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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4.11.14. 금요기도회 -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사도행전 84)





본문 : 사도행전 14장 1–7절




모든 성도들이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에 대해서 기대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저 역시 이 기대를 가지고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내가 하나님 편을 들고 또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내 편을 들어주시고 탄탄대로를 걷게 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그런 기대를 충족시켜 주실 때도 있지만 그렇게 해 주지 않으실 때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더 많이 순종하려고 하는데 어려움이 더 많이 생겨날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온전하게 하려고 애쓰는데도 이상하게 그 일을 방해하는 난관만 더 늘어나기도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적지 않게 당황하게 되고 하나님께 대한 섭섭한 마음과 심지어는 은근히 화도 품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기대를 완전히 포기할 수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지만 적어도 우리의 그런 기대가 절대로 깨져서는 안되는 신앙의 철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약속하신 적도 없고 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니까요. 지금의 어려움과 난관이 장래의 영광과 은혜를 위한 꼭 필요한 씨앗과 발판이 될 수 있습니다. 멀리, 그리고 마지막 목적지를 내다 보시고 우리의 인생과 이 세상을 섭리해 가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때로는 우리가 바른 길을 가고 있을 때에도 우리 삶과 이 세상의 역사 속에 끼어드는 악한 것들과 어려움들을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게다가 항상 하나님과 진리를 거스르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인 이 세상에서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무런 난관이나 반대를 경험하지 않을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인 기대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진리는 검입니다. 진리는 항상 진리와 진리 아닌 것을 둘로 나눕니다. 진리 아닌 것이 스스로를 드러내게 만들어서 저절로 진리에 맞서게 만듭니다. 여기서 갈등과 다툼이 있게 마련이고, 진리를 전하며 진리 편에 서는 사람들은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 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경험하게 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회당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 도시의 사람들도 둘로 나뉘어 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설교를 마치고 나오는 바울과 바나바를 붙들고 한 주간 그들을 따라다니며 더 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 다음 안식일에는 회당으로 자기가 아는 사람들을 전부 불러 모아 오기도 했구요. 그렇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전한 복음을 믿은 유대인들도 있었지만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반대하고 반박하며 세력을 모아서 두 사람을 쫓아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똑같은 일은 그 다음 행선지였던 이고니온에서도 그대로 발생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안디옥에서 쫓겨난 두 사람은 이고니온으로 갔는데요. 거기 가서도 두 사람은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그 복음을 듣고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반대편에 서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그들도 믿음을 가진 허다한 사람들과 똑같은 유대인이었고 또 헬라인이었지만 두 사람과 두 사람이 전하는 복음에 악감을 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자 한 쪽에서는 열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믿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그것을 반대하는 안디옥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또다시 반복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두 사람이 이미 경험했던 일이고 또한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그 반대 때문에 그 도시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두 사람이 그렇게 하는 대신에 그 도시에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는 것’을 선택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래서 주님께서는 두 사람의 손을 통해서 그 도시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날 수 있게 해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의 반대와 핍박에도 불구하고 더욱 더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 헌신했더니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능력을 나타내셔서 두 사람의 사역을 지지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러는 동안 사람들의 태도는 더욱 더 확실해져 갔습니다. 증거가 더해진 복음이 사람들에게 태도를 정하도록 하는 압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갈등은 심해질 대로 심해져서 두 사람과 복음을 반대하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관리들까지 동원해서 두 사람을 돌로 치려는 계획까지 세웠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알게 된 두 사람은 루스드라와 더베로 갔고 거기서도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이것이 이고니온에서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이 복음을 전했을 때 일어났던 일들의 자초지종이지만, 이 속에서 두 사람은 조금은 상반되는 행동을 보이고 있습니다. 먼저 2절을 보시면 두 사람을 싫어했던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선동해서 두 사람과 복음에 대해서 악감을 품게 하자 오히려 거기 오랫동안 머물면서 더 담대히 주님이 주시는 힘을 힘입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을 표적과 기사로 도와 주셨구요. 그런데, 5절을 보면 그 일 때문에 반대자들이 두 사람을 돌로 치려고 하자 이번에는 당당하게 맞서는 대신에 도망쳐 버리고 맙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은 왜 이렇게 상반되는 행동을 했던 것일까요? 단순한 악감이 이제는 돌로 쳐 죽이려는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겁을 먹고 도망친 것일까요? 두 사람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왜 두 사람은 두 경우에 정반대되는 선택을 했던 것일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정반대로 보여지는 이런 결정들은 실은 두 사람이 하나의 목적만을 생각하면서 내린 결정들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을 전파하고 사람들을 어느 정도는 그 복음 위에 든든하게 세워 놓는 일이었습니다. 이고니온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믿게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들을 양육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뜻이 됩니다.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고니온에서도 믿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더해지고 있었겠지요. 그래서 두 사람은 거기 더 오랫동안 머물 수 밖에 없었고 더 깊어지고 강해져 가는 두 사람에 대한 반감에도 불구하고 더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또 가르치겠다는 결정을 내렸던 것입니다. 우리가 14장 21절을 보면 두 사람이 다시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가서 거기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그 때까지 이고니온의 교회가 믿음을 잘 지키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 교회가 어느 정도 혼자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자생력을 가질 때까지 그들을 말씀으로 양육해야 한다고 믿었고 그래서 널리 퍼진 반감을 알면서도 오랫동안 거기 머물렀던 것인데, 그러한 그들의 헌신이 그렇게 열매로 맺혀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반대자들이 그들을 죽이겠다고 달려 들었을 때에는 두 사람은 몸을 피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저 위험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아직 복음을 전해야 할 곳이 너무 많이 남아 있었고 또 그냥 거기 있다가 거기서 좋지 않은 일을 당하면 이제 막 생겨난 이고니온 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흔들리게 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이전과는 다르게 루스드라로 피하는 결정을 내렸던 것입니다. 두 사람은 복음과 교회만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유일한 기준이었습니다. 때로는 위험한 상황을 버티기도 하고 또 때로는 반대로 도망을 치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전부 다 두 사람이 복음과 교회를 위해서 치른 댓가였던 것입니다. 


진리를 따라 산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에 헌신한다는 것. 그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그것이 곧 탄탄대로로 이어지지는 않으니까요.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비록 그것이 우리가 기대하는 모양 그대로는 아닐지 모르지만 우리가 그렇게 진리 편에 서고 또 진리를 위해서 헌신하게 될 때,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지 않고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해 나가시며, 그것은 우리들에게도 커다란 위로와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전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일하지 않았습니다. 부르심에 따라 움직였고 또 헌신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앞에는 탄탄대로만 있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이 전한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들도 생겨났지만 반대로 정말 극렬하게 반대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는데, 이들은 두 사람을 비방하고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목숨을 빼앗으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는 중에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 위험천만한 사역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러 모으셨을 뿐 아니라, 그들의 믿음을 든든하게 하셔서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핍박을 받고 쫓겨났지만 나중에 그 도시들을 다시 방문한 두 사람이 여전히 믿음을 지키고 있는 성도들을 보면서 누렸을 기쁨과 감사가 어떠했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얼마전에 20년이 넘게 소식이 끊겼던 후배와 다시 연결이 되었습니다. 그간 지낸 이야기를 해 보니 그 동안 정말 많이 힘들었다는 것을 대번에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 어려운 상황은 현재도 진행 중이구요. 그렇지만 그 후배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붙들고 바른 길을 가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제게 들려준 이야기 속에서 그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참 힘들었겠지요. 지금도 그렇구요. 그렇지만 그 결과 우선 그 후배는 옛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한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는 중에도 하나님의 일을 굉장히 열심히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배에게서 며칠 전에 이런 문자 메세지가 왔습니다. 전도폭발 훈련을 받은 후에 거리로 전도를 하러 나갔는데, 사람들이 복음을 너무나 잘 받아들이고 있고, 또 오랫동안 전도하려고 기도하던 사람이 너무 쉽게 복음을 영접했다는 메세지였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선배님, 이게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위로이고 선물인 것 같아요.”라고 말이죠. 


저도 목회를 하면서 그런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일아니 사람 때문에 고심하고 헌신합니다. 정말 애씁니다. 그런데, 그 일은 난관에 부딛힌 것처럼 답답합니다. 별다른 변화도 없구요. 그런데, 놀랍게도 열매는 엉뚱한 데서 열립니다. 생각지도 않은 은혜로운 일들이 일어나고 또 기대치 않았던 분들의 신앙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런 일들이 제게 얼마나 위로가 되고 확신을 주는지 모릅니다.  제가 어떤 일을 붙들고 끙끙대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셨고, 그 열매를 맺어가셨던 것입니다. 제가 이런 경험을 반복해서 하면서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떤 일을 하겠다고 목표와 계획을 세우고 애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꼭 그 일에서 내가 바라는 열매를 맺게 되는 일만이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가 아니라 그러는 동안에 내가 모르게 하나님께서 움직여 가시며 만들어 내시는 열매들이 진짜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하심의 증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나니 저는 조금씩 제가 하는 일에 대해서 자유를 얻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제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에 대한 흥분이 섞인 기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 이것은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다행히 순풍에 돛 단듯이 흘러갈 때도 있지만 그럴 때보다는 반대에 부딛히고 오해를 받거나 난관에 부딛힐 때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또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에 헌신하며 살아가는 삶은 그런 반대와 난관 자체가 그 일이 잘못되었다거나 혹은 그 일이 실패한 일이라는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렇게 오해를 받고 고난을 당하고 또 난관에 빠져 있을 그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시고 또 이루어 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려고 하다가 힘든 일들이 찾아 오거든 다른 곳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정말 예기치 못한 곳에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여주실 그 달고 시원한 하나님의 열매를 기대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위기를 경험하고 루스드라로 도망쳐 갔지만 거기서도 또 복음을 전했습니다. 두 사람은 고난과 핍박과 반대가 복음전도라는 소명이 실패했다는 싸인이 될 수 없다는 것과 그래서 자신들의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두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그저 묵묵히 하나님께 순종하며 바른 길로 나아가는 신실한 주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의 눈 앞에 하나님께서 일하신 열매를 보여주실 때, 능력있는 위로와 확신을 얻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