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행전 13장 42–52절
우리가 지난 금요일에 살펴 본 대로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복음은 우리가 듣는 것과는 전혀 다른 형식의 복음이었습니다. 그 복음은 밝은 내용부터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의 역사부터 시작되었고 거듭되는 불순종 이야기로 이어져 갔습니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라 듣기 싫은 이야기 부터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복음은 사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일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자를 주시겠다는 그 약속을 성취 했습니다. 그 덕분에 그들에게 죄 용서와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 절대로 여려질 수 없는 길이 열려지게 되었습니다. 만약 사람이 충분히 열 수 있는 길을 하나님께서 대신 열어주신 것이라면, 그러니까 사람이 잘 믿고 잘 순종해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데도 그것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면 예수님에 대한 소식은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소식은 조금 좋은 소식은 될 수 있어도 정말 좋은 소식, 꼭 듣고 받아들여야 할 소식은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우리도 충분히 열 수 있는 문을 하나님께서 대신 열어주셨다는 그저 그런 소식이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가 절대로 열 수 없는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하나님이 직접 열어 주셨다는 소식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복된 소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복음은 반드시 믿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열린 문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멸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알려줄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복음이 들려지기 전에는 잘못과 죄가 지적되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들려진 후에는 복음을 거절했을 때 감당해야할 일에 대한 경고가 주어집니다. 가운데 있는 구원의 소식을 제외하면 앞 뒤로 전혀 유쾌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이렇게 보면 복음은 절대로 기분좋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듣는 사람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그러니까 복음을 듣지 말아야 할까요? 그것 때문에 기분 나쁘니까 복음도 통째로 거부해도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복음은 이 전체가 복음입니다. 복음이 복음이 되려면 자신이 가망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먼저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복음을 거절하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기대할 것이라고는 멸망과 저주 밖에 없다는 것도 함께 들어야 합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구원의 은혜가 필요하고 그 은혜를 거절하면 영원한 멸망 밖에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은 그것이 듣는 사람들을 아무리 불쾌하게 하고 힘들게 할 지라도 반드시 듣고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오늘날 성도들 중에서는 자기 취향이나 기분을 너무나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는데 취향에 맞지 않거나 듣기에 별로 기분이 좋지 않으면 그 말씀에 대해서 귀를 닫아버립니다. 옳으냐 그르냐 맞느냐 틀리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과연 이런 태도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있을까요?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은 그 사람을 구원하는 은혜의 말씀이 되고, 그 사람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능력의 말씀이 될 수 있을까요? 예전에 대학시절에 저를 가르쳐 주시던 한 전도사님이 하셨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그 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파선한 자가 되어서 읽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배를 타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풍랑을 만나 배가 깨집니다. 배를 타고 가던 사람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판자는 너무 좁아서 싫고, 저 판자는 잡기가 불편해서 싫고, 그 판자는 너무 거칠어, 저 나무는 내 스타일이 아니라서 싫고…. 그렇게 나무 가려가면서 붙들까요? 아니지요. 파선된 사람은 절대로 그런 것을 가리지 않습니다. 정말 절실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아무 거나 붙잡게 되어 있습니다. 그 전도사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성도들의 태도가 바로 그러해야 한다고, 그래야 그 말씀이 그 사람을 살리고 건지는 능력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지막 말도 똑같은 말입니다. 죄 용서를 받으려면 하나님 앞에서 산 자가 되려면 복음을 꼭 붙들어야 합니다. 그 복음이 아무리 거칠고 나를 기분 나쁘게 하더라도 그 복음을 꼭 붙들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바다 한 가운데서 파선당한 그런 상태이기 때문에 들려오는 말씀을 붙들지 않으면 그는 결국 바다에 빠져 생명을 잃게 되고 맙니다.
복음이 우리의 영원한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것이듯이 우리가 보고 듣는 하나님의 말씀 또한 어떤 특별한 상황 속에서 우리의 살고 죽음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그런 말씀을 겉으로 보이고 들려지는 모양에 따라서 받아들이기도 하고 거절하기도 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을 살리는 말씀의 진짜 능력을 모두 놓치고 맙니다. 뿐만 아닙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망하듯이, 그런 사람의 영혼은 겸손하게 말씀을 듣고 붙들 수 없기 때문에 실제의 삶 속에서 쉽게 실망하고 무너지며 죄에 빠지게 됩니다. 뿌리 없는 나무처럼 힘없이 흔들리게 됩니다. 저는 오늘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믿음이 맥이 없고 쉽게 흔들리는 커다란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파선당한 사람이 나무 판자를 붙들듯이 그렇게 붙들지 않고 있으니 그 말씀의 능력이 꼭 필요할 때, 전혀 도움을 받지 못하고 힘 없이 휘청거리며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날 바울로 부터 복음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선 어떤 사람들은 설교를 마치고 나가는 바울을 붙들고 “다음 안식일에도 다시 오셔서 꼭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전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했습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이 말보다 더 듣기를 원하고 또 사모하는 말이 어디있을까요?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이런 욕심을 가지고 있는 청중들을 만나는 것은 설교자들 최고의 꿈이며 은혜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런 청중들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가장 복된 사람들입니다. 결국 그런 성도들이 말씀의 은혜와 능력을 가장 풍성하게 누리며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날 회당에서 복음을 들은 사람들 중에서 많은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입교한 이방인들의 다수가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며 그들에게서 더 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요. 성경은 두 사람의 가르침을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물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성도 여러분, 바른 신앙이 무엇인가요? 우리의 신앙이 방향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이지요? 그것은 바로 ‘항상 은혜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우리의 신앙 안에 나의 의와 공로가 끼어들기 시작하면 우리의 신앙은 순전한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듣고 부름을 받았으며, 그 복음으로 죄용서를 받았으며, 그 복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좋은 것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입니다. 지혜로운 성도는 이것을 꼭 붙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해서 은혜로 남아 있을 수 있고 또 그 은혜의 풍성함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우리는 받은 은혜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노력을 기울이지만 받은 은혜를 지키고 계속해서 그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그만큼 힘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참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귀한 보석을 얻으려고 헤매다가 막상 찾은 후에는 그것을 길바닥에 던져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귀한 보석을 찾았으면 잘 간직해야 합니다. 그 누구도 빼앗아 가지 못하게 안전하게 보관해야 합니다.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는 꼭 받아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은혜를 지켜내는 일입니다. 그러려면 은혜 받는 길에서 멀어지면 안됩니다. 매일 매일 더 새롭고 더 깊은 은혜를 구하고 누리기 위해서 여러분의 시간과 마음을 투자해야 합니다. 주시고 안 주시고는 하나님 소관이지만 구하는 자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그렇게 구하고 찾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은혜를 끊임 없이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 다음 안식일 회당에는 조금 더 보태서 온 시민이 다 복음을 듣기 위해서 모여들었습니다. 분명히 그 전 안식일에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자신이 아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들은 놀라운 이야기에 대해서 말했을 것이고 그것이 그들을 그리로 이끌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날 회당에서는 막 성대한 복음의 잔치가 벌어질 판이었습니다. 하늘 그물은 가득 채워지려 하고 있었고, 하늘 창고는 알곡들로 채워지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런 잔치같은 분위기에 물을 끼얹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 유대인들은 복음을 듣고 더 듣기를 원했고 그래서 바나바와 바울에게 더 배웠던 다른 유대인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같은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오히려 시기심이 가득 찼습니다. 거기 모인 무리들 때문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자신들이 전하는 말씀보다 바울과 바나바가 전하는 말씀이 더 인기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시기심에서 바울의 말을 듣고 비방하며 반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또 다시 본문에서 말씀을 경청할 수 없는 태도를 지닌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 사람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진짜냐 아니냐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시기심에 그의 이야기를 정직하게 생각해 보기도 전에 비난하고 반박했던 것입니다. 본질과 본질적이지 않은 것을 구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이렇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가 말씀을 보거나 들을 때, 마음 속에서 크고 작은 거부감이 생겨나고 자꾸 말씀에 무관심해 진다면 과연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잘 살펴야 하고 그것을 잘 처리해야 합니다. 특히 들려오는 말씀이 나를 그렇게 만든다면, 그 이유가 내가 듣는 말씀 자체에 있는지 아니면 이유가 될 수 없는 부수적인 것에 그 이유가 있는지 정직하게 판단하고 제거해야 할 장벽은 반드시 제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계속해서 말씀이 주는 은혜 가운데 머물 수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그들의 비방과 반박을 듣고 이렇게 응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성도 여러분, 이것이 말씀이 가지고 있는 무서움입니다. 하나님의 무서움이기도 하구요. 하나님은 기회를 주십니다. 은혜를 받고 복을 받을 기회를 주십니다. 그렇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그가 한사코 그 통로가 되는 말씀을 거절하면 결국 하나님은 그 기회를 거두어 가십니다. 적어도 상당 기간을 말씀이 주는 은혜와 복이 없이 살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우리는 절대로 우리 삶 속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심한 비방과 반박도 복음이 퍼져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여러분,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이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할 수 있을까요? 비록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핍박하고 방해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이루어 가십니다. 거침 없이 이루어 가십니다. 결국 주의 말씀은 사방에 두루 퍼져 나갔습니다. 그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유대인들이 이번에는 그 지역의 유력한 인물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며 그 지역에서 쫓아내게 만들었습니다. 어디나 악인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악인들에게 동조하는 사람들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바울과 바나바를 보십시오. 두 사람이 실망했습니까? 두려워 하며 이 일을 어떻게 할까 걱정하고 근심했습니까? 아닙니다. 두 사람은 담대하고 또 담담했습니다. 오히려 두 사람은 이 일 때문에 그 사람들을 향해 발의 티끌을 털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갔습니다. 이제 믿기로 작정된 자들은 다 믿었고 복음은 전해져야 할만큼 널리 전해졌으니까요. 오히려 두 사람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누가 누구를 쫓아냈습니까? 유대인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쫓아냈습니다. 그런데 누가 이겼나요? 쫓아내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쫓겨나는 두 사람이 이겼습니다. 승자는 두 사람이었지 유대인들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충분히 전파되어 열매를 맺었고, 기쁨과 성령충만함을 얻은 것은 두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질 때, 듣는 사람들은 세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첫째로 그 말씀을 경청하여 듣고 믿으며 더 듣고 싶어 합니다. 둘째, 무관심합니다. 셋째, 그 말씀에 대해서 반감을 보이고 반대합니다. 이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반응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말씀은 경청하여 듣고 믿으며 또 더 듣고 싶어하는 것 하나 밖에 없습니다. 진리는 믿기로 작정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 영혼을 기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울과 바나바가 끝까지 말씀을 듣지 않고 방해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발의 먼지를 떨고 그들을 떠났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계속 들려지는 말씀에 무관심해 하고 또 듣지 않으면 하나님은 더 이상 들을 기회를 주지 않으시고 그러면 더 이상 말씀이 주는 유익과 복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말씀에 대해서 깊은 관심이 없으신 분들이 계십니까? 그러면 하나님 말씀에 대한 관심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말씀을 들어도 또 듣고 싶고 더 알고 싶은 마음이 좀처럼 생겨나지 않으시나요? 그러면 진리가 내 영혼에 역사하게 해 달라고, 내 속에 하나님 말씀에 대한 기쁨과 갈증이 생기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내가 주님 주시는 듣고 기회를 놓쳐버리기 전에 내 속에 말씀을 향한 변화가 일어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힘들어도 진지하게 말씀을 향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을 살리는 생명이고 그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양식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풍성한 생명을 누리지 못합니다. 은혜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합니다. 성도 여러분, 누가 뭐라고 해도 성도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하고 그래야 생기가 넘치며 그래야 능력이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 말씀에 깊은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 관심을 잘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때로 잘 안들리는 말씀이 있어도 겸손하게 귀를 기울이십시오. 거기에 여러분의 생명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보고 또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말씀이 여러분을 살리고 살게 하며 또 이기게 할 것입니다. 항상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듣고 믿을 기회를 잘 붙드셔서 그 모든 기회들이 여러분을 위한 은혜와 능력의 기회가 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