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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4.10.17. 금요기도회 - 들으라(사도행전 80)






본문 : 사도행전 13장 4–16절




바나바와 바울의 구브로 섬 선교에서 얻은 가장 값진 열매가 있다면 그것은 단연 섬의 총독이었던 서기오 바울이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의 경우처럼 자신에게 들려오는 ‘소문’ 덕분이었습니다. 자기에게 들려온 복음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 스스로도 그 복음을 듣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생각을 무시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겼기 때문에 그는 예수님을 믿는 값진 은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7절을 보면 이 일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서기오 바울은 거짓 선지자요 마술사인 바예수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 섬을 다스리는 총독으로서 막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바예수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예수의 말만 듣고 거기 휩쓸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들려온 복음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 복음을 직접 들어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였습니다. 


성경은 서기오 바울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를 그가 ‘지혜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해 줍니다. 지혜란 무엇이 중요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분별하고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놓치지 않게 해 주는 그 사람의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기오 바울은 실루기아에서 온 두 사람이 복음이라는 것을 전하는데 그 복음이 수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냥 그런 게 어디있느냐고 무시할 수도 있었습니다. 옆에서 부정적으로 말하는 바예수의 이야기를 듣고 거기 휩쓸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서기오 바울은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스스로 어떤 일이 중요한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그렇게 분별한 것을 직접 확인해 보고 또 자신도 붙들어 보려는 의지와 결단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성도들을 보면 많은 분들이 ‘간증’이라고 불리는 것을 듣기를 좋아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경험한 특별한 은혜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을 때 참 은혜로워하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애석한 것은 그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경험한 사람들 중에서 자신도 그런 은혜의 주인공이 되겠다고 뜻을 세우고 결단을 내려 그 방향으로 추구하며 달려가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저 들을 때 뿐입니다. 우리가 듣는 다른 성도들이 경험한 은혜에 대한 이야기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문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어떠해야 할까요?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과 은혜에 대한 수많은 소문들을 듣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초대장입니다. 너도 그 믿음과 은혜의 능력과 유익을 누리는 주인공이 되라는 하나님의 초대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초대장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도 그 믿음과 은혜를 소유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품어야 하고, 그것을 얻기 위한 결단을 내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몸을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야 그 믿음과 은혜가 실제로 우리를 위한 능력이 되고 복이 될 수 있습니다. 비단 사람들의 간증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모일 때마다 듣고 있는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성경말씀이고 하나님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 주에도 몇 번씩 설교를 듣는 우리의 믿음은 그렇게 잘 자라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우리가 듣기는 들어도 그 들은 것에 대해서 지혜롭게 반응하지 않을 때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들을 때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 저렇게 믿어야지. 나도 저런 믿음을 가져야지. 나도 그렇게 해야지. 그래서 그 은혜를 누려야지.” 그렇지만 예배가 끝나고 돌아서는 순간 그런 생각은 간 데 없고 다시 예배 드리기 이전과 같아집니다. 때로는 그런 생각이 며칠 동안 이어지기도 하지만 그 며칠이 지나면 다시 제 자리입니다. 과연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은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바로 그런 생각 때문에 우리가 더 큰 믿음과 은혜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일단 우리는 설교를 들으면서 참 신앙의 복과 능력에 대한 선하고 강력한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그 정도로 듣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며 또 듣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면 안됩니다. 지혜로운 성도라면 그렇게 듣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선하고 복된 도전들을 향해서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뜻을 세우고 그 믿음에 이르고 그 은혜를 받을 때까지 그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분명히 방해는 있습니다. 서기오 바울에게 바예수라는 방해꾼이 있었듯이 우리가 그렇게 하는 일에 사람이라는 장애물이 있을 수 있고, 또 상황이라는 장애물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게으름과 무관심이라는 우리 내면적인 장애물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결단은 그 장애물을 넘어설 수 있을 정도로 강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장애물을 피하고 넘을 수 있을만큼 지혜로워야 합니다. 우리의 지혜를 내가 그 믿음과 은혜의 주인공이 되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혜라는 말을 들으면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그런 것도 사실이죠. 그렇지만 그렇게 타고나는 지혜는 깊고 단단한 지혜가 되지 못합니다. 그런 지혜는 그저 흉내만 낼 뿐입니다. 참되고 가치있는 지혜는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주변에서 지혜롭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그 사람들이 삶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지혜롭지는 않을 것입니다. 특히 지혜롭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그 부분에서 지혜로워질 수 있었을까요? 그 비결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 중요한 일을 더 잘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 중요한 것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 중요한 일을 그르치지 않고 제대로 해 낼 수 있을까? 이런 고민들을 많이 하다 보니 그 일에 있어서 지혜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믿음과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두 가지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그 능력과 복을 누리는 데에도 많은 고민과 생각이 필요합니다. 잠시잠깐 감동을 받고 자극을 받는 일로는 부족합니다. 어떻게 하면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능력있는 은혜의 주인공이 되고 그 은혜를 지속할 수 있을까? 자주 자주 생각해야 하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어야 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더 나은 믿음과 더 풍성한 은혜를 얻는 일에 있어서 지혜로워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지혜를 따라 믿음생활을 해야 합니다. 


저는 일시적으로는 은혜를 받고 믿음의 성장을 보이다가 이내 뒷걸음질을 치는 성도들을 보면 정말 안타깝습니다. 제가 여러분이 그런 것을 어떻게 아느냐구요? 척 보면 압니다. 여러분의 표정 속에서 여러분의 믿음과 누리고 있는 은혜가 거의 드러납니다. 특히 예배 드릴 때 말이죠. 그 모습을 몇 주간만 살펴보면 대번 드러납니다. 그래서, 성도는 항상 자신의 표정을 잘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거울에 비친 자기 표정 속에 믿음으로 인한 평안이 있는지, 그리고 은혜로 인한 기쁨이 있는지를 잘 살피고 그것을 통해서 믿음과 은혜를 지켜내고 더 풍성하게 하는데 예민하게 대처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저도 인간이란 어느 정도는 왔다 갔다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저 자신도 그러니까요.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그게 너무 자주 반복되고, 또 뒷걸음질 치는 기간이 너무 길어지는 것은 그래도 좋은 일도 아니고, 또 그럴 수 밖에 없다고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그러기에는 꼭 붙들어야 하고 누려야 할, 하나님께서 주시는 너무나 많은 좋은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은혜에 있어서 지혜로워 지고 그 지혜를 사용해서 더 나은 믿음과 더 풍성한 은혜로 나아가는 일이 쉽지 않은 일이어도 우리는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 앞에 있으면서도 주님이 주시는 진짜 복들을 너무 쉽게 흘려 보내게 됩니다. 


서기오 바울은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에 대한 소문이 들려왔을 때 복음이 꼭 한 번 들어보아야 할만큼, 그리고 나서 그 가치에 따라 자신의 태도를 정해야 할만큼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울과 바나바를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직접 두 사람이 전해주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 때 바예수라는 방해꾼이 등장합니다. 믿음을 방해하고 결단을 방해하는 사람이 끼어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방해꾼을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밖에 없게 만들어 주는 도우미로 사용하셨습니다. 바울을 통해 바예수의 눈이 멀게 하심으로써 직접 자신이 들은 복음과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게 해 주셨고, 그것이 오히려 서기오 바울의 믿음을 향한 결단을 더 쉽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가끔씩 어렵게 예수를 믿기 시작한 분들이 믿음생활을 시작하면서 어려움을 겪게 되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참 안타깝지만 그 어려움은 스스로 견디어 낼 수 밖에 없습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힘들고 어려워도 그 어려움들이 끝날 때까지 인내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믿음은 중간에 좌절되고 맙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끝까지 참아내면 그 어려움은 오히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명해 주는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예수 믿은 분들의 믿음이 오히려 오랫동안 예수믿은 분들보다 더 뜨겁고 견고한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과 은혜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결단을 지니고 있다면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은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돕는 디딤돌이 되어 줍니다. 그 때 하나님은 그 장애물들을 직접 제거해 주셔서 하나님의 살아계신다는 것과 우리의 믿음이 참되다는 것을 확실히 증명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은혜를 향한 의지가 없다면 믿음의 장애물은 그저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믿음과 은혜를 향한 의지와 결단이 있다면 그런 장애물들은 우리의 믿음을 더 견고하고 높게 만들어 주는 디딤돌이 되어 줍니다. 처음 믿을 때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동안 항상 변함 없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에 대한 뜻을 확고하게 정하고 흔들리지 않게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들은 복음이 참되다는 것을 믿고 있지요? 그리고 그 믿음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너무 좋고 능력있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그 믿음과 은혜를 향해 견고한 뜻을 정해야 합니다. 믿음과 은혜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내 믿음을 더 견고하게 할까, 어떻게 하면 내가 더 많은 은혜를 누릴 수 있을까를 많이 생각해야 합니다. 믿음과 은혜에 대한 우리의 진지함 위에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증거들이 더해질 때, 우리의 믿음은 더 견고해 질 것이고, 그 믿음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은혜는 더욱 더 풍성해 질 것입니다. 이 은혜를 꼭 받으시고 또 잃어버리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게 구브로의 전도여행을 마친 바울과 바나바는 이제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로 갔다가, 거기서 비시디아의 안디옥으로 갔습니다. 참고로 이 안디옥은 안디옥 교회가 있었던 시리아 안디옥과 다른 곳입니다. 그리고 안디옥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회당으로 갔습니다. 회당장은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리고는 처음으로 예배에 참석한 외지인들인 바나바와 바울에게 혹시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배려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바울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나눈 것은 그 당시 유대교 안에는 혈통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 사람으로 유대교인인 사람들과 이방인들로서 하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뒤쪽에 속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두 부류의 사람들을 구분지어 부르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부름이었습니다. 자신이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한다면 지금부터 바울이 들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또 자신이 이방인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들도 바울의 이야기에 반드시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부터 바울은 참된 구원의 도를 전해 줄텐데 그것을 들어야 그들이 찾고 있었던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의 말씀은 우리를 향하여 “들으라!”고 외칩니다. 왜냐하면 듣는 일은 믿는 일의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들으라!”라고 외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꼭 하셔야 할 말씀이 있기 때문이며, 참된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들을 때, 그 위에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없거나 혹은 귀 기울여 들으려는 마음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은 성장해 갈 수 없습니다. 결코 좋은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란 그 뿌리와 자양분이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에 우리의 귀를 기울여 들을 때, 참 믿음의 역사는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겨난 믿음 또한 계속해서 듣는 것에 합당한 반응을 더할 때 성장해 갈 수 있고 든든해져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듣는 일을 빼 놓고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믿기도 해야하고 순종도 해야하지만, 그리고 은혜도 받아야 하지만 우선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특히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를 들을 때는 더더욱 그렇게 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진지하게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오셔서 예배 중에 선포되는 말씀을 들을 때, 절대로 오늘 못 들으면 내일 듣지 하는 마음으로 설교를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설교 속에 여러분의 참 믿음을 위한 길이 있고, 여러분을 위한 참 복이 있고, 여러분을 위한 은혜가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절대로 제 설교가 훌륭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저는 제 설교가 얼마나 형편 없는지 잘 압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담고, 하나님의 은혜를 담고, 또 하나님이 원하시는 역사를 일으키는데 얼마나 턱없이 부족한 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확신하는 것은 하나님은 분명히 이런 부족한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고 여러분에게 필요한 교훈과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부족하고 형편 없지만 저의 설교를 통해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성령님은 너무나 부요하고 강하시니까요. 그런데, 성령님께서 여러분에게 역사하시려면 일단은 여러분이 귀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정말 그 속에 은혜가 있고, 답이 있고,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는 생각과 믿음으로 귀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있는 말씀과 여러분의 삶과 신앙을 연결시키는 것은 바로 여러분의 귀, 그것 하나 밖에 없으니까요. 


우선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그냥 안됩니다. 그렇게 하려고 애쓰셔야 합니다. 잡 생각도 내쫓고 잠도 내쫓으면서 의도적으로 귀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집중이 안된다고 포기하지 마시고 말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들려주시는 말씀이 있다면 그 말씀이 진짜로 믿어질 때까지, 그 말씀의 은혜가 여러분의 것이 될 때까지 여러분의 관심과 생각을 거기로 집중하십시오. 여러분의 지혜를 믿음과 은혜를 더하고 지켜내는 일에 사용하시고, 또 그 일에 있어서 더 지혜로워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은혜를 주실 것이고,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빚어가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듣고 믿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를 붙들 줄 아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