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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7.29. 새벽예배 -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출애굽기 21)


출0424to27 -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출2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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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출애굽기 4장 24-26절



책을 읽다가 보면 종종 어떤 부분에 가서는 그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모르겠고, 또 그 이야기가 왜 거기 갑자기 나오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경우에 부딛히게 될 때가 있습니다. 물론 그 이유가 정말로 그 부분이 그렇게 이해할 수 없이 어려운 경우도 있고 또 정말 엉뚱한 이야기가 갑자기 등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에는 앞 부분으로 돌아가 차분히 곱씹으면서 읽어보면 그렇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이해가 되고 또한 거기서 처음 만나는 엉뚱해 보이는 내용도 실은 앞 부분에서 이미 이야기 되었던 어떤 내용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니까 거기 오기 전에 앞에서 꼭 기억하고 이해했어야 할 것을 놓치면 뒤에 나오는 이야기를 이해하기 힘들어 지는 것이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도 어찌보면 그런 이야기들 중에서도 대표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드디어 하나님께 설득되어 애굽으로 돌아가 이스라엘 자손을 건져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족들과 함께 애굽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모세는 그렇게 길을 가다가 해가 지고 성경이 ‘숙소’라고 말하는 어떤 곳에 머물게 되었죠. 그런데, 여기서 모세와 가족들은 굉장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합니다. 하나님께서 거기서 갑자기 모세를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물론 모세의 아내인 십보라가 그것을 알아차리고 적절한 행동을 취해서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했던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정말로 모세를 죽이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취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십보라에게 나타나셔서 모세를 죽이겠다고 말씀하셨고 십보라가 자기 아들들에게 할례를 주고 그 포피를 모세의 발에 던짐으로써 그 일을 방지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갑자기 거기서 모세와 가족들을 만나 모세를 죽이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읽는 우리들을 굉장히 당황하게 만듭니다. 왜 하나님은 그렇게 오래 기다리시고 그렇게 오래 걸려 설득하신 모세를 그런 곳에서 죽이려고 하셨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갑자기 여기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셨던 것일까요? 왜 갑자기 여기 이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가 나온 것일까요? 앞서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려면 앞에 나온 이야기들을 뒤져 보아야 합니다. 


이야기의 앞부분으로 되돌아가 보면 모세가 광야로 도망쳐 나올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와 애굽 사람들이 모세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모세를 죽이려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사람 중에서는 모세를 죽일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사람은 과연 사람 중에서 해칠 사람이 없어지기만 하면 그 다음에는 영원히 죽음을 당할 위험이 사라지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죽음을 당할 위험이 사라져 버렸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언제든지 죽음을 당할 위험은 남아있습니다. 그 죽음은 바로 하나님께서 죽이시는 죽음, 그리고 영원히 죽는 죽음이 남아 있습니다. 죄 때문에 죽는 죽음 말입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시려고 했던 이유는 모세 자신 때문이었다기 보다는 사실 모세의 아들들 때문이었습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아브라함 때부터 난 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언약이었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모세는 광야에 살면서 얻은 아들들에게 할례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두 아들은 하나님의 백성에서 끊어진 상태였고, 그런 상태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책임은 두 아이들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할례를 주지 않았던 모세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책임을 모세에게 물으려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을 십보라에게 알려 주셨구요. 


십보라가 아들들에게 할례를 주자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고 했던 것이 멈춰진 것으로 보아서 모세의 죽음이 이 할례의 언약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언약에서 끊어지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려 주시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고 그 언약 가운데 거하는 일은 곧 생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언약 밖에 있으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가 될 수 없고, 그러면 하나님 보시기에 그것은 생명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십보라가 모세에게 ‘피 남편’이라고 부른 것에서도 나타나듯이 언약의 생명을 피에 있습니다. 피 흘림이 언약의 생명이고 피 흘림이 없으면 언약은 맺어지고 효력을 발생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언약은 성도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 맺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보겠지만 성경은 항상 생명을 피와 연결시켜놓고 있습니다. 죄의 결과가 죽음이기 때문에 그 죽음을 덮는 생명인 피가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림자를 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왜 그 십자가를 믿는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일까요? 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주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생명이신 피를 흘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믿는 믿음은 그 피가 우리의 죄를 덮고 죽음을 가져가기 위해서 흘려진 것임을 믿는 믿음이기 때문에, 그 믿음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생명언약 가운데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맺게 된 그 언약은 우리의 생명입니다. 우리가 그 언약 가운데 있고, 그 언약에 신실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 언약을 함부로 대하고 깨뜨리는 것은 곧 우리의 생명을 함부로 다루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요. 물론 우리는 은혜로 이 언약 가운데 들어 왔습니다. 은혜로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약을 함부로 대해도 괜찮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언약이 우리에게 은혜로 믿음을 통해 주어졌기 때문에 더욱 더 감사하며 언약에 신실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그 언약에 신실한만큼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 또한 풍성한 생명으로 가득해 질 것입니다. 


은혜로 구원과 영생을 얻은 사람들 답게 그리스도와 맺은 피 언약에 신실한 삶을 살아서 항상 그 풍성한 생명 가운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