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 에스더 4장 1-17절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대통령을 왕처럼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굉장히 강하게 퍼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누가 뭐래도 대통령과 왕은 완전히 다릅니다. 대통령은 그저 한 나라의 대표이고 또 행정부의 수장입니다. 분명히 거기에 걸맞는 존중과 명예는 주어져야 하지만 국가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되는 사람입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주인은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대통령을 왕으로 생각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 대통령을 절대시하게 되고 그래서 그에게 과도한 권한을 부여하게 되며, 그와 동시에 그 대통령에게 만능의 슈퍼맨이 되어줄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대통령이 사람들의 이런 기대에 부합하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대통령을 아무리 대단한 인물로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그도 여전히 부족하고 불완전한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를 섬길 정치 지도자들을 선택할 때, ‘이 사람이면 다 된다. 이 사람이 그 자리에 앉으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라고 생각하면서 사람을 선택하면 안됩니다. 그런 기대 자체가 불가능한 기대이니까요. 우리는 흔히 이런 기대 때문에 선거를 치를 때마다 최고의 인물을 선택한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내가 지지하는 그 사람이 최고의 인물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렇지만 선거는 최선의 인물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최악의 인물을 걸러내는 과정이라는 그런 말이 있듯이 그저 후보로 나선 사람들 중에서 그래도 괜찮은 사람, 너무 나쁘지 않은 사람을 고른다고 생각하고서 표를 던져야 합니다. 그게 인간 지도자를 생각하는 올바른 생각이 될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어떤 사람을 바라보아야 진짜 그 사람이 보이지, 나의 과도한 기대를 입혀서 사람을 바라보면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까요.
바사의 아하수에로 왕은 우리에게 그러한 진실을 보게 해 주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3장 마지막 절만큼 그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구절이 없습니다. 드디어 하만의 조서가 바사제국 곳곳에 배달되기 시작했습니다. 수산 성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그 조서를 받았지요. 수산 성의 백성들은 그야 말로 공황상태에 빠졌습니다. 혼란과 충격, 그리고 두려움이 그 성을 사로 잡았습니다. 비록 수산 성에 살던 다른 민족들이 유대사람들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미우나 고우나 몇 십년씩 함께 살던 이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사람들을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합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목숨을 빼앗고 재산까지 약탈해야 합니다. 선량한 시민으로써는 도무지 이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절대로 순종하지 않으면 안되는 왕명으로 전달되었으니 수산 성이 혼란과 충격에 빠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당시 거기 포로로 잡혀와 살던 사람들이 그 조서를 보면서 ‘그럼, 그 다음에는 누구 차례지? 언제든지 우리도 저런 처지가 될 수 있겠구나!’하는 불안과 두려움에 빠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 조서 때문에 그야 말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될 유대사람들은 말할 필요도 없었겠지요. 그런데, 15절은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하수에로 왕은 하만과 함께 앉아 마셨다고 말합니다. 둘이 앉아서 만찬을 즐긴 것입니다.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무심해 질 수 있고, 또 자기중심적이 될 수 있는 것이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을 너무 과도하게 믿고 기대하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불안한 일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고,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 의지해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이 조서에 대한 소식은 모르드개에게도 전해졌습니다. 모르드개는 즉시 자기의 옷을 찟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성 중에 나가서 대성통곡을 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모르드개는 이 일이 그저 한 명의 무감각하고 생각 없는 왕과 악한 사람이 결탁하여 만들어 낸 비극이나 위기가 아니라 하나님과 연관된 일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렇다면 무언가 하나님의 백성인 자신들에게 문제가 있어서 그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경고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것이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었는지 아닌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일은 분명 하나님과 연관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르드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운명을 그렇게 허술한 이방인 왕 한 사람에게 모두 내어 맡기실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일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하나님과 깊이 그리고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르드개의 생각은 100퍼센트 정확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운명을 우연에 내어 맡기시거나 말도 안되는 사람들의 손에 맡기지 않으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언약백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한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된 사람들이 우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항상 모르드개처럼 생각하고 또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들의 삶과 운명에 무관심하지 않으십니다. 만약 여러분 중에서 여러분의 삶이 우연의 연속이라고 생각하시거나 혹은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에 매달려 있다는 생각으로 불안해 하시는 분들이 계신다면 이제는 그 생각을 떨쳐 버리시기 바랍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어떨지라도 그것은 절대로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어떤 순간에도 주님의 손에 있는 주님의 소유입니다. 우리의 삶은 그런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모르드개는 그런 모습으로 대궐 문 앞에 이르렀습니다. 그 이상은 그런 모습으로 들어갈 수가 없으니 그 앞에 앉아서 계속 통곡합니다. 그 모습을 에스더를 보필하는 시녀와 내시가 보았고, 그래서 그것을 에스더에게 보고하였습니다. 오빠가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느니 그게 마음에 걸려 옷을 보냈지만 모르드개는 옷을 받지 않고 계속 대궐 문 앞 광장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스더는 내시 하닥을 보내서 오빠가 왜 그러는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제서야 에스더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요. 말 그대로 등잔 밑이 참 어둡습니다. 왕과 한 집에 사는 왕후가 그 일을 모르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실을 에스더에게 알려주려고 모르드개가 대궐 앞 광장에 앉아서 계속 통곡하며 회개하고 있었던 것이지만 사람이 무언가를 알고 모르는 문제가 이렇습니다. 다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람, 그리고 꼭 알고 있어야 할 사람은 오히려 그것을 모를 때가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 또한 우리를 굉장히 불안하게 하는 일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아무튼 모르드개는 그 간의 자초지종을 상세하게 하닥에게 들려준 후에, 조서의 초본 한 장을 그의 손에 들려 보냅니다. 상세한 이야기와 정말로 믿기 힘든 그 일의 확실한 증거까지 보내서 에스더가 상황을 확실하게 파악하도록 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면서 왕에게 가서 이 일을 정확하게 말하고 유다백성들을 살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에스더에게는 당장 왕에게 나갈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왕후라도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 왕 앞에 마음대로 나섰다가 만약 왕이 그 만남을 원치 않아서 왕의 홀을 내밀지 않으면 목숨을 잃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슨 놈의 나라 법이 이런 지 모르지만 그게 그 당시 바사의 법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미 아하수에로가 에스더를 만나지 않은 지 한 달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왕이 에스더를 만나는 일을 그다지 원치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에 에스더가 아하수에로를 만나러 가는 일은 그만큼 더 위험한 일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더는 하닥을 통해 그런 사정을 모두 알려 주었습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정말 사랑했습니다. 아버지처럼 길렀으니까요. 그래서 상식적으로 본다면 충분히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가 없구나. 목숨을 걸어야 한다니.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너 끝까지 네가 유다사람이라는 것을 감추고 꼭 너라도 살아 남거라.” 그렇지만 모르드개는 그렇게 말하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이 말은 모르드개가 에스더를 설득하기 위해서 했던 말이지만, 이 짧은 말 속에는 두 가지 아주 중요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믿는 사람들로서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을, 특히 내 자녀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에 대한 교훈이 들어 있고, 둘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힘든 위기와 어려움을 만날 때 누리를 수 있는 든든한 복과 은혜에 대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서 우리 자녀들과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하는 것이 정말로 사랑하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모르드개는 이야기 끝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이것은 모르드개가 만약 에스더가 가만히 있으면 에스더와 에스더의 집이 당할 일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사실 에스더가 그렇게 한다면 결과는 모르드개의 말과는 반대가 될 것입니다. 에스더가 가만히 있으면 유다 백성이 망하게 되고 에스더는 살아남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르드개는 정반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뜻으로 한 말일까요? 이 말은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말 앞에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을 붙여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그렇게 자신만 살아남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사는 길이 아니라 영원히 망하는 방법이라는 뜻입니다. 왜 모르드개라고 그 일이 에스더에게 목숨을 내놓아야 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몰랐겠습니까? 충분히 알고 있었지요. 그렇지만 알았으면서도 그렇게 한 것입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진정으로 잘 되게 하는 일은 에스더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영광스럽게 되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정은 그렇지 않아도 에스더가 그렇게 가장 좋은 길을 선택하도록 도와주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모르드개가 에스더를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의 부모들은 자식들을 끔찍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무리 가치있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거나 손해를 보는 일이라고 생각될 때는 내 자식만큼은 그 일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굉장히 강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자녀들이 그 길을 가지 못하게 적극적으로 막아 서기도 합니다. 그것이 자녀를 정말로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죠. 그렇지만 여러분, 그것이 정말로 부모가 하나님 앞에서 자녀를 사랑하는 참된 방법일까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런 우리의 자녀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우리가 정말로 자녀들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저 우리 자녀들이 지금 이 땅에서 당장 잘 되게 하는 일만 도와주면서 그것이 내 자녀를 사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잘 될 수 있고, 영원히 영광스러울 수 있을 지를 생각하면서 최선을 다해서 그 일을 돕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지만 아직 자녀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도록 최선을 다해서 신앙의 길로 이끌어 주어야 하며, 자녀가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그 자녀에게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잘 되는 길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자꾸 자꾸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 그래서 영원히 가치있는 삶에 대해서 말해 주어야 합니다. 그게 자녀를 진정으로 온전히 그리고 진짜로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꼭 자녀들 뿐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을 진실로 사랑하는 방법도 같습니다. 그들을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잘 되도록 도와주며,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것. 이것이 상대가 누구든 그 사람을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어야 할 진짜 사랑의 모습입니다.
이제 두번째 주제로 넘어가겠습니다. 과연 위기와 어려움을 만난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우리가 올바른 신앙적인 태도를 보일 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든든한 복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르드개의 말을 들어보면 그가 그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과 그의 이야기의 내용이 굉장히 상반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모르드개가 금식을 하면서 베옷을 입고 티끌을 뒤집어 쓰고 기도했던 것, 그리고 목숨을 걸어야 할 지도 모르는 위험한 일에 에스더를 개입시키려고 했던 것은 유다 백성이 전멸을 당하기 일보 직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 너무 중차대하고 급한 일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모르드개는 에스더가 이 일에 나서기를 설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무슨 말입니까? 지금 모르드개는 무엇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유다 백성은 결코 이런 식으로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상황이 아무리 급박하고 위험해 보이더라도 결국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을 반드시 살리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해진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르드개의 희망사항이 아닙니다. 모르드개는 지금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서 ‘다 잘 될거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모르드개가 가지고 있는 확신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모르드개는 어떻게 해서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그가 가지고 있었던 확신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요? 첫째로 모르드개는 유다 백성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것을 알았고 여전히 하나님은 유다 백성을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가졌던 확신의 첫번째 근거였습니다.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이국 땅에 포로로 잡혀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엄청난 환란과 위기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유다 백성들을 완전히 버리신 것 같이 여겨집니다. 그러나, 상황이 어떻든 그리고 그 상황이 만들어 내는 생각과 감정이 어떻든 여전히 유다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언약 백성입니다. 이 사실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가지는 실제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하나님이 완전히 버리시고 포기하셨다고 선언할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완전히 망하는 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언약 백성들을 통째로 버리시는 일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유다 사람들은 바사의 손에 망할 래야 망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모르드개의 확신을 떠받치고 있었던 두 번째 근거는 유다 백성들의 유배생활은 이미 70년으로 정해져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유배생활은 70년이 지나면 반드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요. 그래서 아무리 길고 거칠게 여겨지더라도, 그리고 그 과정 중에 그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결국 회복과 하나님의 복주심이라는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되어 있는 이야기의 일부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중간이야 어떻게 변할 수 있어도 행복한 결말이 변할 수는 없다는 것을 모르드개는 확실히 알고 있고 또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겪고 있는 그 어려움은 끝이 아닐 뿐만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께서 해결하실 일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다 보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으신다고, 나를 버리셨다고, 나에게는 관심이 없으시다고 생각하게 하는 그런 일들을 경험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우리의 판단은 완전한 사실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 어려움이 얼마나 큰 것이고, 또 깊은 고통을 주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우리는 그것 때문에 완전히 망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우리들에게 절대로 우리를 완전히 망하게 만드는 그런 일들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은 절대로 허락하지 않으신다고 너무도 당연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주신다면 우리는 그것 때문에 우리가 완전히 망해버릴텐데 하나님은 결코 그렇게 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의 언약은 그 언약이 완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중간에 포기되거나 사라지는 법이 없습니다. 성취되어야만 끝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와 맺으신 언약이 가지고 있는 든든함입니다. 그렇다면 그 언약은 언제 완성되어질까요? 우리가 완전히 회복된 낙원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게 될 때, 그 때가야 비로소 그 언약은 완성됩니다. 그 때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붙들고 인도하시면서 함께 가십니다. 그 분의 손에서 우리를 놓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완전히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실패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순간, 어떤 상황 속에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진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제 동생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지가 한 참 되었습니다. 처음에 동생이 쓰러졌을 때, 정말로 가슴이 무너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난생처음으로 경험했습니다. 처음 내려진 진단은 살 수 없으니 마지막을 준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유야 어쨋든 동생은 그렇게 쓰러지기 전 거의 10년 동안을 정말 힘들게 살았습니다. 빚도 많이 져서 때로는 집에서 따로 나가 살면서 굶기를 밥 먹듯 하며 살기도 했고, 후에 집에 들어와 살 때도 그 빚을 갚기 위해서 몇 년을 말도 안되는 부당한 대우를 참아 가면서 그렇게 일했고, 그래서 이제 몇 개월만 더 고생하면 한숨 좀 돌리게 된다고 좋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에 출근해서 책상 앞에 앉았다가 쓰러져서 지금까지 누워 있게 되었습니다. 그 때는 정말 여기 이 가운데가 뻥 뚤린 느낌이었습니다. 자다가도 일어나 엉엉 울고 밥을 먹다가도 통곡을 하고… 그렇게 고생하는 동생이었는데 목회한답시고, 또 인간 만든답시고 한 번도 제대로 도와주지 못해서 너무 너무 미안하고 아팠습니다. 그런데요. 그러는 중에도 저는 그 일이 우리 가족 중 그 누구도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진단대로 동생이 세상을 떠나는 일이 생기더라도 그것까지도 가장 완전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이며, 그것 또한 우리 가족이 감당할만하다고 생각하셔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 가족에게 허락하시는 것이라고 믿어졌습니다. 그런 믿음이 제 가슴을 채웠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가슴이 미어 터지게 아프면서도 그것 때문에 절망하거나 좌절하지는 않았습니다. 마음의 평안이 깨지지는 않았습니다. 그 모든 것이 협력하여 결국 가장 선한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믿을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동생은 그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살아났습니다. 중간 중간에 병원비 충당문제도 있었지만 그것은 산재처리가 되어 해결되었습니다. 또 합병증 문제며 정말 어려운 고비들이 많았고 그것 때문에 치료기간이 굉장히 길어지기도 했지만 그것도 다 넘어갔습니다. 지금은 인지능력도 거의 다 회복되어서 말하는 소리를 다 알아듣고 목에 뚫어 놓은 구멍 때문에 소리를 내어 말하지는 못하지만 입술을 움직거리며 의사소통도 하기 시작했고 감정표현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전부터 본격적으로 재활훈련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요. 진짜 큰 은혜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이 아이가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 그 동안 잃어버렸던 믿음을 되찾았다는 것입니다. 또 저희 어머니도 이 일로 얼마나 영적으로 단단해 지셨는지 모릅니다. 물론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그런 일을 허락하셨던 모든 이유를 다 알지 못합니다. 아마 주님 앞에 설 때까지 다 깨닫지 못하겠지요. 그렇지만 너무도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 그 일을 통해 일어난 일들만으로도 우리 가족들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그리고 완전하심을 실제로 체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무너지고 망하기는 커녕 더 단단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 믿음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지만, 바로 하나님께서는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주지 않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확신, 그래서 참 성도는 완전히 망하는 법은 없다는 정해진 사실을 믿는 확신 때문에 저희 가족은 그 어려운 시험을 넉넉히 이기고 오히려 그 가운데서 든든히 세워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사람도 온전히 신뢰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미 이 세상과 사람들 사이에는 죄가 들어와 있고 그 죄가 모든 것을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마치 부실공사를 해 놓은 건물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그 건물 안에서 살고 있는 입주자들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는 전혀 믿고 의지할 바가 되지 못합니다. 이 세상도, 그 안에서 살아가는 그 사람들도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들에게는 든든히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결코 깨지지 않고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을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을 단단히 붙들고 있는 한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망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큰 고난이 닥쳐오고 견디기 힘든 시험이 닥쳐 오더라도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가 감당할 시험 밖에는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진실로 믿는다면 그렇게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가치있는 삶이건 의미있는 삶이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광스러운 소명이건 그런 것들을 위해서 우리의 삶을 투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잔뜩 움츠러들어서 두려워 하면서 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약속을 믿는 믿음이 있기에 충분히 두려움을 이길 수 있고, 더 가치있고 거룩한 일에 헌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도 더 가치있는 삶을 살아가라고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흥하는 길을 가라고 충고하고 격려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나 자신도 가장 온전하게 사랑하며 살 수 있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가장 온전하게 사랑하며 영광스러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이 세상은 우리를 위한 든든한 기초가 될 수 없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주신 변함 없는 약속만이 우리의 삶을 영원히 떠받칠 만큼 든든합니다. 삶이 흔들리고 이 세상이 흔들리거든 흔들리는 땅이 아니라 흔드리지 않는 저 위를 올려다 보십시오. 거기서 여러분을 그리고 이 세상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모르드개 처럼 좌절하고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더 아름답고 가치있는 일들에 헌신하는 든든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항상 나에게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음을 기억하며 의지하게 하소서.
-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나를 무너뜨리거나 완전히 망하게 할 수 없음을 믿고서 흔들리고 불안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가치있게 여기시는 삶을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