mp3.zip





    본   문 : 창세기 42장 18-25절   




형제들을 간첩으로 몰아서 옥에 가둔지 사흘이 되는 날, 요셉은 형제들 모두를 옥에서 불러 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소개한 후에 그래서 그들에게 살아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말합니다. 한 사람을 볼모로 남겨 놓고 돌아갔다가 있다고 했던 막내 아우를 데리고 오면 그것을 증거로 받아들여 주어서 모두 살려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선 집안의 굶주림을 해결하라고 곡식까지 내어 줍니다.  그 제안을 들은 그들은 서로 말합니다. “우리가 요셉의 일로 죄를 지었다. 그 때 요셉이 애걸할 때에 그 괴로움을 보고도 모른 채 했더니 이제 그 괴로움이 우리에게 돌아오는구나.” 큰 아들 르으벤도 입을 엽니다. “거 봐. 그 때 내가 그 아이에게 죄를 짓지 말라고 했잖아. 이제 그 핏 값을 치르게 된거야.” 그들은 요셉이 자기들의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서로 그렇게 후회하며 이야기 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의 말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장남 르우벤이 아니라 둘째인 시므온을 가두었습니다. 아마도 요셉은 예전에 르우벤이 자기를 살리기 위해서 애썼던 것을 기억했을 것이고, 이 모든 상황을 제대로 이끌기에는 르으벤이 훨씬 더 적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이지만,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살피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요셉의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의 24절에도 요셉이 형제들 몰래 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얼마나 복잡한 감정과 격한 감정을 모두 억제하고 다스려야 했을까요? 서운함, 슬픔, 분노, 복수심, 반가움, 다시 살아나는 억울함 등… 정말 끓어오르는 온갖 감정을 다스려야만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더 이상 참지 못할 때는 몰래 나가서 울고 들어오면서 까지 끝까지 자기 감정을 억누르며 형제들을 대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왜 굳이 그런 선택을 했으며 끝까지 감정을 억누르고 그렇게 형제들을 대했을까요? 


그것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자신을 팔아 넘겼고 그렇게 모진 고생을 시킨 장본인들이지만 요셉은 여전히 형제들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런 세월을 지내면서 형제들을 용서하게 되었고 또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을 것 같습니다. 원래 가족이라는 것이 참 이상한 관계인 것 같습니다. 특히 사이가 좋지 않은 가족들인 경우 오랫 동안 몸이 떨어져 있게 되면 오히려 서로 간의 감정이 누그러지고 또 사랑이 회복되게 됩니다. 저는 분명히 요셉의 마음 속에서도 이런 변화가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요셉이 형제들에게 했던 행동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으니까요. 


처음 자기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린 형제들을 보면서, 비록 어떻게 보면 정말 좋지 않은 일들로만 점철된 자신의 인생이었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자신에게 꾸게 하신 꿈을 이루어 주셨다는 것과 결국 그 모든 것이 자기 자신과 가족을 살리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일어났던 일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요셉에게서 적어도 형제들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은 거의 사라지게 만들었고 그들을 용서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 요셉은 아마도 형제들이 자신에게 저지른 일을 그냥 용서해 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요셉은 더 좋은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에게 그런 일을 저지른 형제들에게 스스로 그 잘못을 뉘우칠 기회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요셉에게는 형제들이 과거의 잘못을 뉘우칠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기회를 주기로 했습니다. 그래야 스스로도 앙금이 없이 그냥 용서할 수가 있을 것이고, 형제들도 홀가분해 질 것이니까요. 그래서 요셉은 형제들을 간첩으로 몰아 옥에 집어 넣었고 그 일은 결국 형제들이 자기 잘못을 누우치는 일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셉의 첫번째 울음은 바로 그런 의미였습니다. 형제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알고 있었고 이제는 후회하며 뉘우칠 준비가 되었음을 보았기 때문에 흐르는 기쁨의 눈물이었습니다. 


성도가 당하는 어려움에는 크게 네 가지 정도가 있지 않나 합니다. 첫째는 악한 씨앗을 심어 그 열매를 거둘 때가 다 되어서 돌아오는 좋지 않은 일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필귀정이라는 하나님의 법칙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어려움들입니다. 둘째는 불의한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며 정직하게 살아가기 때문에 감당해야만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고난’ 이나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더 큰 믿음과 성숙한 믿음을 위한 고난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 별 이유 없이 힘든 일이 찾아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그만큼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욥의 경우가 바로 이런 고난을 당한 경우입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게 하시기 위해서 주시는 어려움과 고통입니다. 사람이란 항상 예기치 못한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찾아오게 되면 그 이유를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특히 힘든 일이 생겨나면 자신의 잘못을 되돌아 보게 되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고백하며 죄를 하나님 앞에서 처리하고 넘어가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전혀 엉뚱한 곳에서 문제가 생기게 만들어 자신이 꽁꽁 숨겨 놓았던 잘못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형제들을 대하는 요셉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 스스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죄의 무거운 짐을 계속 지고 가지 말고 부끄럽고 힘들더라도 홀가분한 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닮은 사랑을 보게 됩니다. 물론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모든 어려움과 고통들이 다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 처럼 대충만 생각해 보아도 고통의 이유는 네 가지나 되는데, 사실 우리는 아주 직접적인 연결이 있는 일들이 아니면, 우리가 경험하는 어려움이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는 알기 힘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녀인 우리에게 주시는 어려움은 우리 망하라고, 우리 괴롭게 하려고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모든 어려움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이며 우리가 더 영광스러운 우리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주시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어떤 이유로건 괴로움과 고통을 주시는 일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무심하게 그 일을 행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렇지만 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참되 유익을 위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도 고통스러우시고 또 힘드시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쳐 올 때, 항상 하나님의 선하심을 생각해야 하며, 또한 이유를 모를지라도 선용하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감추어 놓았거나 혹은 잊고 있었던 죄가 있을 때는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더 훈련 받아야 할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을 훈련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힘들게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어려움과 고통들이 제대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허락하셨던 고난처럼, 그리고 요셉이 형제들에게 행했던 일들처럼 말입니다. 


항상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 속에서 삶 속에서 경험하는 일들을 잘 해석하고 선용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