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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10.12. 주일오전 - 모르드개가 대궐문에 앉았더라(에스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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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에스더 2장 16-23절




이미 말씀드렸지만 에스더서는 굉장히 복잡한 현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진행되어 가고 있는 곳은 페르시아입니다. 세계 역사상 가장 크고 강력했던 나라들 중의 하나지요.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나라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민족들처럼 쉽게 바사의 문화나 종교에 영합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비록 그들이 나라를 잃고 거기 잡혀 와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지켜내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서 사는 성도들은 그 당시 바사에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물론 성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 처럼 이 세상에 저주나 형벌을 받아 유배된 포로들이 아닙니다. 원래부터 이 세상은 우리들에게 우리를 위한 삶의 자리로 주어진 곳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나 또 그 안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들의 상황은 그 당시 바사에 거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와 닮은 점이 아주 많습니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기 전에 마음대로 바사를 떠날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일이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래서도 안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쩔 수 없이 이 땅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의 자리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소명을 감당해 내야 하는 소명의 땅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세상 어디에서 어떤 모양으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바사에 산다고 해도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순종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둘째로 바사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랬듯이 이 세상도 우리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인 동시에 때로는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완전히 거기 섞일 수는 없는 그런 곳입니다. 세상의 화려함은 우리를 자신과 같아지라고 유혹합니다. 그렇지만 세상의 힘은 우리들을 위협하고 때로는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은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이 세상에 모든 것을 내어주고 그 세상과 같아질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이 세상에 선한 영향을 미치면서 살아야 하는 쉽지 않은 소명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정말 복잡하고 까다롭지만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우리에게 주신 세상과 우리들 사이의 관계이며 또한 우리 삶의 조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런 세상에서 살며 또 일해야 하는 우리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까요? 세상이 너무 복잡하고 또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나에게 맡겨진 삶이 너무 복잡하다고 여길 때, 사람들이 가장 쉽게 선택하는 방법이 바로 ‘세상과의 분리’입니다. 이것은 세상과 자신을 따로 떼어 놓고서 그 세상이 자신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 때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고서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제가 예전에 알던 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주변 상황은 너무 말도 안되게 돌아가고 불의한 일은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는데도, 이상하게도 그 분은 그저 만사태평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이런 일들에 마음이 안 쓰이냐고 화도 나지 않고 슬프지도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가 그런 일에 신경 써 봤자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 괜히 마음만 시끄러워진다고,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 마음의 평안이기 때문에 자기는 그것 지키는 것 외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마치 이 세상을 초월한 듯한 대답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재미있는 것은 그러다가도 그 분은 자기 신변과 무슨 연관이 있는 일이 일어나면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을 보이면서 전혀 자기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절대로 성도가 살아가는 올바른 방법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삶의 자리와 소명의 자리를 부정하는 것이니까요.  


또 하나는 아얘 세상과 섞여 버리는 것입니다. 세상과 자신을 분리하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성도들이 이 세상과 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구분도 없고 구별도 없이 함께 어우러져 똑같이 살아가는 것을 선택합니다. 물어보면 믿는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사는 이유나 사는 방법은 전혀 그의 믿음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 뿐만 아니라 가치관이나 사고방식, 그리고 마음 씀씀이가 믿지 않는 사람들과 너무 많이 닮아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여러분 주변에서 이런 분들을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세상과 자신을 분리하는 것도 그렇지만 반대로 이렇게 자신을 세상과 완전히 섞어 버리는 것도 성도에게 어울리는 방식은 아닙니다. 이래서는 자신도 지켜내지 못하고 이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는 더더욱 없으니까요.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내야 할 삶의 환경이 아무리 복잡하고 그래서 성도로 사는 일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더라도 우리는 그 환경과 완전히 타협하거나 혹은 완전히 분리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 대신 끝까지 바른 답을 찾아가야 합니다. 비록 그 답이 완전하지는 못할지라도 내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을 기초로 해서 구체적인 답을 찾아가는 노력을 기울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완전한 답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애씀과 노력이니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바사의 왕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에스더는 아하수에로 왕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그래서 대제국 바사의 왕후로 선택되었습니다. 1년이 넘는 기간동안의 기다림과 인내 끝에 그런 영예를 얻게 되었고, 커다란 결혼잔치와 함께 공식적으로 왕후의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성경은 에스더를 키웠던 사촌 오빠인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수산궁의 문지기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룻기를 통해 살펴 보았던 것처럼 고대세계에서 성문은 단지 성문의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문은 일종의 법정 역할도 했습니다. 작은 성의 경우에는 성문에 그 지역의 장로나 유지들이 앉아있다가 백성들이 가지고 오는 해결하기 힘든 문제들을 해결해 주곤 했습니다. 수산성의 성문이라고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수산궁이 있었던 곳에서 발굴된 유적을 살펴 보면 아하수에로 당시의 수산궁 대궐 문에는 아하수에로의 아버지인 다리우스가 건축했던 가로 40미터, 그리고 높이 28미터의 커다란 건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어서 거기서 법적인 소송이나 관료들의 공식적인 업무가 처리되었다고 하는데, 모르드개가 있었다고 하는 성문은 바로 이 건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르드개는 수산궁의 문지기가 아니라 어느 정도 위치가 있는 바사의 고위 관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르드개는 바사의 관리로 대궐문에서 공무를 수행하다가 우연히 빅단과 베레스라는 두 내시가 아하수에로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세우는 것을 듣고 그것을 에스더를 통해 왕에게 알려서 왕의 목숨을 구해주기도 했습니다. 


에스더는 바사의 왕후가 되었고, 모르드개는 제국의 관리가 되어서 열심히 그 나라를 섬기다가 왕의 목숨까지 건져 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만 본다면 참 대단한 영광입니다. 그 나라의 전쟁포로들, 그것도 이런 저런 사정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조차 없었던 불우한 사촌 남매가 대제국의 높은 자리를 차지했고, 왕의 목숨까지 구해주는 공을 세웠으니까요. 참 대단한 복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그 나라에 전쟁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전쟁에 져서 이방 땅에 끌려와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아주 치욕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이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무시하고 멸시하는 그런 사람들을 섬기며 살고 있었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그 나라의 고위직까지 올라가고 심지어 왕비가 되는 것은 과히 영광스럽기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보면 ‘부역자’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점령했을 때,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사람들인데요. 보기에 따라서는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그런 사람들로 생각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분명히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는 두 사람을 그렇게 생각하며 비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러운 배신자와 배교자라고, 자기의 영광과 이익을 위해서 하지 말아야 할 타협을 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 두 사람 뿐만 아니라 이 두 사람과 똑같은 처지에 있다가 이 두 사람만큼, 아니 어떻게 보면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들이 더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잘 아시지요? 바로 느헤미야와 다니엘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사람들이 세운 공로만 생각하느라 그런 생각을 잘 하지 못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이 네 사람은 자기 나라를 무너뜨리고 자신들을 포로로 잡아간 그 나라를 높은 자리를 얻어 그 나라를 섬겼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 어디서도 이 네 사람이  그 일에 대해서 고민하거나 혹은 죄책감을 느끼는 내용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 위치에서 그들은 최선을 다해서 그 나라를 섬겼고, 또 왕을 섬겼습니다. 쉽게 말해 그 나라를 가장 유익하게 하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들이 그렇게 한 일에 대해서 단 한 번도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이 사람들이 이런 선택을 한 것에 대해 ‘전혀 이의 없음’이라는 판결을 내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그리고 그 당사자들은 이러한 선택에 대해서 왜 이런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일까요? 


이것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사로 끌려가기 전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해 주었던 충고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레미야 29장 4절부터 7절까지 말씀인데요. 하나님께서는 그 때 예레미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사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같이 이르노니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취하여 자녀를 생산하며 너희 아들로 아내를 취하며 너희 딸로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생산케 하여 너희로 거기서 번성하고 쇠잔하지 않게 하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 놀랍게도 이것이 바사로 끌려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기 가서 싸우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반항하거나 혹은 한탄하면서 지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대신 평범한 삶이지만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집도 짓고 밭과 과수원도 일구고 열심히 농사짓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거기서 번성하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렇게 사로잡아간 그 나라의 평안을 위해서 힘쓰고 그 나라가 평안하기를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에 지고 바사로 끌려가는 것은 단순히 바사가 강한 나라이고 이스라엘이 약한 나라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게 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너무 많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받는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일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은 달라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이니 하나님께서 그 징계를 끝내주실 때까지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거기서 그 나라를 섬기며 인내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불안한 것인지, 그리고 반대로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것이 얼마나 복되고 좋은 것인지를 확실하게 느끼고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오해하실까봐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이스라엘의 경우에, 그것도 하나님의 예언이 있을 경우에만 해당되는 이야기 입니다. 일반적인 나라가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아 속국이 되는 경우에는 이런 원칙을 적용해서는 안됩니다. 괜히 누구처럼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를 경험한 것이 하나님의 징계였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명확한 말씀이 없었으니까요. 이스라엘 역사를 보아도 이스라엘이 로마에 점령당했을 때는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없어질 때까지 독립을 위해서 싸우고 또 싸웠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했던 것은 그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예언해 주신 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바사는 그저 이스라엘이 억지로 끌려와 죽지 못해 사는 그런 땅이 아니었습니다. 바사는 그들에게 징계의 자리였고,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제자리를 찾아 돌아가야 하는 땅, 하나님이 기간을 두고 머물게 하신 그들의 삶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니, 거기가 바사라고 할지라도 거기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야 했고, 그 나라가 잘 되게 하기 위해서 기도하며 섬겨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질문하시는 분들이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왕비가 되는 것은 조금 그렇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왕비가 되는 것은 이방인과 결혼관계를 맺는 것인데, 어떻게 유대인이 그럴 수가 있느냐고 말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원칙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과의 결혼관계를 금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혈통이 섞여서는 안된다는 뜻이 아니라, 결국 이방인과 결혼을 하면 그 상대방이 섬기는 신과 타락한 문화를 함께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명령은 단순히 개인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하나님 나라 전체와 연결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를 지키기 위해서 정해진 법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믿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결혼을 하는 것은 전혀 문제 삼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전혀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지키는 일과는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래도 에스더가 아하수에로의 왕후가 된 것은 뭔가 석연치 않게 여겨지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그것은 에스더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사의 왕과 결혼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이방나라에서 커다란 영광을 취한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우리가 에스더가 왕후가 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에스더는 왕후가 되는 일에 굉장히 수동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에스더에게서 어느 날 갑자기 대제국의 왕후가 될 기회를 잡은 허영에 들뜬 아가씨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2장 8절을 보시면 에스더가 왕비 후보가 되었을 때, 왕궁으로 ‘이끌려 갔다’고 되어 있는데요. 굉장히 점잖게 들리지만 원래 이 말은 ‘붙잡혀 갔다’는 말입니다. 죄수나 포로처럼 말입니다. 물론 에스더가 왕궁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지도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그 일에 적극적이지도 않았던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뿐만 아니 아닙니다. 왕궁에 들어간 이후에도 에스더는 다른 후보들과는 달리 왕후가 되기 위한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차례가 되어 왕의 부름을 받아 왕에게로 가는 날은 모든 왕비후보들에게는 정말 기적과 같은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그 날은 그들이 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요구하는 대로 다 주게 되어 있었고, 다른 후보들은 다 그렇게 왕이 최고로 마음에 들어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향수와 옷, 그리고 장식품으로 치장하고 왕에게로 갔습니다. 그렇지만 에스더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15절을 보면 에스더는 자기가 왕에게로 가야 할 그 날 궁녀담당 내시인 헤개가 주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도무지 에스더가 왕후가 되고 싶어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입니다. 에스더가 정말 왕후가 되는 것을 바랬다면 에스더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왕비 후보로 뽑혀서 궁으로 들어갔지만 거기서는 오히려 별로 왕비가 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은 어찌보면 참 이율배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에스더가 궁 안에서 우거지상을 하고 어둡고 칙칙하게 지낸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과 좋은 관계 속에서 사랑을 받으며 지냈던 것을 보면 이런 모습은 더욱 더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이러한 에스더의 왕궁 안에서의 모습, 그리고 앞서 보았던 모르드개의 모습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자리매김하며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들려 줍니다. 


 앞서 읽어 드렸던 예레미야서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바사에서의 삶은 조금은 독특한 모습을 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적극적이고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면서도 어떤 부분에서는 굉장히 소극적이고 무관심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선 에스더와 모르드개를 보면 이 두 사람이 대충 살았던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르드개는 포로이면서 바사의 고위 관리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 자리에 왕에게 아첨하거나 편법을 써서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에스더서가 전체적으로 보여주는 모르드개의 모습은 성경이 말해주는 다니엘이나 느헤미야의 모습을 많이 닮아 있습니다. 그는 그 나라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면서도 정말 자신이 맡은 분야에서는 그 능력을 인정을 받을 정도의 인물이었습니다. 에스더는 어떻습니까? 에스더는 우리가 지난 주일에 살펴 보았던 것처럼 자신의 내면을 아름다운 겉모습만큼이나 아름답게 가꾸는 일에 힘썼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용모가 고왔을 뿐만 아니라 아리땁기도 했지요. 심지어는 왕비의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이는 다른 여인들로부터도 사랑을 받을 정도로 매력적인 성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예레미아의 말처럼 포로로 잡혀간 그 나라에서 그 나라에 사는 한 사람으로서 인정받는 삶을 살려면, 그리고 진정으로 그 나라를 유익하게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꼭 필요한 태도이며, 우리가 모르드개와 에스더 두 사람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 두 사람은 바사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일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면서도 남들이 모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바사가 주는 영광과 부였습니다. 그래서 모르드개는 왕의 목숨을 구해주는 공을 세웠으면서도 자신에게 상을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잃게 될 수 있을 줄 알면서도 하만에게 절하는 것을 끝까지 거부할 수 있었습니다. 또 에스더는 비록 왕비후보로 발탁되어 왕궁에 들어갔지만 거기서 다른 여인들과 그 자리를 놓고 경쟁하지 않았고 오히려 덤덤한 모습으로 지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옆에서 이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면 참 이상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자신들과 너무 많이 다르니까요.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그것이 바로 이들을 진정으로 매력있게 만드는 부분이 아니었을까요? 저는 분명히 그랬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이방 땅으로 유배보내시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 이스라엘에게 주신 소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성경을 보면 원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맡기신 소명이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고, 그런 면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징계를 받는 이유는 그 소명대로 사는 일에 완전히 실패한 것 때문이었으니까요.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로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이 보입니다. 물론 고민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고민 끝에 얻은 대답도 완전한 대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모르드개가 바사의 관리가 된 것이나 에스더가 바사의 왕비가 된 것이나 그것이 100퍼센트 올바른 선택이었고, 그것만이 정답이었다고 볼 수는 없으니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일은 사실 딱 떨어지는 정답이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마치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살았던 바사처럼 그 어느 곳 하나 죄로 오염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니 그런 영역이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 자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 우리들의 판단력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민하고 선택하는 것이 완전한 정답이 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이 그것 자체로 명백하게 악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선택한 우리의 자리 때문에 우리를 비난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여전히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우리에게 주어지고 또 우리가 선택한 그 자리에서 내가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바사 같은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영광을 드러내는 오늘의 이스라엘로 부름 받았습니다. 자리와 상관 없이, 그 자리가 주는 부나 영광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주어진 그 자리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사람으로 살라고, 그리고 우리를 치장해 주는 것들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드러내는 일에 헌신하며 살라고, 우리에게 그 자리를 주셨고, 그 자리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소명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 있으면서 세상과 구별되는 삶을 살아가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소명으로 옷 입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이 소명으로 옷 입을 때, 우리는 정말 매력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덧붙이려고 애써야만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세상에 보여주려고 애쓰면서 살면 그런 것은 우리에게 덤으로 주어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얻은 사랑과 인정만이 때로 그것이 사라졌을 때도 우리를 허무하지 않게 하고 갈증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이미 그 속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바사 같은 세상에 살지만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고 정직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는 아름답고 매력적인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인간에게 모두 인정받는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이 영광스럽고 복된 부르심에 순종함으로써 세상이 줄 수 없는 이 복을 누리며 사는 오늘의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바사 같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 분리되거나 완전히 섞이지 않게 하소서. 
  2.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게 하소서. 
  3. 이 세상에 유익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