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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4.07.18. 금요기도회 -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사도행전 70)



행1127to30 -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사도행전7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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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11장 27-30절




시간이 흐르면 무엇이든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리고 비슷하기는 하지만 다른 모양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은 좋은 쪽 보다는 그렇지 않은 방향으로 변하기가 쉽죠. 그래서 사람들이 그리워 하게 되고 또 자꾸 그리로 되돌아 가고자 하는 모습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원래의 모습, 그러니까 ‘원형’입니다. 교회도 그런 ‘원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행전의 교회’입니다. 처음 이 세상에 생겨난 교회였고 게다가 성령충만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으로 인도했고 모든 것을 내어 놓아 서로 사랑했던 정말 교회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현실 교회의 모습에 힘들어 하는 사람들은 거듭 거듭 반복해서 사도행전의 교회로 돌아가자고 외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행전의 교회도 완전한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연약함도 있었고 부족함도 있었고 또 미숙함도 가지고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원형이란 처음모습을 드러낸 것이어서 처음이기 때문에 가질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여러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들 중에서 아름답고 성숙한 모습과 그렇지 못한 모습을 잘 분별해서 그것들만 흉내내고 닮아가려고 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안디옥 교회는 참 본받을 만한 교회였습니다. 생긴지 얼마 되지 않은 교회였지만 성도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래서 교회 바깥의 사람들이 보기에도 믿는 사람들은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줄 수 있을 정도였고,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예수를 믿는 성도들과 교회가 보이고 있는 모습과는 반대가 되는 모습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오히려 세상과의 구분을 없애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성도들도 불신자들과 섞여 있을 때, 자신이 예수 믿는 사람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을 될 수 있는 대로 피해보려고 애씁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은근히 자랑합니다. 그러나, 성도와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지 않고 비슷하다는 것은 절대로 당연한 것도 아니고 자랑할 거리는 더더욱 아닙니다. 성도와 교회는 세상과 다를 때, 그 다름을 가지고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도록 부름받은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와 교회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믿지 않는 사람들과 섞여 있어도 분명히 구분될 수 있을 정도로 달라야 합니다. 그 안에 그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생명이 있고, 성령님께서 계시는데 그렇지 않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꼭 다르다는 소리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달라지고 있다는 소리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게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러운 칭찬입니다. 


이렇게 한창 안디옥 교회가 아름답게 성장하고 있을 때, 예루살렘으로 부터 선지자들이 찾아왔습니다. 이들의 방문은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그 선지자들 중에 섞여 있었던 아가보의 예언으로 미루어 볼 때, 이들은 이제 얼마 있으면 닥치게 될 커다란 흉년에 대해 이야기 주려고 그렇게 각 지역의 교회들을 방문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가보의 예언은 적중했습니다. 글라우디오  황제가 통치하던 41년에서 54년 사이에 네 번의 커다란 흉년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겨우 14년 동안에 네 번이나 커다란 흉년이 있었다면 그 지역의 살림살이가 어떻게 되었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흉년에 대한 안디옥 교회의 반응을 보면 굉장히 독특합니다. 만약 이런 큰 흉년에 대한 예언을 우리가 듣는다면 어떻게 움직였을까요? 아마 그 때부터 흉년을 대비했을 것입니다. 교회는 긴축재정에 들어가고 성도들도 개인의 삶에서 닥쳐올 흉년을 준비했겠죠. 그리고 예언되었던 흉년이 진짜로 닥쳐 오면 그렇게 준비한 것으로 버텨내기 위해서 힘을 썼을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고 또 나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이 일을 이렇게 대처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이 흉년에 대한 안디옥 교회 성도들의 반응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분명히 흉년은 그 지역에도 찾아왔습니다. 그런 점에서 자기들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죠. 그런데,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그 때, 자기 자신들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생각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44년부터 47년에 걸쳐서 예루살렘 지역에 심한 흉년이 있었다고 하는데, 바로 예루살렘 교회의 이런 사정을 헤아리고 그들을 돕기로 작정하고 정말로 헌금을 모아 바나바와 사울의 손에 들려 예루살렘으로 보냈던 것입니다.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자기들도 어렵습니다. 물론 예루살렘 만큼은 아니지만 참 힘겨운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 보다도 어찌보면 일면식도 없는 멀리 떨어져 있는 유대의 성도들을 도와 주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도울 때, ‘각각 그 힘대로’ 했다고 하는데요. 우리가 성경을 보면 이 일과 관련된 기록이 또 한 가운데 나옵니다. 물론 그 이야기는 안디옥 교회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실제로 그 이야기는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도울 때, 그들이 어떤 어떤 분위기 였는지를 짐작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그 이야기는 고린도 후서 8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중요한 구절이니까 한 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절부터 4절까지입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이 구절들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교훈하면서 마게도니아 지역의 교회들이 어떻게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도왔는지를 말해주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구절 속에서 정말 성도가 되고 성도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얼마나 다르게 보고 또 다르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제대로 믿으면 무엇이 얼마나 달라질까요? 우리는 예수를 믿고 달라지는 부분에 대해서 그렇게 크게 기대를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경험으로 보면 우리 자신도 그렇고 우리 주변의 사람들도 그렇게 그렇게 크게 달라지는 것 같지 않아보이니까요.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사실 신앙의 놀라운 복들을 놓치는 이유이고 우리 스스로가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변화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신앙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없는 부분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우리를 속속들이 변화시킬 수 있고 또 그래야 마땅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골로새서 3장 10절에서 예수 안에 있는 우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심지어는 지식까지 새로워진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지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판단하는 기준을 말합니다. 그러니 이 말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무언가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야 하고 생각하는 것이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참된 믿음이 어떤 사람 안에서 일으키는 변화라는 것입니다.


위에서 함께 읽은 마게도니아 성도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살펴 보십시오. 이들은 예수를 믿고 얼마나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먼저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마게도니아 교회들에게 주신 놀라운 은혜가 있다고 말하는데요. 그 은혜는 다른 것이 아니라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한 것입니다. 당시에 마게도냐 교회에는 엄청나게 힘든 일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한 가지는  ‘환난의 많은 시련’입니다. 적당한 시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어마 어마한 환난이 있었고 그것이 만들어 내는 시련이 있었습니다. 또 한 가지 그들은 “극심한 가난”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극심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심각하게 가난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엄청난 환란이 만들어 내는 많은 시련을 당하고 있고 게다가 굉장히 가난한 삶을 살게 된다면 과연 우리는 그 일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아마도 대개는 굉장히 고통스러워하고 움츠러 들며 자신을 챙기기에 급급할 것입니다. 마음도 굉장히 예민해 지고요. 그런데, 마게도니아 지역의 교회들이 이 두 가지 고통과 시험에 대해서 보인 반응은 정말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불어닥친 환란이 주는 시험 가운데서 크게 기뻐하고 있었는데요. 이것만으로도 너무나 놀랍지만 이 기쁨이 그들의 극심한 가난함과 만나서 이루어낸 기적은 더욱 더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때문에 이들은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서 힘에 부칠 정도로 많은 헌금을 했는데, 그래서 그 헌금이 정말로 흘러 넘칠 정도로 많아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헌금을 한 것도 사도 바울이 요청을 해서 억지로 참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만류했던 것 같습니다. 그 지역의 교회들도 너무 너무 어려운 형편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마게도니아 지역 교회의 성도들은 자기들도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일에 참여하게 해 달라고 그야 말로 애원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렇게 하라고 허락을 했더니 그렇게 해서 모인 헌금이 흘러넘칠 정도의 어마 어마한 액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과 비슷한 일이 그와 비슷한 상황에 있었던 안디옥 교회에서도 그대로 일어났던 것이고요. 


환난이 닥쳐와 그것이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 되어도 참 성도는 기쁨을 잃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 때문에 기뻐하게 됩니다. 그리고 참 성도는 자신이 가난하다고 해서 마음까지 움츠러 들어서 자기만 챙기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복음이 우리가 우리 자신과 이 세상, 그리고 그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보는 눈을 완전히 바꾸어 놓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으면 그 때부터 우리는 새로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 이전에 우리는 모두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끌어 모으는 삶을 삽니다. 마치 지구의 중력이 모든 것을 지구로 끌어당기듯이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면 그렇게 끌어 당기고 자기만 챙기는 삶이 달라집니다. 참 믿음은 우리를 자기 안으로만 끌어 당기는 자기 중심적인 존재에서 바깥으로 향하는 존재로 바꾸어 놓습니다. 


먼저 참 믿음은 우리를 우리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꿔 놓습니다. 이전에는 모든 것을 나 중심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환난과 고통은 절대로 기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참 믿음을 지니게 되면 환란과 고통, 그리고 시험까지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됩니다. 두 가지 면에서 그런데요. 첫째는 하나님께서 시험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의 믿음과 성품을 온전케 하시려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 오히려 그런 환난과 시험을 기뻐하게 됩니다. 둘째는 그 시험과 환난을 잘 견디어 내고 승리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스러운 상을 허락하실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 악물고 억지로 견디고 참는 것이 아니라 그 시험과 환난을 기뻐하게 되고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려고 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참 믿음이 있다는 첫번째 증거는 우리가 우리에게 닥친 환난과 시험을 이전과는 어떻게 다르게 대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참 성도는 이런 것들을 대하는 태도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성경의 기준으로 보면 그런 것들을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그 수준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고, 속에서 그런 변화가 진행되어져 가야 합니다. 


둘째로 참 믿음은 자기를 향하던 우리의 존재를 다른 사람들을 향하는 존재로 바꿔 놓습니다. 이것도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런데요. 그 믿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거하시기 시작하는데, 그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그 귀하신 생명까지 모두 내어주신 분이시니 우리 안에서 그 예수님을 닮는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바울은 마게도니아 성도들이 예루살렘 성도들을 도운 일을 ‘은혜’라고 말하면서 그들이 자신들도 그 은혜에 참여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고 말하는데요. 더 많이 나누면 나눌 수록 그 성도는 그만큼 더 자기 안에서 예수님을 닮은 모습이 커져 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그들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그만큼 더 온전히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것을 은혜라고 부르고 또 그 은혜에 참여하는 것을 그렇게 많이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참 믿음은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채워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줍니다. 내가 베풀고 나누어도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그래서 근심과 걱정이 없어지게 되고 그래서 그만큼 더 다른 이들에게 나누는 일이 편안해 지고 풍성해 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진실로 예수를 믿는 참 믿음을 가졌다면 우리 안에서도 당연히 이런 변화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제까지 나 중심, 내 가족 중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선택하면서 살아왔다면 이제는 하나님 중심,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중심으로 해서 내 삶을 바라 보고 또 반응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 믿음이 우리 안에서 일으키는 변화이며, 또한 가장 영광스러운 변화이니까요. 어려움 가운데서도 전혀 움츠러 들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기뻐하면서 그럴 수록 더욱 더 자기 바깥을 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복음을 믿는 믿음의 참된 능력이니까요. 


골로새 성도들이 그렇게 변화될 수 있었다면, 또 마게도니아 교회 성도들이 그렇게 변화될 수 있었다면 우리들 또한 그렇게 변화될 수 있고 또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참 믿음의 능력이고 또 증거이니까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도 이런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변화를 이루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믿음 안에서 이런 멋진 존재로 빚어져 가는 은혜를 사모하는 그런 참 믿음의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힘이 닿는 대로, 그리고 힘이 넘치게 나누는 삶을 살아서 자기 밖에 몰라 쪼그라 들대로 쪼그라든 이 세상을 넉넉하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