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4.07.11. 금요기도회 -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2(사도행전 69)



행1122to26 -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2(사도행전69).pdf


20140711FE (#1).mp3.zip





본문 : 사도행전 11장 22-26절




지난 주에 이어서 오늘도 바나바에 대해서 함께 살펴 보겠습니다. 우선 성경은 바나바가 착한 사람이었고 성령충만한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무런 자질도 자격도 없는 돌팔이 같은 사람을 데려다가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해 내려면 그 사람은 영성이나 인격에 있어서 적어도 어느 정도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적어도 끊임 없이 그런 면에서 성장해 가려는 열정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도구가 잘 준비되어 있어야 작업하기가 편하고 또 훌륭한 결과가 나오는 법이니까요. 하나님께 바나바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었고 성령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그것에 자기 생각과 마음을 맞출 줄 아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에 따라 살며 일하기 위해서 자기 안에 계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민감하게 움직였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사람이 갖춰야 할 이것보다 더 좋은 자질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경이 전해주는 바나바의 세 번째 특징은 그가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보실지 모르지만 제가 보기에 목회자만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흔들리기 쉬운 위치에 있는 사람은 또 없는 것 같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하실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목회자도 사람인지라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가 겉보기에도 잘 되어지기를 원하고 또 숫적으로도 성장하기를 원합니다. 저도 그럴까요? 저는 안 그럴까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저라고 그런 욕심이 없겠습니까? 사실 이 욕심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잘 되어져야 하고 또 믿는 사람들이 더해져야 하니까요. 그런데, 이것이 목사의 소원이 되고 목회를 하는 이유와 목적이 되기 시작하면 그 때는 정말 큰 일 납니다. 꿩 잡는 게 매라는 생각에 빠지게 되고 목회를 잘 하는 목사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또 숫자를 불리고 겉보기에 그럴 듯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넘어가서는 안될 선까지 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전혀 문제를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목적이 될 수 없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틀린 목적이 세워지면 수단은 금새 망가져 버리고 말게 됩니다. 목사는 성도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돌보는 성도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서, 풍성하고 능력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 그 성도가 자신의 이기적인 삶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영광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목사가 목회를 하는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사는 그저 목회를 잘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지게 마련이고 또한 그 목회를 잘 하기 위해서 하나님 보다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되기가 쉽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르심을 받고 일하기 시작하면서 저는 그런 목적에서 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참 힘이 듭니다. 끝까지 이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됩니다. 생각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외로울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끝까지 여러분의 영혼을 목적으로 삼아 섬기는 목회자로 살며 일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도록, 끝까지 이 길을 잘 달려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눈에 보이는 결과에 팔리지 않도록 꼭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많은 경우 목회자에게 필요한 믿음을 생각할 때의 큰 비전을 세우고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힘 있게 밀어 붙이는 믿음, 소원을 품고 기도하면서 죽을둥 살둥 애쓰면 무엇이든 다 이루어 주신다고 믿는 믿음을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목회자에게 정말로 필요한 믿음은 그런 믿음이 아닙니다. 사실 목회자에게는 이런 신념과는 정반대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목회자는 어떻게 보면 자기 자신과는 전혀 상관 없는 삶, 자기가 없어져 버린 삶을 살아야 하는 가장 대표적인 소명을 가진 사람이니까요. 성도 여러분, 교회의 주인이 누구이지요?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이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셨으니까요. 그러면 그런 교회는 누구의 뜻대로 되어져야 할까요? 당연히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교회를 이끌어 가시고 또한 세워가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그것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세워져 가야 하되 그 교회가 언제 얼마만큼 커지고 성장할 것인가 하는 것까지도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목사에게는 바로 이것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온전히 인정하는 믿음 말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이것을 인정하고 이것에 따라서 목회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목회 자체보다도 이것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어렵습니다.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만큼이루어 져야 한다’는 억누르기 힘든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큼 하나님께서 하실 것’을 믿고, 항상 그것으로 만족하면서 살며 또 목회한다는 것이 정말 쉽지가 않습니다. 이 믿음이 흔들릴 때면 여지없이 조급해 지고 마음에는 짜증이 밀려오며 때로는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럴 능력도 없으면서 확 한 번 교회를 인간적인 방법으로 부풀려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그렇게 욕심 부리고 나를 고집한다고 해서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보장도 없고, 그게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큼 이루어지는 것보다 그것이 더 나으리라는 보장도 없는데 말입니다. 


저는 모든 성도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목사는 더욱 더 그렇게 살며 그렇게 일할 수 밖에 없다고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사가 하는 일은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일이 되어버리고 마니까요. 그것이 자기 자신이라고 할지라도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한다면, 그것 때문에 일한다면 그 때부터 그 사람은 하나님의 종일 수가 없으니까요. 만약 목사가 그렇게 살고 또 그렇게 일한다면 그 일을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다 책임지겠습니까? 


바나바는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때에 하셔야 그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것을 믿었고, 그 믿음대로 순종하며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안디옥 교회를 돌보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결코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한다는 생각, 그것을 나의 힘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을 믿음으로 다스릴 줄 알았으니까요. 그랬기 때문에 그가 할 수 있었던 선택이 바로 고향에 가 있는 바울을 데리고 오는 일이었습니다. 이미 바나바는 바울이 자기보다 훨씬 더 능력이 많고 탁월한 은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그래서 바울을 데리고 와서 함께 사역하기가 더 어려웠습니다. 이상하게 들리실도 모르겠지만 인간이란 그렇게 생각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제가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경험했던 일입니다. 어떤 성도님이 저와 한 교회를 섬겼던 다른 목사님의 칭찬을 크게 하시는데, 그것을 듣고 있던 제 마음에 질투가 불타올라 은근히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어떤 사람이 목회자가 되는 것 같습니까? 가장 훌륭하고 성숙한 사람들이 목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는 교회에서 가장 상처 받기 쉽고 또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 되는 것 같습니다. 상처를 많이 받았다는 것 자체가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문제는 그 상처가 많이 치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목회를 하게 될 때, 이것이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킬 때가 굉장히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목격하고 있는 목회자와 관련해서 생겨나는 부끄러운 일들은 거의 모두가 바로 이 일 때문에 생겨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상처가 많은 사람들의 가지고 있는 공통적이고 굉장히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불안함과 열등감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하고 거부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과 항상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기 자리를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열등감입니다. 목사가 이 덫에 빠지게 될 때, 그는 목회를 자기의 능력과 가치를 증명해 보이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게 되고 또한 자기 보다 더 탁월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를 미워하게 되고 또 멀리하게 됩니다. 열등감이 많은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이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자기 자리를 잃어버리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열등감이 많은 사람들은 그 사람 때문에 내가 거절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나바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혹시 조금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게 전혀 문제가 되질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충만했던 바나바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통해 자신을 증명해 보이는 일이나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도록 돕는 역할을 해 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였기 때문에 바나바는 자기 보다 탁월한 바울을 안디옥으로 데리고 오는 일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아니, 바나바에게는 바울이 탁월하면 탁월할수록 바울이 함께 일하기에 더 덪합한 인물로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바울을 안디옥으로 데리고 왔고 그와 함께 하나님의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두 사람이 함께 사역했기 때문에 큰 무리의 성도들을 목회하는데도 전혀 지장이 없었고, 두 사람이 함께 교회를 섬겼던 그 일년 동안, 안디옥의 성도들은 정말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성도다운 성도가 되어서 그 때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이 붙여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나바가 목회자이기 때문에 목회자의 예를 들어 말씀드렸지만 저는 모든 성도들의 삶 또한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성도들의 삶을 괴롭히는 것 또한 열등감과 불안함입니다. 경쟁이 너무 심하고 이긴 사람만이 인정받는 우리나라 같은 사회에서는 이 열등감의 문제와 불안함이 그만큼 더 심각할 수 밖에 없고 성도들 또한 이 문제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문제가 예수를 한 참 믿은 이후에도 우리들을 괴롭히고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그냥 내버려 둔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만 이 열등감과 불안함을 근본적으로 치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의 가장 위대한 힘이 어디에 있는 줄 아십니까? 정말 그렇게 하려고만 한다면 우리가 우리 인생을 다른 사람의 눈이나 심지어는 나 자신의 눈으로 보고 평가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자기 계획과 일정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기 힘으로 이루어낸 것으로 자기 인생을 평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물론 계획을 세우고 열심히 노력하면서 살아가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절대로 그것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을 갖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나머지 모든 일들은 그 과정 중에 경험하는 일들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왜 사람이 열등감에 빠지고 또 불안함에 시달립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나 자신, 심지어는 다른 사람들을 기준으로 나의 가치를 평가하려고 들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기준을 세워 놓고 거기 만족하지 못하면 스스로가 못나 보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과 살아가는 모습을 기준으로 놓고 보니 그들만 못하면 스스로가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기준에 못 미칠 때 스스로 거절당할 것 같은 불안함을 느낍니다. 물론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사람들은 그렇게 대해왔고, 그래서 우리가 받은 상처가 있기 때문에 이것이 단지 추측에 불과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에 대해서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말이겠지요. 그렇지만 우리가 믿음을 가지게 될 때, 우리에게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제일 중요한 분이 됩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는 내 계획이나 일정, 나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나 일정,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것이 가장 중요해 집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런 것들을 기준으로 해서도 자신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정말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존재이며, 그 분이 나를 조건 없이 받아주셨고 그런 조건 때문에 나를 거절하지 않으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열등감과 불안함을 처리해 줍니다. 점점 흐려지게 만들고 나중에는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질투와도 점점 멀어지게 되고 다른 이들과 경쟁해서 이기려는 마음도 옅어지게 만듭니다. 그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일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그것만 감당하면서 살아갑니다. 한꺼번에는 아니지만 조금씩 조금씩 이런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참 믿음의 사람은 열등감이나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을 질투하며 그 사람들과 경쟁하여 이기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인정해 주고 축하해 줄 줄 아는 여유를 가지게 됩니다. 항상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일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이루어지기만을 소망하며,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 애씁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뜻과 일을 이루며 사는 그런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믿는 사람들의 복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당당합니까? 얼마나 겸손하며 영광스럽습니까? 


항상 이 믿음으로 충만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 손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도록 나의 삶을 내어 드리며, 그 안에서 허락된 삶과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참 성도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 이런 놀라운 열매들이 풍성하게 맺혀지는 뿌리깊은 믿음의 나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