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 에스더 2장 1-18절
우리는 두 주 동안 에스더서가 기록하고 있는 사건의 배경이 되는 아하수에로 치하의 페르시아에 대해서 살펴 보았는데요. 물론 그 모든 내용이 에스더가 페르시아의 왕후가 되고 또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을 커다란 위기에서 건져내게 되는 일의 빼놓을 수 없는 배경이 되기는 하지만, 그 이유때문이라고만 하기에는 너무나 길고 또 지루하게 설명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거대함과 부유함, 그리고 화려함에 대한 설명이나 와스디 왕후가 폐위되는 과정은 사실 우리가 시시콜콜하게 모두 들어야 하고 또 알고 있어야 하는 이야기처럼 여겨지지 않으니까요. 아마 두 주간 이런 내용들을 살피면서 여러분 중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으신 분들이 있었을 줄로 생각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간에 에스더서가 기록하고 있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사건이 일어난 환경이고 또 배경이었습니다.
그 거대하고 화려한 왕국, 그렇지만 전혀 자격이 없는 왕과 관리들이 마음 내키는 대로 쥐고 흔드는 듯한 불안하고 허술하기 그지 없는 상황 상황들… 이것이 바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었던 환경이었고 결국 이스라엘을 민족의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간 직접적인 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현실 속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건져주시고, 오히려 영광스럽게 만들어 하셨습니다. 비록 그들은 그런 나라에 포로로 잡혀와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과의 약속을 지키시고 그들을 회복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루어져 가는 곳은 아무런 방해도 없고 거칠 것도 없는 진공상태의 공간이 아닙니다. 그 곳은 우리를 보잘 것 없게 만드는 거대한 세상이고, 이해하기 힘들고 신뢰하기 힘든 사람들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때로는 우리의 잘못과는 전혀 상관 없이 오해를 받고 손해와 고통도 경험하게 되는 그런 곳입니다. 이 곳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곳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인도해 가시는 우리의 삶의 자리입니다. 우리가 이런 환경에서 살고 있지 않다면 우리의 신앙과 하나님의 은혜는 전혀 실제적인 것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저 우리 마음을 위로해줄 뿐이지 진짜 능력있는 것이 되지는 못할테니까요. 그러나 우리의 신앙과 하나님의 은혜는 신앙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좋지 못한 상황,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무 일도 하고 계시지 않는 것같은 그런 환경 속에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아주 실제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신앙은 그 어떤 힘들고 불안한 상황 속에서도 의미있고 가치있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으로 보면 1장에서 2장으로 넘어가는 것이 마치 다음 날의 일처럼 기록되고 있지만 사실 1장 22절과 2장 1절 사이에는 최소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2장 16절에서 볼 수 있듯이 에스더가 페르시아의 왕후가 된 것이 아하수에로가 왕이 된 지 7년째 되던 해였고, 그 이전에 1년 동안의 준비기간이 있었으니까요. 그 3년 동안 아하수에로는 그리스와 전쟁을 벌여서 큰 패배를 맛 보았습니다. 이 전쟁은 아버지인 다리오 왕이 벌여 놓았던 전쟁인데, 결국 그는 전쟁을 끝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그래서 아하수에로가 그리스 정복이라는 과업을 물려 받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승기를 잡는 듯 했습니다. 테르모필레라는 좁은 계곡에서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연합군을 무찌르고 그리스의 많은 영토를 점령했으니까요. 그렇지만 살라미스 해협에서 그리스 연합함대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고 후퇴하게 됩니다. 역사기록을 보면 이 일 때문에 페르시아는 인명과 재산에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고, 아하수에로는 백성들로 부터 원성을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2장 1절은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후에 아하수에로 왕의 노가 그치매 와스디와 그가 행한 일과 그에 대하여 내린 조서를 생각하거늘…” 그 동안 그리스와 전쟁을 벌이느라고 정신이 없었던 아하수에로는 드디어 비어있는 자기 옆 자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아무튼 남자에게 아내가 옆에 없다는 것은 허전하기 그지 없는 일이고 또 전쟁에서 커다란 패배까지 맛 보고, 백성들 사이에서의 자신의 입지가 약해지기까지 한 그로서는 그 허전함과 외로움이 더 크게 느껴졌을 테니까요. 그 동안 그의 분노도 완전히 사그라 들었습니다. 분노가 사라지고 나서 생각해 보니 자신이 한 일이 후회스러웠습니다. 와스디는 참 괜찮은 왕비였는데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해서 내쫓아 버렸으니까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화가 났을 때는 절대로 중요한 결정을 내려서는 안되는 거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분명히 그 화가 사그라졌을 때 후회할 결정을 내리게 될 테니까요. 그러나, 이미 저질러지고 행해진 일은 나중에 후회해도 마치 이미 어인을 찍어 공표해 버린 조서처럼 다시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란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망쳐지면 그만큼 더 화가 나기가 쉽지만 적어도 그래도 그 일의 사후처리만큼은 냉정을 되찾은 후에 행하는 것이 지혜로울 것입니다.
왕의 측근들은 그러한 아하수에로의 심중을 읽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후회하면서 외로워하는 아하수에로에게 다시 왕후를 선발하자고 말합니다. 어차피 조서까지 내렸던 일이라 이제와서 되돌릴 수도 없었고, 그래서 아하수에로는 측근들의 이야기를 받아들여 왕후를 선발하는 절차에 들어갔습니다. 그 책임은 나중에 큰 역할을 하게 될 후궁담당 내시인 헤개의 손에 맡겨졌습니다. 성경은 바로 이 시점에 모르드개와 에스더를 등장시킵니다. 두 사람은 유다가 망할 때 마지막으로 포로로 잡혀 왔던 사람들의 후손입니다. 시간으로 계산해 보니 얼추 3세대쯤 되는 것 같습니다. 모르드개는 촌수로 하면 에스더의 사촌 오빠였습니다. 그렇지만 어려서 부터 에스더를 딸처럼 키웠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나이 차이기 꽤 나는 사촌지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사촌오빠인 동시에 아버지이기도 한 그런 관계에 있었습니다.
성경은 에스더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삼촌의 딸 하닷사 곧 에스더는 부모가 없었으나 용모가 곱고 아리따운 처녀라 그의 부모가 죽은 후에 모르드개가 자기 딸같이 양육하였더라” 분명히 성경은 에스더의 특징을 말하면서 그녀가 아름다운 용모를 가졌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거 봐라. 역시 에스더가 예뻤기 때문에 선택되고 그래서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지. 만약 나처럼 밉상이었다면 택도 없다.”고 투덜거릴지도 모릅니다. 하나님도 외모로 사람을 차별한다고 말입니다. 물론 에스더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에스더는 단지 그것 때문에 왕비가 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용모가 곱다’는 말을 둘러싸고 있는 설명들을 잘 살펴 보아야 합니다. 에스더는 현실적으로 보면 무척 불우한 아이였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주 어려서 부모를 잃고 사촌 오빠 밑에서 자랐으니까요. 그리고, 우리가 가만히 보면 성경이 에스더를 ‘용모가 곱고 아리따운 처녀’라고 설명하는데요. 용모가 고운 거나 아리따운 거나 똑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말 성경으로 보면 그저 겉모습이 아름다운 여인이었다고만 생각되지요. 그런데 원래 ‘아리땁다’는 말은 “보기에 좋았다”는 뜻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이 말이 처음 성경에서 어디에 나오는지 기억하실 겁니다. 어디 나오지요? 그렇습니다. 창세기 1장에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루 하루 그 날 만드실 것을 다 만드신 후에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있는 것을 바라보시면서 보이신 반응을 “보시니 좋았더라”라는 아주 단순한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에스더를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되고 있는 ‘아리땁다’라는 말 또한 정확하게 그 두 단어로 이루어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에스더가 아리따운 처녀였다는 말은 그가 겉으로 보기에만 그럴 듯 한 여인이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에스더가 하나님께서 처음 만드신 세상처럼 조화롭고 온전한 성품을 지닌 사랑스러운 여인이라는 뜻이며, 그런 그의 성품이 겉으로 드러날 정도였다는 뜻입니다.
요즘 제가 우연찮게 보기 시작한 텔레비젼 드라마 하나를 계속해서 시청하고 있습니다. 아시안 게임 때문에 결방한다고 사람들이 방송국으로 전화까지 해서 항의를 하고 난리를 했던 그 드라마인데요. 다 아시죠? 바로 “왔다 …”입니다. 저는 거기 나오는 배우들의 연기가 너무 좋아서 계속 보고 있는데요. 그런데, 거기 보면 희대의 악역이 하나 나옵니다. 사실 너무나 비현실적일 정도로 악하죠. 너무나 악해서 저 사람이 어쩌다 저렇게 까지 되었을까 하는 ‘연민의 정’까지 불러 일으키는 사람인데요. 거기 나오는 비단이라는 어린아이가 그 배우를 보고 ‘낯바닥 이-쁜 아지매”이라고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어떻게 저렇게 이쁜 사람 마음이 그렇게 못됐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겉모양이 아름다운 것과 그 사람 자체가 아름다운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용모가 아름답다고 해서 아리따운 것은 아닙니다. 두 가지는 일치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다 갖춘 사람을 만나면 그만큼 더 귀하게 여기죠. 그리고 사실 외모가 아름답고 출중한 것처럼 남들이 가지기 힘든 장점이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 조건의 탁월함 때문에 오히려 그 속사람까지 아름답기는 참 어렵습니다. 무언가 남이 가지지 못한 장점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을 높이고 자기 중심적이 되기 쉽다는 뜻이니까요. 그래서 그런 장점을 가진 사람이 거기다가 아름다운 존재와 성품까지 갖추고 있고, 그것이 이렇게 겉으로 흘러 나올 정도라면 그 사람은 거의 대부분 치열하게 높아지고 이기적이 되어져 가는 자신과 열심히 싸워온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죠.
성경이 말하는 에스더가 바로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외모도 아름다웠지만 그 외모에 뒤지지 않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고 그것이 그의 외모에 더해져서 에스더를 더욱 더 빛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실 어떤 사람을 사랑스럽게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의 외모가 아닙니다. 처음에 외모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계속해서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학시절에 교회후배 중에 이렇게 보고 있으면 “참 못났다”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던 여자아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아이를 정말로 알게 되고 나서도 그 아이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아이의 내면이 너무 예뻤기 때문입니다. 그 후배가 속해 있었던 모임 안에 예쁜 아이들이 많았지만 그 아이들을 모두 재치고 항상 그 후배가 인기가 제일 좋았습니다. 물론 그 아이처럼 외모가 훌륭하지 않아서는 아무래도 왕비가 되기는 어렵겠지요. 그렇지만 충분히 사람들에게 왕비보다 더 큰 사랑을 받는 사람은 될 수 있습니다. 저절로 저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되게 만드는 그런 사람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나눠주신 복이고 또 가능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충분히 그 복을 누릴 수 있다고 믿습니다. 사실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가지고 있는 진짜 능력이니까요.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을 닮아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닮아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신앙이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분명히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하나님을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더디더라도 그 아름다운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아름다운 내면을 지닌 사람으로 변해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절대로 세상이 우리에게 줄 수 없는 가장 특별한 복입니다. 우리가 성령님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것들과 싸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사람, 그리고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운 그런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아름다운 처녀들을 모두 궁으로 들이라는 조서가 반포되자 나라 안의 모든 미인들은 싫든 좋든 뽑혀서 왕궁으로 들어갔습니다. 당연히 에스더도 그런 여인들 중의 한 사람이 되어 왕궁의 궁녀들을 관리하는 헤개의 수하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다 내로라하는 출중한 외모를 지닌 여인들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에스더는 단연 눈에 띠는 여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에스더처럼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속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스러움을 지닌 여인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헤개도 에스더에게 주목하게 되었고 그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아직 왕비가 되기 이전이었는데도 일곱 명의 여종까지 붙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9절에 나오는 ‘헤개가 은혜를 베풀었다’는 말은 원문 그대로 옮기면 ‘헤개에게서 은혜를 얻어냈다’는 뜻이 되는데요. 이것은 단순히 수동적으로 남이 은혜를 베풀기만을 기다렸다는 뜻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은혜를 얻을만한 일들을 했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야기의 흐름으로 보면 에스더가 일부러 헤개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위선적이고 계획적인 행동을 했다는 뜻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에스더에게는 헤개가 그녀에게 특별한 애정을 느끼게 할만한 것이 있었던 만큼은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누군가의 사랑을 얻고, 또 은혜를 입는 대상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복이고 또한 은혜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쉽게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고 또 노력한다고 해서 다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러나, 그렇게 되는 것은 또한 상식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에게 사랑스러운 것이 하나도 없는데, 그리고 호의를 베풀게 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억지로 어떤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하고 그 사람에게 특별한 호의와 친절을 베풀게 만드시는 경우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사랑을 받고 호의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런 은혜들을 받는 사람들에게도 그럴만하다고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 있게 마련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특별한 복을 약속하시는 경우가 종종 나옵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죠.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고향인 하란을 떠나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는 땅으로 가라고 하시면서 커다란 복을 약속해 주시는데요. 그 복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으리라” 물론 하나님의 약속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약속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일방적인 복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지만 또한 이 복들은 어느 정도는 아브라함이 직접 살아가야 할 삶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따라가 보면 아브라함의 인생 속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들이 이미 어느 정도는 성취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복된 삶을 살았습니다. 어느 곳에 가든지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복되게 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주변에서 유명한 사람이 되었고 또 그 지역에 복을 나눠주는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아브라함은 엉망진창으로 살았는데 그의 이름은 다른 사람들이 존중하는 이름이 되었고, 아브라함은 전혀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고 나누는 삶을 살지 않았는데 그들을 위한 복이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는 그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면 악명을 떨치고 자기 혼자 부유하게 살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절대로 남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치면서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리는 복은 누릴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손자였던 야곱의 경우는 이와 정반대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언약은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는 혈통을 따라 계승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야곱 또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을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물질적으로는 풍요롭게 살았을지 몰라도 결코 그의 인생 속에서 그 이름이 창대해 지거나 남에게 복이되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복된 약속에 자신의 삶의 방향을 맞추며 살아가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는 적어도 나중에 애굽 땅에 이를 때까지는, 다른 이들을 위한 복이 되지 못했던 것은 물론이고 그 자신도 결코 복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은혜와 복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가 너의 삶을 그런 방향으로 인도해 갈테니 너는 그 방향으로 나를 따라오라는 제안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방향에 서 있지 않으면 적어도 진정으로 의미있고 가치있는 복들, 우리 자신도 복되게 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도 복되게 하는 그런 복들은 우리 개인과는 상관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본문은 계속해서 에스더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에스더에게 특별한 애정을 느꼈던 것은 헤개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15절을 보면 그가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특별한 다른 것을 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보는 자에게 사랑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그래서 결국 아하수에로의 사랑도 얻게 될 것이라는 예고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 언급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예전에는 미인대회가 굉장한 인기를 누린 적이 있습니다. 미스 코리아나 미스 유니버스 대회가 중계되는 날이면 거의 모든 가족들이 텔레비젼에 둘러 앉아서 거기 나오는 미인들을 두고 미추를 평하가는 일에 정신을 빼앗기곤 했지요. 미인 대회에는 주어지는 상들이 있습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진,선,미가 있고 특정한 업체에서 후원하는 상들이 몇 개 있습니다. 그리고, 사진기자들이 뽑는 포토제닉이라는 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상들 중에 그 사람의 외형적인 아름다움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런 상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기억이 나십니까? 바로 ‘우정상’입니다. 거기 참가한 모든 미인들이 투표를 해서 함께 대회를 준비하고 또 치르는 동안 가장 마음에 들었던 한 사람을 뽑아 그 사람에게 주는 상이었습니다. 저는 이 우정상이 이 대회에서 가장 의미있고 가치있는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대회에 나온 미인들은 왜 모두 거기 나와 있습니다. 왜 얼굴에 쥐가 날 정도로 억지 웃음을 지으며 몸이 뻣뻣하게 굳을 정도가 되면서도 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까? 경쟁에 이기기 위해서 입니다. 모두가 웃고 있기는 하지만 그 사람들 사이에는 갈등과 경쟁, 그리고 알력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가치있는 일입니까?
그런데, 성경은 에스더가 그랬다고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에스더가 에스더를 보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 중에 함께 궁에 입궐했던 그 여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면 에스더는 그들 중에서 우정상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차례가 되어 에스더는 아하수에로 왕에게로 갔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아하수에로도 에스더에게 반했습니다. 다른 모든 여인들보다 에스더를 더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여인들보다 더 큰 왕의 은총을 받게 되었고 그래서 결국 에스더는 페르시아 제국의 왕후가 됩니다. 이 일은 결국 페르시아를 위해서도, 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도 복되고 영광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의 삶은 하나님의 복된 약속들이 이루어져 가는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큰 틀에서 보면 결국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들은 이루어지게 되어 있지만, 그 안에서 우리의 삶이 구체적으로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러운 모양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들과 하나님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결정되어 집니다. 하나께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쓰고 힘써도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열어 주시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우리 자신의 역할도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삶의 참된 복과 영광은 이 땅 위에서, 그리고 우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얻고 누려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겉모습의 아름다움은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습니다. 물론 요즘은 성형수술이 워낙 발달해 있어서 그것도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있는 것이 되어버린 듯 하지만, 아무튼 외모는 우리 분명히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속사람의 아름다움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부분은 분명히 우리가 어쩔 수 있는 부분입니다. 특히 예수님을 믿는 우리 안에는 성령님께서 거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 분이 우리를 다듬어 가시도록 우리를 내어 드리며, 하나님께 순종하면 우리는 충분히 매력적인 속사람을 지닌 정말 아름다운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분명히 그 일에는 에스더의 가정환경처럼 불리한 조건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런 것들은 우리의 애씀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충분히 넘어설 수 있는 장벽입니다. 15절이 아하수에로에게 가기 전의 에스더를 다시 한 번 ‘모르드개 삼촌 아비하일의 딸 곧 모르드개가 자기의 딸같이 양육하는 에스더’라고 이야기한 후에 17절에서 아하수에로에게 갔다 온 후에 아하수에로가 에스더를 다른 여자들보다 더 사랑하였고 그래서 왕후로 삼았다고 말해주는 것은 그런 외형적으로 보기에 불리한 조건은 다른 사람들이 에스더를 사랑하게 하는데, 에스더가 그렇게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는데 결코 아무런 장애물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에스더가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여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에스더에게 아름다운 외모를 주셨고, 바로 그 아름다운 외모가 필요한 일에 그를 불러 사용하셨다고 말입니다. 나중에 보시면 아시겠지만 에스더가 결국 왕비가 되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되는 것은 그의 외모 때문이 아니라 사랑스러운 그의 속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에스더는 용모가 고왔을 뿐만 아니라 아리따웠기 때문에,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여인들보다 더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사람의 진정한 모습 보다는 그 사람의 외형이나 그에게 덧붙여 진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하나님께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 경험으로는 결국에는 사람들에게도 그런 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조건은 될 수 없습니다. 결국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되고 또 하나님께 인정받는 존재가 되는 것은 그 사람의 속 사람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얼마든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가꿀 수 있고 또 소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복을 주셨습니다. 놓치지 마시고 꼭 붙드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겉모습의 어떠함과 여러분에게 덧붙여진 것의 많고 적음을 무색하게 하는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존재가 되어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공히 사랑받고 인정받는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나에게 성령님을 주셨으니 성령 안에서 속 사람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워지게 하소서.
- 내가 내 속 사람을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하는 일에 헌신하게 하시고, 또한 그 복을 누리게 하소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모두 사랑받는 인생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