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4.10.31. 금요기도회 -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사도행전 82)


* 오늘도 녹음파일이 누락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본문 : 사도행전 13장 26–41절




사도 바울은 비시디아의 안디옥에 있는 유대인들과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살펴 보았듯이 사도 바울은 곧바로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불순종의 역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 없이 베풀어진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의 역사로 부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진짜로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려면 그 이전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가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나의 힘으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고 또 구원을 얻을 수도 없음을 깨달아야 비로소 복음에 순종하는 겸손함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복음을 이야기 하기 전에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야기했던 더 중요한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러한 이스라엘의 역사는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거나 혹은 유대교에 속해 있지 않았다가 예수를 믿은 우리들에게는 그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게 느껴지지만 그런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유대교의 신앙은 곧 메시야를 기다리는 신앙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22절 이하에 나오는 다윗은 오실 메시야를 예표하는 인물인데, ‘다윗과 같은 왕’으로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는 유대교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다윗과 같은 왕으로 오신 메시야라고 말하는 바울의 선언은 가장 중요하고 충격적인 이야기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잘 느끼지 못하고 있어서 그렇지 예수님께서 성경이 예언해 온 구원자이시라는 사실은 우리들에게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의 예언을 모두 이루시고 그럼으로써 당신이 약속된 구원자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왜 예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지도 정확하게 알 수 없었을 것이고, 또 왜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를 구원하실 분으로 믿어야만 하는지 그 이유도 정확하게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구약성경은 그저 예수님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는 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여기 기록된 모든 예언들을 만족시키는 인물이 나타나면 그가 내가 보내는 너희의 구원자라는 것을 의심 없이 믿어도 좋다는 하나 밖에 없는 안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구약의 메시야에 대한 모든 예언을 이루셔야만 했고, 그 사실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단의 교주들이 주장하는 재림 예수 운운하는 모든 주장들이 거짓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그 누구도 구약의 예언을 모두 이룬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이야기를 마친 바울은 이제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미 구약성경을 통해서 이러한 구원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셨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보고서도 그 분이 약속된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요? 사도 바울은 놀랍게도 그 이유가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의 관리들이 안식일마다 선지자들의 말을 외우고 있었으면서도 그 말들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정죄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구약성경에 나와 있는 예수님에 대한 예언들 자체를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안식일마다 모여서 그런 예언들을 외우고 또 외웠습니다. 툭 건드리면 자다가도 웅얼거릴 정도로 메시야에 대한 구약의 예언들을 완벽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가 왔는데도 오히려 그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여러분에게 질문 하나를 드리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만약 어떤 사람이 성경에 나와 있는 중요한 구절들을 달달 외우고 있고, 그 내용을 줄줄 꿰고 있다면 과연 우리는 그 사실만으로 이 사람이 정말로 성경을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수학에서는 1+1=2라는 사실을 알면 그것에 대해서는 이상 더 알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을 아는 지식은 이것과 다릅니다. ‘안다’는 말이 성경에 사용될 때는 그 말의 뜻이 전혀 달라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에 대한 구약의 말씀을 외우고 있었습니다. 그 정도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진짜로 메시야가 왔습니다. 그런데 그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고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권력의 힘을 빌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의 생각에 예수님이 메시야가 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메시야에 대한 말씀을 다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말하는 대로의 메시야가 아닌 다른 메시야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메시야가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가져다 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줄 생각도 없고 또 주지도 않을 예수님이 메시야가 되면 자신들의 희망사항은 산산조각이 나고 맙니다. 그래서 죄 없는 예수님을 로마의 힘을 빌어 죽여 버렸던 것입니다. 


성경의 내용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곧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내용이 아니라 그 진짜 의미를 알고, 거기에 자신의 삶과 소망을 맞추어 가는 사람이 바로 정말로 성경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사람들이 진짜로 성경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안다는 사람들도 이와 반대방향으로 갑니다. 성경을 기준으로 자기 생각과 바라는 소망을 맞추어 가야 하는데, 거꾸로 가지가 원하는 것을 성경에 집어 넣어서 생각하고 그것을 성경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모 교단의 삼박자 구원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은 요한삼서 1장 2절에서 가져온 것인데 거기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정말 이 구절 속에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우선 영혼이 잘 되는 복이 있습니다. 또 범사가 형통하는 복이 들어 있구요. 또 육체적인 건강까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교단에서는 이 세 가지 복을 다 얻는 것이 구원이라고 가르칩니다.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의 본능에 이것보다 더 딱 맞아 떨어지는 가르침이 있을까요? 여기 나오는 영혼이 잘 된다는 말, 그리고 범사가 잘 되는 형통, 그리고 강건이라는 말은 상식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과연 성경전체에서 무슨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영혼이 구원받고 하는 일마다 잘 되고 몸까지 건강해 지는 것이 구원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저기 팔공산 잡신을 섬기는 무당 종교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어집니다. 영혼이 잘 된다는 말은 영적을 볼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른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범사가 잘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그렇다는 뜻이지 단순히 우리가 느끼기에 그렇다는 뜻이 아닙니다. 강건하다는 것은 단순히 육신의 건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든든하여 흔들림 없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아무리 잘 알고 있어도 성경을 하나도 모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성경이 말하는 대로 믿고 소망하며 거기에 우리 삶과 생각을 맞추어 가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성경을 알고 있다고 할 수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되면 우리도 언젠가 내 생각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참된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항상 불완전하고 부족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신앙이 내 맘대로의 신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다 하다 안되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신앙 생활 자체를 내가 소망하는 바를 이루는 통로로 생각하면 우리도 모르게 그 옛날 예수님을 핍박했던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이 저질렀던 실수를 저지르게 될 수 있습니다. 


정말로 성경을 안다는 것은 성경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기준에 모든 것을 맞춰간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우리의 믿음은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믿음이 될 수 있고, 우리 영혼을 안전하게 하는 그런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부족하더라도 힘들더라도, 그리고 때로는 내가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 때문에 성경의 기준 자체를 바꾸지는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해서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의 자리에 앉혀 놓았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그렇다고 해서 진리가 진리 아닌 것으로 대체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모든 일들이 놀랍게도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구약성경에 나오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성취하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그들은 몰랐습니다. 그들은 그저  죄 없는 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증거가 되었던 것입니다.


얼마 전에 끝이 난 ‘왔다 …’라는 드라마가 있지요. 거기서 악역이었던 사람은 그렇게 된 이유야 어쨋건 정말 정말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 스토리 전체를 망가뜨렸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배우가 아무리 악한 배역을 담당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 또한 그 스토리 안에서 움직였을 뿐입니다. 드라마의 결말을 바꾸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결말을 가장 완벽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역사 속에서 맡게 되는 역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인간은 그저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역사 속에서 움직일 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를 망가뜨릴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태로워 보이는 이 세상을 보면서도 항상 안심할 수 있고 평안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결말은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 놓으셨고 그대로 흘러가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이나 사건들은 하나님도 어쩔 수 없어서 일어나는 일들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목적을 이루는 도구가 될테니까요. 


악인들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죄인으로 몰아서 하고자 하던 대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고, 아무도 그 시신을 훔쳐가지 못하게 큰 돌로 무덤 입구를 막아 놓고 로마 군병들이 지키게 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런 일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더 확실한 사실로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누구도 밤새 로마 군사들이 지키던 무덤에서 그 큰 돌을 굴리고 예수님의 시신을 빼내갈 수는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사실 죽음이 없다면 부활도 없습니다. 그리고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은 메시야가 되실 수 없었고, 그러면 우리가 그 분을 믿는다고 해도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죽음은 진리가 진리 아닌 것으로 바뀌어 버린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의 완전한 승리를 준비하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만들어 주었던 돌무덤은 결국 예수님께서 죽음까지도 정복하신 왕이요 메시야이심을 만천하에 증거하는 증거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죽여서 무덤 속에 넣어 놓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그런데 이것 또한 구약성경에 나와있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래 전부터 메시야에 대해서 예언되어 있었던 사건이고, 이제 그 예언을 따라 이루어진 실제 사건이 되었을 뿐입니다. 시편 27편을 인용한 35절 말씀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시편 말씀이 다윗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죽어서 장사된 후에 다시 살아나지 못했으니까요. 다시 살아나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썩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됩니까? 원래부터 그 말씀은 예수님을 향해서 예언되어졌던 말씀이 되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에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 그러니까 다윗같은 메시야이심을 증명하는 증거가 되게 됩니다. 


그런데, 죄의 결과는 죽음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은 이제 죄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뜻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드리신 제사를 완전히 인정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 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 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이제 진짜 복음이 들려집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이 되실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선포됩니다. 사람은 절대로 자기 힘으로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자기 힘으로 의로워질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삶으로 모든 율법을 다 이루시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값을 다 치르셨을 뿐 아니라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셔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과 당신이 행하신 모든 일들이 완전히 의롭다는 것을 하나님께 인정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힘 입으면 죄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다시 하나님과의 깨어졌던 관계가 회복되어서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러운 소식입니까? 얼마나 명확하고 확실한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까? 이것이 복음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복음이 될 수 있겠습니까? 또 우리가 이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은혜요 복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놀라운 은혜의 복음, 그 옛날부터 예언되고 또 예언되어 왔고 두고 두고 성취되어 왔던 복음의 한 가운데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능력이 있는 것도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기 때문이지 그저 돌아가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돌아가시는 것으로 끝났다면 예수님은 죄도 죽음도 이기지 못하신 것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님의 부활을 항상 생각하며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 분의 부활이 나의 죄용서가 되었으며 그 분의 부활이 나의 의가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항상 우리 구세주 되시는 예수님의 부활을 확실히 붙들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나에게 주어진 죄 용서와 의롭다하심의 은혜를 확신하면서 새 생명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로 영광스러운 복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