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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9.30. 새벽예배 - 이 노래로 노래하니(출애굽기 51)






본   문 : 출애굽기 15장 1-8절





예전에 제가 제 친구의 어머님의 장례식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장례식을 다 마치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버스에 오르는데, 거기 참석했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어떤 젊은 사람이 조금은 신기해 하면서 자기는 기독교 장례식이 참 좋다고 말했습니다. 울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노래를 하니까 참 좋다고 말입니다. 죽음의 순간에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을 땅에 묻고서 은혜 가운데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은 우리 예수믿는 사람들 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들은 찬양을 좋아하고 또 찬양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찬양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저 노래가 중요하고 또 노래가 좋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노래를 통해 특별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물론 찬양이 중요하고 찬양이 참 좋고, 찬양을 하게 되면 감정이 풍요로워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은 다 찬양이 만들어 내는 일종의 ‘효과’이지 진짜로 찬양을 하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찬양하라고 요구하신 이유가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부르는 찬양에서 곡조가 더 중요할까요 아니면 가사가 더 중요할까요? 가사가 더 중요합니다. 다른 노래는 어떤지 몰라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은 가사 때문에 곡조가 있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닙니다. 물론 가사 없는 찬양도 있습니다. 악기만으로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찬양할 때는 그것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만들어 지고 또 불려지는 노래라는 것을 모르고 들으면 거의가 다 그것이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서 만들어진 노래라는 것을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적어도 듣는 사람들에게는 별 유익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찬양은 반드시 가사가 있어야 하며, 그것도 가사 중심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제대로 노래하는 가사가 그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찬양은 분명히 하나님을 높이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들로부터 기쁨을 얻으십니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찬양의 유익은 고스란히 찬양하는 사람의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찬양을 통해서 찬양하는 사람은 자신이 믿고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거듭 거듭 확인하고 또 확인하며 자신의 믿음과 소망, 그리고 기쁨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찬양이란 가장 적절한 태도와 감정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기억하게 해 주는 아주 귀한 역할을 해 주는 참 좋은 신앙의 도구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병거들을 홍해에 몰아넣고 수장시키시는 엄청난 승리를 거두시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들을 구원하시자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함께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들이 이 노래를 부르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애굽을 홍해에 몰아넣고 완전히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 일을 통해서 자신들을 애굽에서 건지신 하나님께서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다시 한 번 확실히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그 내용들을 노래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노래하고 싶었던 하나님, 그리고 이스라엘이 잊고 싶지 않았던 하나님은 애굽군대를 일거에 격퇴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막강한 애굽군대를 일거에 박살내신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깨닫게 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높으심과 영화로우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밖에 없는 순간입니다. 사람이 진실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과 얼마나 다른 분인지를 제대로 깨닫게 되어질 때입니다. 자신들은 홍해 앞에서 다 죽이려고 여기까지 데리고 왔느냐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마구 쏟아 놓으면서 하나님을 비방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홍해를 반으로 쪼개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그리로 건너게 하셨고 바로 그 곳이 애굽 군대의 공동묘지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능력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준과 얼마나 다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그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순히 하나님이 그렇게 높고 영화로우신 분이었기 때문에만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그렇게 형편없은 자신들을 위해서 싸우시는 용사가 되어 주셨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들 대신 싸워서 그 승리로 자신들을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더 생생하고 감격적인 찬양을 올려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의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최고의 지휘관들이 바다에 잠겼고 깊은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 속에 가라 앉았도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정말 하나님만큼 높여 드리면서도 기쁘고 즐겁게 하나님을 찬양하려면 첫째, 하나님이 우리와 얼마나 다른 분인지를 깨달아야 하고, 둘째, 그렇게 높고 영광스러운 분이신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움직이시고 일하시고 그래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입니다. 내가 가까이 갈 수도 없을 정도로 높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이 그렇게 나를 위해서 싸우시고 또 나의 구원자가 되셨으니 그 은혜가 더 높고 크게 여겨져서 하나님을 기쁘게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말고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것 또한 홍해 사건을 통해서 다시 한 번 깨닫게 된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 때문인데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소중히 여기시며 그 언약을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제대로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2절에서 그들은 이렇게 외칩니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사건을 통해서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던 것은 아버지의 하나님, 그러니까 조상들의 하나님이 자신들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정말로 지키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그 사건을 통해 다시 한 번 아주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앞에서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울부짖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홍해 한 가운데 길을 만들고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물론 애굽의 군대를 멸하시기 위한 일이기도 했지만 전혀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만들어서라도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가실 것이라는 의지를 보여주신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홍해를 건너면서 높고 영화로우신 하나님, 용사이신 하나님 뿐만이 아니라 한 번 하신 약속은 절대로 어기는 법이 없으신 하나님을 만났고 그래서 그런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감격하며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높고 영화로우신 하나님, 그렇지만 믿음 없고 연약하기만한 우리들을 위해서 항상 싸우시는 하나님, 우리의 신실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약속을 지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하나님. 이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아침에는 우리 교회와 우리 개인의 역사 속에서 똑같이 행하셨던 그 높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기억해 보시고, 그 기억을 찬양의 내용으로 삼아 하나님을 찬양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잊고 지냈던 은혜와 감격, 그리고 기쁨이 되살아나는 은혜를 되찾아 맛보는 복된 아침이 되게 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아침에 홍해 앞에서 찬양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찬양이 우리의 찬양이 되고 그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 되는 은혜가 풍성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