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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09.21. 주일오전 - 아하수에로 왕 때에 있었던 일이니(에스더 1)


에0101to08 - 이 일은 아하수에로 왕 때에 있었던 일이니(에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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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에스더 1장 1-8절




‘성도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은 성도로서 듣고 듣고 또 듣는 그런 말입니다. 너무나 지당한 말이죠. 그런데, 이 말이 반박할 여지가 없는 신앙의 정답임에도 불구하고 이 말을 듣는 우리에게 항상 같은 반응을 불러 일으키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신앙이 그것을 가로막고 있다고 여겨질 때는 불만과 불평의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이것 저것 붙들고 살려고 하다가 낙심했을 때, 그리고 정말 믿음으로 살아보려고 애쓰다가 예배드리러 교회에 왔을 때, 그럴 때는 ‘믿음으로 살자’라는 말은 때로 우리 영혼을 다시 회복되게 하는 명약이 되고 우리 인생의 새로운 길 안내자가 되어 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살자’라는 말을 듣고서 어떻게 반응하든지 간에 변하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직접 세상으로 나가보면 믿음으로 사는 일이 결코 녹녹치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세상’이라고 부르는 현실은 믿음이 아닌 다른 원리로 움직여 가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고, 또 우리가 맞닥뜨리는 현실은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반면에 믿음을 가지고 그 현실을 살아내야 하는 우리들은 너무도 작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현실 앞에 설 때, 우리는 과연 내가 믿음으로 사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그렇게 믿음으로 사는 일이 나의 삶과 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가지게 되고, 스스로 그런 질문을 던질 때마다 우리에게 되돌아오게 되는 대답은 그리 긍정적인 대답들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믿음으로 살아보기도 전에 지레 겁을 먹거나 뒷걸음질 치게 되고, 또 믿음으로 살아내는 일에 때이른 좌절을 경험하게 되지요. 특히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의 모든 환경은 예수를 믿고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우리들에게는 정말 골리앗같은 난적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의 위험은 없지만, 현실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사회구조는 그 속에서 믿음을 지키며 사는 것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사람들이 ‘정상적’이라고 말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되어질 만큼 우리에게 적대적으로 느껴집니다. 


오늘부터 우리가 함께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눌 에스더서는 바로 그러한 우리들을 위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에스더서가 쓰어진 직접적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림절’이라고 부르는 절기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그 절기를 잘 지키게 하기 위해서 인데요. 부림절은 원래 유월절, 맥추절, 무교절 처럼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절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그 어떤 절기보다도 더 크고 의미 깊은 명절이었습니다. 부림절은 온 민족이 완전히 멸절당할 수 밖에 없었던 기가 막히는 상황에서 너무나 극적이고 기적적으로 건짐을 받은 날이었고, 또 그것을 기념하는 명절이었기 때문입니다. 에스더서는 믿음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상황,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상황 속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을 기록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에스더서 1절을 보면 ‘이 일은 아하수에로 왕 때에 있었던 일이니…’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는데요. 이 때 이스라엘 백성은 바사, 그러니까 페르시아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에스더서의 배경이 되는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간략하게 그것부터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페르시아의 포로가 된 것은 페르시아가 그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기 이전이었습니다. 그 일은 열왕기하 25장 이하나 역대하 36장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 때 계속해서 바빌론의 간섭과 괴롭힘을 받던 남유다는 결국 바빌론이 세웠던 꼭두각시 왕이었던 시드기야 왕 때에 예루살렘 성이 완전히 파괴되고 멸망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거민들 중에서 적어도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은 전부가 다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고 맙니다. 이 때가 기원전 586년이었는데요. 바빌론으로 치면 느부갓네살 왕 때의 일입니다. 성경은 이 일을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고, 그 징계는 70년 동안 계속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후 기원전 539년에 바빌론은 성경이 고레스 왕,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고레스 2세에 의해 정복되고 페르시아 제국, 그러니까 바사의 일부분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페르시아의 포로가 됩니다. 그런데, 고레스는 느부갓네살과는 다른 정책을 펼쳤습니다. 고레스는 칙령을 내려서 제국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 가게 합니다. 이 때가 기원전 538년이었는데요.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끈 사람이 스룹바벨이었고,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1차 귀환이었습니다. 그 후에도 주전 458년과 445년에 두 차례의 귀환이 더 이루어 졌는데, 에스더서가 기록하고 있는 부림절과 관련된 일들은 1차 귀환이 이루어지고 나서 50년이 조금 더 지난 때에 바사 제국에서 일어난 일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1차 귀환과 2차 귀한 사이에 고향으로 되돌아가 가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일이었습니다. 분명히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칙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런 이유로 고향으로 되돌아 가지 못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이미 그 곳이 그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다는 현실적인 장벽이었겠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타국에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라는 것도 잘 알고요. 그런데, 이런 저런 현실이 그런 그들의 발목을 잡아 버립니다. 그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아마도 일제의 통치가 끝나고 우리나라로 돌아와야 하는데 현실적인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재일동포들의 안타까운 심정과 비슷했겠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은 그들에게는 현실적인 일인 동시에 영적이고 신앙적인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남겨진 사람들은 스스로 현실을 핑계로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에 대한 바사 제국 내의 감정은 굉장히 좋지 않았습니다. 원래 다른 나라에 가서 살면 거기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유대인들은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외국에 포로로 잡혀 갔으면서도 그 나라의 신도 섬기지 않습니다. 또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유로 자존심도 어마어마하게 강합니다. 오히려 본토 사람들을 무시하는 듯한 모습마저 보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연히 미운털이 박힐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느헤미야나 모르드개처럼 관직에 진출하고 자리를 잡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 또한 함께 제국을 위해서 일하는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는 따돌림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유야 어쨋든 그 당시 바사 제국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이스라엘 민족들은 이런 정신적이고 현실적인 어려움을 모두 견디어 내야 했습니다. 


이렇게 살펴보다 보니 오늘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 또한 그 당시 바사제국 안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어려움을 경험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지만 이 세상이라는 현실을 떠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현실 안에서 때로는 그 현실 때문에 타협해서는 안되는 타협을 할 때도 있습니다. 마치 현실 때문에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택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려면 이런 타협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우리들을 참으로 힘들게 합니다. 또한 특히 요즘 우리 예수믿는 사람들을 향한 사회의 시각은 그 어느 때보다도 곱지를 않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목회자로서 여러분에게 용서를 구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요즘의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저와 같은 목회자들의 잘못 때문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앞에 너무나 부끄럽고 죄송스럽습니다. 용서해 달라는 말조차 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을 돌보고 격려해 주어야 할 사람들인데 오히려 그러지 않아도 힘든 성도들을 더 힘들게 하고 있으니까요.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 밖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성도로 산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는 다르게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다른 것을 이해해 주지 못합니다. 다른 이유로 다른 것은 다양성을 인정해줘야 한다고 너그럽게 잘 이해해 주면서도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지키고 양심을 지키느라고 자신들과 다른 길을 선택하면 그것은 이해해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흘기는 눈으로 보고 오해하면서 대놓고 불이익을 주거나 괴롭게 할 때도 있습니다. 이 시대의 우리나라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오늘 한국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그 짐이 굉장히 무거운 것만은 사실입니다. 우리와 너무 다른 사회가 우리에게 자신들과 같아지기를 요구하고 있으니까요. 


성경은 당시 바사를 아하수에로 왕이 다스리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아버지인 다리오 왕을 이어서 바사의 왕이 되었던 사람인데요. 이 두 사람은 바사의 최고 전성기를 구가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리오 왕은 일반 역사에서는 다리우스 1세라고 부르는 사람이고, 아하수에로는 크세르크세스로 불리는 사람입니다. 300이라는 영화를 보신 분이 있다면 아마 보셨을 것입니다. 코를 뚫고 벌거벗은 몸에 금 사슬을 치렁치렁 감은 모습으로 등장해서 그리스와 전쟁을 벌였던 바로 그 왕입니다. 아버지 다리오 덕분에 아하수에로는 바사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1절을 보시면 인도로 부터 구스까지 백 이십 칠 지방을 다스렸다고 말하는데요. 이 넓이를 계산해 보면 미국 땅덩어리의 절반이 훨씬 넘습니다. 땅 크기만 보면 별로 크지 않은 것 같이 여겨질 수도 있지만 당시 바사의 인구를 생각해 보면 바사 제국이 얼마나 큰 제국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바사의 인구는 4200만명 정도 되었다고 하는데, 그 당시 전세계 인구가 1억 5천만 명쯤 되었다고 하니, 그 당시 전 세계 인구의 거의 3분의 1이 바사의 통치를 받고 있었던 셈이 됩니다. 정말 어마어마하게 큰 왕국이었죠. 에스더서가 아무렇지도 않게 아하수에로라고 부르는 그 왕은 그렇게 거대한 왕국의 하나 밖에 없는 왕이었던 것입니다. 


아하수에로는 수산 궁에서 왕위에 오른 지 3년 되던 해, 그러니까 주전 483년에 역사상 전무후무한 성대한 잔치를 벌입니다. 성경이 이 잔치에 대해서 너무나 엄청난 기록을 남기고 있어서 성경학자들 중에서도 이 잔치에 대한 기록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선 아하수에로는 자기 영토 안에 있는 장군들, 귀족들, 그리고 지방의 관리들을 모두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는 잔치를 벌였는데, 그 기간이 무려 180일이었습니다. 이것은 당시에 사용되던 달력으로 하면 딱 반 년이 됩니다. 그러니까 잔치가 무려 반 년이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잔치는 사람들을 기쁘고 행복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열린 것이 아니라, 아하수에로가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의 부유함과 영광과 위엄이 얼마나 대단한 지를 과시하기 위해서 벌인 잔치였습니다. 그러니, 그 잔치의 풍부함과 화려함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 잔치에 대한 어렴풋한 그림을 이 잔치에 뒤이어 벌어졌던 또 하나의 잔치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요. 아하수에로는 고관대작들을 중심으로 한 180일간의 잔치가 끝나자 이번에는 수산에 살고 있었던 모든 백성들을 위해서 일주일간의 잔치를 벌입니다. 아하수에로는 귀족들이나 고관대작들 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백성들에게도 자기가 다스리는 왕국의 부유함과 힘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잔치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백색, 녹색, 청색 휘장을 자색 가는 베 줄로 대리석 기둥 은고리에 매고 금과 은으로 만든 걸상을 화반석, 백석, 운모석, 흑석을 깐 땅에 진설하고 금 잔으로 마시게 하니 잔의 모양이 각기 다르고….” 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그저 듣기만 해도 그 자리가 얼마나 휘황찬란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아하수에로는 왕궁의 후원을 하나의 연회장으로 꾸몄습니다. 대리석으로 된 기둥에 은으로 만든 고리를 설치하고 가는 베 줄로 화려한 천으로 만든 커튼을 드리웠습니다. 그리고 바닥에는 각종 대리석으로 판을 만들어 자리를 마련하고, 그 위에 금과 은으로 치장한 의자들을 늘어 놓았습니다. 물론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긴 탁자 위에는 생전 구경해 보지도 못했던 음식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겠지요. 식탁 위 풍경의 압권은 바로 술잔이었습니다. 술잔은 모두 금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 모양이 같은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왜 모든 금잔의 모양이 다 달랐을까요? 여러분, 우리가 어떤 집에 초대되어 갔는데, 이상하게 식탁 위에 모두 모양이 다른 특이한 그릇들이 놓여져 있다면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그 집 주인이 그만큼 다양한 나라로 여행을 다녀왔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그 날 탁자 위에 놓인 금술잔들도 그런 의미였습니다. 그 잔들은 모두가 다 외국을 침략해서 빼앗아 온 것들이었고, 그래서 각기 다른 금술잔의 모양 자체가 바사 제국의 힘과 크기를 과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술입니다. 7절과 8절은 제공된 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왕이 풍부하였으므로 어주가 한이 없으며…’ 원래 어주란 왕이 한 잔 따라서 잔을 내밀면 그것을 황송한 마음으로 받쳐 들고 마시는 것이 상례입니다. 만약 왕이 어주를 한 잔이 아니라 병채로 내린다면 그야 말로 성은이 망극한 것이죠. 그리고, 그것을 마실 수 있는 사람도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일반 백성들이 왕이 내리는 어주를 받아 먹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잔치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주가 한이 없이 베풀어 졌습니다. 어주란 왕의 은혜를 상징하는 것이니 그것은 그렇게 왕이 백성들에게 그렇게 다함 없는 은혜를 베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마시는 방법도 다른 때와는 달랐습니다. 다른 때는 자유가 없습니다. 더 마시고 싶어도 그럴 수 없고, 마시기 싫어도 마셔야 합니다. 그러나 그 날은 다른 법도가 정해졌습니다. 원하는 대로 너무 마셔 취해도 좋고 하나도 마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취했다고 벌이 내려지거나 마시지 않는다고 괴씸죄에 걸릴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한 없는 어주를 내어준 것이 왕의 부요함과 은혜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 어주를 자기가 원하는 대로 편하게 마실 수 있게 해 준 것은 아하수에로가 자신의 너그러움과 이해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취한 행동이었습니다. 평민들을 위한 잔치도 이렇게 화려하고 풍부하며 자유로웠다면 귀족들과 고관대작들을 위한 잔치는 또 얼마나 화려하고 풍성했을까요? 


187일간 가장 화려하고 풍성한 잔치가 벌어진 아하수에로의 궁전은 아하수에로의 힘과 그의 왕궁의 영광을 드러내기에 충분했습니다. 그것이 아하수에로의 왕국이었고, 또 그 나라를 다스리는 아하수에로 왕의 힘이었습니다. 그런데, 힘과 부라는 것이 그것과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는 한 없이 좋고 편한 것이어도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두렵고 주눅드는 것이며, 때로는 아픔을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당시 아직 바사에 남아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사의 부와 권력은 바로 그런 것을 의미했습니다. 아주 드물게는 그런 것들에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런 사람에게도 바사의 부와 권력은 온전한 버팀목과 방패가 되어줄 수는 없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들은 이방 땅에 잡혀와 살아가는 소수의 사람들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 때문에 온전히 그 세계에 속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사의 주변인으로 남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누구에게 보호받을 수도 없고, 그 누구도 보호해 주려고 하지 않는 그런 사람, 그들이 바로 바사 제국 안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초라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거대한 바사 제국이라는 현실 앞에서 느끼는 가장 지배적인 감정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혼란스러움과 무기력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바사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백성됨을 지켜가야 합니다. 믿음이 없어 징계를 받고 있으니 더욱 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들의 눈 앞에는 187일 동안 자신을 과시하며 잔치를 벌여도 여전히 강대하고 풍요롭기만한 바사 제국과 그 제국의 주인인 아하수에로 왕만 보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오해하며 미워하는 힘 있는 사람들이 보일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 지켜야 할 것들을 지켜야 하나 아니면 포기해야 하나?”, “내가 이런 다고 세상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무슨 소용이 있나?”하는 혼란스러운 질문에 빠졌을 것이고 그것은 다시 무기력감으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예전에 제 후배 하나가 저에게 많이 힘들어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후배는 국내 유수의 대기업에 취직했었습니다. 부서도 잘 배정받았지요. 외부 업자들을 자주 만나는 그야 말로 사내에서는 끝발있는 부서였습니다. 그런데, 그 부서에 배정되면서 그 아이에게는 고민이 생겼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 당시만 해도 타업체 사람들을 만나면 의례 ‘사례’를 받는 관행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후배는 그래도 신실한 크리스찬이 되려고 노력하는 아이였기 때문에 그게 굉장히 고민이 되었고 그래서 결국 그 ‘사례’를 거절하고 되돌려 주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타업체 사람들이 굉장히 이상한 눈으로 보더랍니다. 약간의 비웃음도 배어있는 표정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더 큰 일은 오히려 그 부서 내에서 터졌습니다. 그 부서에는 그런 관행 때문에 생겨난 또 다른 관행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상납’이었습니다. 부하직원들이 타업체에서 사례를 받으면 그 상당부분을 상사에게 가져다 주는 그런 관례가 있었는데, 처음 입사한 후배는 그것까지는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힘들고 오해도 많았지만 그렇게 사례를 거절하는 일에 어느 정도 익숙해 졌는데, 하루는 상사가 찾아오더니 화를 내면서 그 후배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받아서 너만 다 쳐먹냐?”하고 말입니다. 그 후배는 그 이야기를 듣고 그 오해가 너무 힘들어서 저를 찾아와 이야기를 했던 것입니다. 


아마 성도 여러분도 어느 정도는 삶 속에서 이런 고민과 쓰린 감정을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하나님 없이도 잘만 돌아가는 거대한 현실과 세상만이 눈 앞에 버티고 있는 듯한 그런 상황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 매일 맞닥뜨리며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니까요. 그래서 더 신실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려고 애쓰는 성도일수록 세상이 화려해 지고 거대해 지면 더 큰 혼란과 고민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그런 고민과 쓰라린 감정들은 세상을 사는 성도들에게는 어느 정도는 너무나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에스더가 살았던 바사제국과 많이 닮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아니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 세상은 바사제국처럼 느껴지게 마련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에스더서를 성경에 놓아두신 것입니다. 이 책을 통해 그 혼란과 때때로 찾아오는 무기력함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라고 말입니다. 이 세상을 맞닥뜨리면서 만나는 고민과 아픔, 그리고 혼란과 절망이 있으시다면 에스더서를 통해 하나님이 없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놀랍고 위대한 하나님을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악함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구원과 승리를 선물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 만남을 통해 맺힌 것과 묶인 것들을 풀어주시는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세상 앞에서 연약해지고 작아진 저와 여러분을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에스더서를 살피는 동안 우리 모두에게 이런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우리가 에스더서를 함께 묵상하는 동안 우리가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이 열리게 하소서. 
  2. 그래서 우리가 현실과 신앙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질문들이 풀려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