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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10.19. 주일오전 - 그 후에(에스더 5)


에0301to15 - 그 후에(에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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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에스더 3장 1-15절



얼핏 생각하면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굉장히 다양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모두들 어떤 일의 진행되고 또 결과지어지는 것에 대해서 고정된 틀을 가지고 있고 그 틀에 따라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생각하는 방식이 다 똑같다고 할 수 있지요. A다음에는 B가 오고 그랬다면 그 다음에는 반드시 C가 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거의 자동적이고 예외가 없는데요. 그것은 사람의 이성이 하나님의 이성을 모델로 해서 만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두들 다 비슷한 생각의 틀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물론 이것은 정상적인 경우라면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사과씨를 뿌리면 거기서 사과나무가 자라나고 그 다음에는 또 다시 사과 나무가 열려야 하니까요. 그렇지만 실제 현실 속에서는 사과씨를 뿌렸는데 배나무가 자라나기도 하고, 배 나무가 자라나는가 싶었는데 거기서 감이 열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씨는 내가 뿌렸는데 그 열매는 내가 아니라 엉뚱한 사람이 따 먹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이런 일들이 우리의 고정된 생각의 틀을 깨뜨리게 되기 때문에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고 또 우리에게 ‘왜?’라는 어려운 질문을 갖게 하기도 합니다. 


오늘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2장 15절 이후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에스더는 왕후가 되기 위해서 수산궁으로 들어갔으면서도, 다른 왕후후보들처럼 자신을 꾸미지도 않았고 또 왕의 환심을 살 다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은 채로 아하수에게로 갔습니다. 그저 해게가 주는 것만 받아서 자기 몸을 꾸미고 아하수에로에게 갔습니다. 그렇지만 왕후가 된 것은 그렇게 자신을 꾸미고 애썼던 다른 여인들 중의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에스더가 왕의 총애를 입게 되었고 그래서 왕후의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굉장히 의외의 결과입니다. 그렇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오히려 이것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왕의 취향에 대해서 해게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있을 수가 없죠. 헤개가 궁녀담당 내시였으니까요. 그러니 해게가 에스더에게 준 것은 다른 후보들이 요구한 것들과 비교해 본다면 턱없이 부족하지만 오히려 아하수에로의 마음에는 가장 가까운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내면적인 아름다움이 겉으로 보여질 정도의 성숙한 매력을 가진 에스더가 왕의 취향에 딱 맞는 모습으로 왕 앞에 나타났다면 그 게임은 이미 끝난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우리는 주변의 사람들과 똑같이 자신을 꾸미고 무언가를 덧붙이지 않으면 일종의 불안함을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 사람들과 같아지지 않으면 그 사람들에게 밀리게 될까 걱정이 되니까요. 그렇지만, 때로는 절제와 의도적으로 선택한 부족함이 가장 큰 지혜가 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을 가치 있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고, 사실은 그것을 가치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 중에서 더 훌륭한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그러니 우리는 너무 무리해서 남들이 그런다고 나도 꼭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이나 청년기에 이런 경향이 가장 강한데요. 그것은 오히려 그것은 나를 아무런 특색도 매력도 없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하면 나는 똑같은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으니까요. 무엇이든 마찬가지이지만, 똑같은 것이 많으면 그것이 가치있는 것일 수가 없습니다. 순금이라도 발에 채일 정도로 많다면 그것을 귀하게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사람이 되면 결코 내가 바라는 가치있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정말 가치있고 매력있는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모습을 찾아야지 남들처럼 따라하는 것은 지혜로운 선택이 아닙니다. 


에스더는 그렇게 해서 바사의 왕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르드개는 여전히 대궐 문에 앉아 있었습니다. 에스더가 왕후가 되기 이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이 거기서 여전히 그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묵묵히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 덕에 한 자리 차지하려고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자신의 할 일을 묵묵히 감당하다가 내시인 빅단과 세레스가 왕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에스더를 통해 그 사실을 왕에게 알려 왕의 생명을 구하는 공을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일은 궁중일기에 기록됩니다. 


딸같은 사촌동생은 대제국의 왕후가 되고 그 사촌오빠는 그 나라의 왕의 목숨을 구하는 공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공이 궁중일기에 기록되어 그 나라 역사의 중요한 일부분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우리는 이 다음에 어떤 내용이 나오게 될 것을 기대해야 마땅할까요? 잊혀져 있었던 왕후의 아버지같은 사람이 그런 엄청난 공을 세웠으니 그 다음에는 당연히 모르드개가 엄청난 부와 권세를 얻는 이야기가 이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절대로 무리한 기대가 아닙니다. 아주 당연하고 논리적인 생각입니다. 그 이야기가 끝나고 이어지는 3장은 ‘그 후에’ 아하수에로가 한 사람을 높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데요. 그런데, 왕은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왕후의 오빠가 아니라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을 높여서 대제국의 이인자의 자리에 앉혔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사람들이 하만이 나타나면 그에게 엎드려 절을 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것이 에스더서에 등장하는 최고의 악역스타인 하만이 처음으로 에스더서의 무대 위에 등장하는 장면인데요. 성경은 아하수에로가 그저 그를 그렇게 높은 자리에 앉혔다고만 말할 뿐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이무런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에 걸맞는 합당한 이유가 없어서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하수에로는 이전에는 기분 내키는 대로 왕후 와스디를 폐위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기분 내키는 대로 하만을 자기 다음으로 높은 자리에 앉혔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습니다. 별다른 공이나 이유도 없이 하만은 하루 아침에 대제국의 제 이인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왕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왕후의 오빠인 모르드개에게는 아무런 상도 영광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야기는  우리의 상식이나 당연한 사고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왕궁의 문 앞에서 나랏 일을 처리하는 모든 신하들은 왕의 명령대로 하만이 왕궁을 드나들 때마다 마치 신이라도 나타난 듯이 하만 앞에 꿇어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신하들이 보니 이상하게도 모르드개는 단 한 번도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신하들이 보기에는 이 일이 걱정이 되는 일이기도 했지만 화가 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모르드개보다 훨씬 높은 자리에 있는 신하들도 절을 하는데 모르드개는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걱정 반 괘씸한 마음 반으로  하만에게 절을 하라고 모르드개를 계속해서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계속해서 거부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절하기를 거부하는 이유를 말해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된 모르드개는 자신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하만에게 절을 할 수 없다고 그 이유를 밝히게 됩니다. 그렇다면, 모르드개가 유대인인 것과 하만에게 절하지 않는 것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사실 둘 사이에는 복잡한 역사가 있습니다. 하만은 아각사람 함므다다의 아들인데요. 참고로 말씀드리면 아각은 사람이 아니라 아말렉 족속의 왕을 일컫는 명칭인데요. 아각에 대한 이야기는 사무엘상 15장에 나옵니다. 거기 보면 사울 왕은 하나님으로부터 아말렉 족속에 속한 것은 짐승까지도 모두 죽여야 한다는 명령을 받고 아말렉 족속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래서 승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사울은 아말렉의 왕이었던 아각은 죽이지 않은 채로 사로 잡았고 좋은 짐승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일 때문에 사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림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17장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처음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를 여행할 때 그들을 공격한 것이 바로 아말렉 족속들이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대대로 아말렉과 싸우실 것이고 그들을 땅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때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하나님의 대적으로 삼으셨다는 뜻입니다. 사울의 아말렉과의 전투는 그 일의 연장선상에 있는 일이었는데, 사울의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이 틀어지게 되었고 그래서 하나님은 결정적으로 사울을 버리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모르드개는 공교롭게도 사울이 속해 있었던 베냐민 족속이었습니다. 그러니 모르드개는 하나님이 대적으로 삼으신 족속의 한 사람이고, 또 자기 가문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장본인인 하만, 그리고 이미 자신이 섬기고 있는 바사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하만을 마치 신처럼 높이면서 그 앞에 엎드려 절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만에게 절을 하지 않는 것은 분명히 왕명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모르드개의 행동은 이런 배경에서 본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분명히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어려서부터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절대로 밝혀서는 안된다고 말해 왔습니다. 그래서 에스더는 왕후가 된 이후에도 모르드개의 말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고요. 사실 모르드개가 자기 자신과 에스더의 출신에 대해서 숨긴 것은 지혜로운 일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분명히 유대인들에 대한 반감이 제국 내에 폭 넓게 자리잡고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굳이 자신이 유대인임을 밝히는 것이 괜한 갈등과 불이익을 가져올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이제 모르드개는 그렇게 숨겨왔던 자신의 출신에 대해서 스스로 밝힙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모르드개가 걱정했던 그 일 뿐만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엄청난 일이 일어나게 되는 직접적인 이유가 됩니다. 우리는 분명히 불필요한 갈등이나 문제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이고 최선을 다해서 지혜롭게 행동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만능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과연 그러한 우리의 지혜에만 의지해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괘씸한 마음 반, 걱정 반 모르드개를 설득하려고 했던 다른 대신들은 모르드개가 유대인이라는 소리를 듣자 태도를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걱정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그렇다면 어떻게 되나 두고 보자’하는 마음만 남게 되어 모르드개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하만에게 알려주었습니다. 하만은 그러지 않아도 궁에 드나들 때마다 자신에게 엎드려 절하지 않는 모르드개 때문에 심기가 불편했는데, 그가 유대인이었다는 소리를 듣자 그를 제거하기로 뜻을 굳힙니다. 오래된 역사에 대한 좋지 못한 기억이 그를 더욱 더 심하게 자극한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기에게 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제거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의 비웃음 거리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번 기회에 유대인들을 모두 죽이면서 모르드개까지 함께 없애서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기로 합니다. 아하수에로 12년 니산월, 그러니까 1월에 드디어 하만은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왕부터 설득하고 허가를 받아내지 않고 유대인들을 말살할 날부터 잡습니다. 날을 정하기 위해서 점쟁이들을 모아 제비를 뽑은 것입니다. 그 날은 달만 결정되었던 것 같습니다. 아달 월, 그러니까 그 해의 마지막 달인 12월로 달이 결정되었습니다. 날짜가 너무 많이 남아서 기분은 좋지 않았겠지만 하만은 점궤가 그렇게 나왔으니 따르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만은 왜 왕의 허락도 받기 전에 날부터 잡은 것일까요? 그것은 그가 그 허락을 받는 일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만은 아하수에로가 어떤 인물인지를 너무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가 알고 있는 공식대로 하면 아하수에로는 그 일을 허락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하만은 자신만만하게 아하수에로에게 갑니다. 그리고는 아주 겸손하게 그리고 왕을 위하여 충언을 고하는 듯이 하면서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깁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 민족이 왕의 나라 각 지방 백성 중에 흩어져 사는데 그 법률이 만민의 것과 달라서 왕의 법률을 지키지 아니하오니 용납하는 것이 왕에게 무익하니이다. 왕이 옳게 여기시거든 조서를 내려 그들을 진멸하소서.” 이 말은 하와를 유혹할 때 뱀이 사용한 언어처럼 정말 주도면밀하게 준비된 말이었습니다. 한 민족이 그저 바사 각 지역 여기 저기에 흩어져 살고 있다면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힘을 쓸 수 없으니 나라 전체로는 더 다행스러운 일이지요. 그러나, 하만의 말처럼 그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들만의 법도를 지키고 있고 그것 때문에 바사의 법을 무시하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렇게 흩어져서 살아가고 있는 그 민족이 다른 민족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쳐서 그들도 바사의 법을 지키는 일에 부정적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것은 아하수에로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권위가 거부된다는 뜻입니다. 하만은 아하수에로가 얼마나 자신의 권위를 지키는 일에 집착하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꺼낸 것입니다. 벌써 마음이 흔들린 아하수로에게 하만은 계속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민족을 모두 죽이라는 조서를 내려서 아얘 화근을 제거해 버려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정말 물지 않을 수 없는 미끼까지 하나 더 던집니다. “내가 은 일만 달란트를 왕의 일을 맡은 자에게 맡겨 왕의 금고에 들이리이다” 은 밀만 달란트가 얼마나 되는 돈일까요? 그것은 그 당시 바사의 일년 예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액수입니다. 하만은 자신의 청을 들어주면 그 엄청난 돈을 뇌물로 제공하겠다고 제안한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더 이상 그는 그 일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 당시 아하수에로는 그리스와의 전쟁에 완전히 패배한 후여서 재정적으로 굉장히 쪼들리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왕후를 새로 들이느라고 잔치를 벌이고 상을 주고 세금을 면제해 주는 일들을 했기 때문에 재정이 더 크게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한 해 예산의 3분의 2나 되는 액수의 돈을 손에 넣게 된다는 것은 마치 오랜 가뭄 끝에 단비소식을 듣는 것과도 마찬가지 였을 것입니다. 왕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불안함을 이용하고, 또 제국의 재정적인 어려움을 해결해 주겠다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함으로써 하만은 아하수에로가 자신의 이야기를 거절할 수 없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진짜 사악함은 다른 곳에서 드러납니다. 우리나라 말에도 발음은 같은데 뜻이 다른 그런 말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말이 바로 ‘말’이라는 단어일 텐데요. 한 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말이 말-을 한다면 그 말은 어떤 말일까? 말의 말-일까, 아니면 말-을 배운 말의 말-일까? 제가 지금 말에 대한 말-을 하는 것일까요? 말-에 대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어떤 말이 어떤 말인지 헤깔리시죠? 그런데, 이런 말은 우리 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만은 아하수에로에게 ‘그들을 진멸하소서’라고 말했는데요, 그 말은 그 나라 말로는 ‘그들을 종으로 삼으소서’라는 말과 그냥 흘려 들으면 헤깔릴 정도로 발음이 똑같은 말입니다. 나중에 에스더가 왕 앞에 섰을 때, 자신의 민족, 그러니까 유대인들을 자신에게 달라고 하면서 “만일 우리가 노비로 팔렸더라면 내가 잠잠하였으리이다”라고 말하는데, 이 말 속에서 아하수에로가 하만의 말을 그렇게 이해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하수에로는 설마 하만이 한 민족을 모두 멸족시키자는 제안을 그렇게 쉽게 하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아하수에로는 그 엄청난 일을 그냥 별 생각도 없이 허락하고 맙니다. 손에 있는 인장반지까지 빼 주면서 유대인들을 어떻게 하든 마음대로 하라고 합니다. 와스디도 그렇게 쉽게 좇아내고, 모르드개가 자신의 목숨을 건져 준 일도 그렇게 쉽게 잊어버리더니 이번에는 자신이 다스리는 한 민족의 운명을 뒤바꿔 놓는 일을 자초지종을 알아보지도 않고서 그저 ‘네 맘대로 해라’라는 한 마디 말고 하만에게 맡겨버린 것입니다. 


 하만은 곧바로 자기 계획을 진행시켜 나갑니다. 우선 그 달 13일에 왕의 서기들을 모두 불러 모아서 바사 제국 안에 사는 모든 민족의 말로 그 해 12월 13일 하루 동안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유대인들을 죽이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라는 조서를 꾸미고는 그 초본을 모든 민족들에게 보냈습니다. 복사본을 보내지 않고 초본을 보낸 것은 그 어떤 사람도 거기다 다른 이야기를 덧붙이지 못하게 하기 위한 완벽한 사전조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유대민족의 멸족은 아하수에로도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바사제국 안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그야 말로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이것이 모르드개가 하만 한 사람에게 끝까지 절을 하지 않았던 그 작은 선택이 씨앗이 되어 만들어 낸 열매입니다.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끝까지 절을 하지 않은 일이 옳은 일이었는지 그렇지 않은 일이었는지는 우리가 정확하게 분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중심을 헤아려 보면 모르드개가 그런 결정을 내린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의 신앙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그런 결단이 완전하지는 않아도 그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올바른 결정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고 어찌보몀ㄴ 그리 크게 잘못된 것 없는 그 결정이 그 자신은 물론이고 그가 속한 유대민족 전체를 멸족 당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양심과 신앙의 기준에서 바르다고 생각되는 결정이 항상 바른 결과로만 이어진다면 이 세상에 바르게 살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에스더에서도 보듯이 우리가 바른 결정을 내린다고 해서 반드시 그 결정이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예상은 예상대로 맞아 돌아갈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영 엉뚱한 데로 흘러가 버릴 때도 있습니다. 커다란 공을 세워도 상을 받지 못할 수도 있고, 전혀 자격 없는 사람이 이유 없이 엄청난 영광을 얻기도 합니다. 정직하고 올바르다고 여기는 결정을 했는데 그것 때문에 예기치 못했던 어려움을 겪게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게 되기도 합니다.


모르드개의 올바른 결정이 그런 비극을 만들어 냈다면, 이런 일들은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 안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바사에서는 힘을 쓰지 못하신다는 증거일까요?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이 세상이나 현실 속에서는 아무런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시는 분이라는 증거일까요? 이 세상이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방식대로 움직여 가지 않고 있고 또 선한 사람들이 아니라 악한 사람들이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왕이 아니라는 증거일까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을 지키고 또 믿음의 지조를 지키려는 모든 행동들은 결국 자기만 손해 보는 일로 끝나고 마는 아무런 소용 없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일까요? 지금까지의 에스더의 이야기만 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지금까지의 인생의 경험들은 어쩌면 지금까지의 에스더서의 이야기와 굉장히 닮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현실 속에서는 아무런 힘도 없는 분처럼 보이고, 그런 하나님을 따르는 일은 나만 손해 보는 일들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런 결론을 내려서는 안됩니다. 아직은 에스더서가 끝이 난 것이 아니니까요. 정말 말도 안되는 이야기들이 이어져 가고 있고, 그 끝에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들이 모두 멸족당하는 것이 기정사실로 굳어져 버리고 있고 그래서 그 모든 선한 노력들이 결국 아무런 소용이 없어져 버린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더서의 진짜 이야기는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개인의 역사도, 그리고 이 세상의 역사도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진짜 역사는 아직 시작 되지도 않았는지 모릅니다. 


사람이 현재까지의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서 무언가를 생각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과거의 경험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 지금의 현실을 파악하고 앞으로의 일들을 예측하게 해 주는 거의 유일한 근거가 되니까요.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그러한 과거의 경험이 아무리 오랫동안 반복되어 온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만이 내 삶이나 혹은 이 세상의 정답이라고 여겨서는 안됩니다. 에스더서의 결론이 오늘 본문에서 내려지는 것이 아니듯이 우리 삶의 결론은 지금 여기, 이 땅에서 내려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우리가 발 붙이고 살아가는 이 곳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 나라의 온전한 백성이 되어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야 우리 삶의 진짜 결론과 열매가 무엇인지, 이 세상 역사의 결론이 무엇인지를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우리의 선한 양심을 따라,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택하며 사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때로 우리가 양심을 따라, 그리고 진리를 따라 내리는 결정들이 온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이해와 판단력이 완전하지는 않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래도 걱정 없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일 안에서 하십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 같고,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고 계신 것 처럼 보여지는 바사같은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움직여 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빈틈 없이 이루어 가시면서 말입니다. 이 세상이 건전한 상식이나 우리의 바른 생각에 따라 움직여 가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사과 씨를 뿌렸는데 거기서 배 나무가 자라고 결국 거기서 거둬 들이는 것이 보잘 것 없는 돌감 밖에 없을지라도, 그래서 내가 뿌리는 씨앗에 대해서 확신이 약해져 간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바른 것에 대해서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계속해서 내가 뿌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 좋은 씨를 뿌리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날 우리가 그렇게 뿌렸던 씨앗들이 맺은 가장 달고 시원한 열매,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따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에스더의 진짜 이야기가 이제 시작되고 있듯이 우리의 진짜 역사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습니다. 항상 우리 인생의 마지막에,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질 그 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제 자리로 돌리시고 회복시키며 믿음과 선한 양심을 지킨 자에게 상 주실 때를 소망하며 흔들림 없이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내가 세상의 보이는 모습을 보면서 선하고 올바른 것에 대해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게 하소서.
  2. 내 삶과 역사의 진짜 열매는 지금 이 곳이 아니라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서 보게 될 것을 믿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